음악실의 유령

 


당신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무지하여 눈치 채지 못했을 뿐 실은 무언가 바뀌기 시작했던 그 날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를 것 하나 없던 오전이었음이라고.
그러니까…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베란다 창문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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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이이익.
코드를 꽂아두었던 유리 티포트의 주둥이에서 수증기 빠지는 소리가 납니다. 오전 댓바람부터 틀어두었던 뉴스의 주제가 전환된 것은 그 때였습니다.
라가 티포트의 전원을 끄고 이른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식탁에 앉으면, TV속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나운서의 표정은 짐짓 심각합니다. 편성된 채널의 인트로격인 멘트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본격적인 보도가 시작됩니다.
그러고보니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은데…. 문득 TV의 볼륨을 낮춰두었던 것이 떠오릅니다.
라 콕스:(리모컨을 어디에 두었더라…. 주변 두리번대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은 없는 듯. 게으르다. TV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아나운서 한 달 전 A시에서 시작된 유행성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최근 세계보건기구는 전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입자가 기이하게도 단백질 껍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DNA나 RNA등의 유전체 또한 실재하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아나운서: 더욱 특이한 점은 환자의 체내에서 발견된 바이러스 입자가 오존분자와 유사한 형식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입자를 과연 바이러스 입자라고 일컬을 수 있겠느냐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아울러 전염성이 강하다고는하지만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동물에게서 동물에게로, 곤충 내지는 공기나 물을 통해서 감염이 이루어지는 병이 아니므로 전염병이라 칭하기에도 무리가 있다는 겁니다.
일부 학자들이 지구온난화의 가속으로 인한 미지의 바이러스일 가능성을 주장하는 한편, 당국을 포함한 WHO에서는 계속해서 질병의 감염 경로를 연구중에 있습니다.
:정형화된 톤의 아나운서 멘트가 마무리 되면 화면이 뒤바뀌며 블러처리된 대형 병원들의 외관이 연이어 흘러나옵니다.
이번 전염병에 감염되면 체중이 급격히 감소하고 피부가 트는 등 사람에 따라 각종 면역력 결핍 증상을 보이지만,
대표적인 증상은 서서히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하다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이라는 기자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라 콕스:
지능
기준치:80/40/16
굴림:37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전세계를 강타한 이번 유행성 전염병의 병명이 아직까지 공식 발표되지 않았음을 떠올립니다. 증상이라 부를 것도 각기 다 다른 것이어서, 그나마 공통적인 증세라고는 고열을 앓게된다는 점 말고는 밝혀지지 않았다니까요.
환자들은 해열제 섭취시 효과를 보였지만 일시적인 호전세를 보인뒤 다시 펄펄 끓는 열병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항간에서는 유행성 독감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던데…. 참 기묘한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라는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라 콕스:(깊은 잠? TV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연다. 전염병에 관한 소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정말 심각하다면 휴교를 했겠지…. 조금은 안일한 생각과 함께 아침 거리를 꺼내기 시작한다.)
(라 콕스는 본디 아침을 잘 챙겨 먹는 타입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바쁜 아침, 분주히 움직이고 싶진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으며, 이른 오전부터 속을 가득 채우고 싶진 않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고로 오늘의 아침 또한 무척이나 간단했을 것이다. 토스터에 식빵을 넣어 굽는다. 양면이 노릇노릇해진 빵을 꺼내 단면에 버터를 바르고, 그대로 입에 문다. 바삭거리는 소리를 뒤로한 채 커피마저 컵에 따르니, 단출한 식사의 완성이었다.)
:맛잇겟다.
라가 느긋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있노라면, 등교시간이 임박합니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등교하나요?
라 콕스:(천천히… 느긋하게… 서두르지 않고 느릿느릿 걸어서 등교합니다.)
:라가 신발끈을 묶고 거울을 확인하면 가슴팍에 간신히 달려 있는 교복 명찰에 눈이 갑니다.
곧 떨어질 것처럼 덜렁거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라 콕스:(응? 명찰 만지작.)
명찰: (툭...)
:두고가는 게 좋겠어요.
라는 느긋하게 걸어서 등교하기로 합니다. 길목에서는 화창하고 잔잔한 풍의 피아노 협주곡이 들려오네요.
라 콕스:
정신
기준치:50/25/10
굴림:45
판정결과:보통 성공
:맑은 하늘에 가벼운 공기. 여유로운 아침을 만끽하며 잠시나마 붕 떠있던 기분이 노골적으로 가라앉습니다.
왜일까요? 피아노를 그만둔 뒤로 건반에 더 손을 댄 적은 없어도 곡을 듣는 것까지 질렸던 적은 없는데….
라 콕스:
SAN Roll
기준치:50/25/10
굴림:93
판정결과:실패
:이미 한 번 음악에 대한 의지를 저버린 탓인지 청각과 마음이 전같지 않습니다. 방금 느꼈던 메스꺼움도 그만둬버린 음악에 대한 내면의 적개심일까요. 아니면 미련일까요.
넓지도 좁지도 않은 시멘트 길의 인도를 따라,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등교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씁쓸한 입맛을 돋굽니다. 여름이니까요.
정문 통과는 여유롭게 세이프. 라는 3학년 A반의 학생으로,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서면 조례 직전 출석이 막 진행되려던 참입니다.
선생님:빨리빨리 앉아라.
:C반 선생님의 불같은 호령이… 잠깐만,
C반 선생님이요? 여긴 A반인데요? 그러고보니 자리 배치도 어제와 묘하게 다른 것 같은 기분이?
라가 생각하고 있노라면 선생님은 도끼눈을 뜹니다. 분필이 날아오기 전에 얼른 비어있는 자리에 앉는 것이 이롭습니다.
라 콕스:
관찰력
기준치:70/35/14
굴림:90
판정결과:실패
:급한대로 빈 책상에 앉아 책가방을 내려둔 뒤 교실을 쭉 둘러봅니다.
라는 한달전부터 시작된 유행성 질병으로 인해 텅텅 비어있던 열댓 개의 책걸상이 모르는 아이들의 머리통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역시 반을 잘못 들어온걸까요?
다시금 교탁으로 눈을 돌리면 출석체크 진행이 한창입니다. 앞자리나 옆자리에 앉은 친구를 살피거든 A반 학생, 라의 반 친구가 맞습니다.
아무래도 C반 아이들과 한데 섞여 있는 모양인데, 어떡할까요?
라 콕스:(이게 무슨 일이람…. 앞자리에 앉은 A반 학우에게 말을 걸어 본다.) 반 배치가 조금 바뀐 것 같은데. 담임 선생님도 그렇고.
A반 친구: 아~ 요즘 애들 전부 열 난다고 병결 장난 아니잖아. C반 애들이랑 합반 수업한댔어. 그래서 아침부터 책걸상 옮기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지각이나 할 걸.
유독 결석생 많은 반은 오늘부터 이렇게 묶어서 수업 할 건가봐. 아무리 끼리끼리 감염 안 되는 병이라지만 이 시국에 학교를 나오라니… 너무하지 않냐?
라 콕스:(뜻밖의 이득을 본 사람 됨.) 그러게 말이야. 결석자가 더 늘기 전에 휴교나 해버렸으면 좋겠네.
(잠시 낯선 얼굴 주욱 둘러본다.) 합반 수업은 오늘만 하는 건가?
A반 친구: 등교하기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고? (네 말에 킥킥 웃는다.) 아마 애들 어느정도 돌아오기 전 까지는 계속 합반일걸~
:친구는 성실히 대꾸해주면서도 아침부터 있었던 책상과의 씨름으로 무척 고단한 참인지 하품을 합니다.
쩍 벌어지는 입 너머로 피로함이 다 느껴질 정돕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라 콕스:
관찰력
기준치:70/35/14
굴림:17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어쩐지 아까부터 얼굴 언저리가 따갑습니다. 이건 마치, 누군가 이 자리를 쭉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 고개를 휙휙 돌려봐도 짚이는 구석이 없습니다.
다들 하품을 하고 있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조례 풍경이네요.
…잠시 뒤 라를 포함한 모든 학생의 출석체크가 종료됩니다.
임시 통합 담임을 맡게된 C반의 선생님이 교탁 위로 출석부를 탕탕, 두어번 두드린 뒤 말합니다.
선생님:아까도 말했지만 뒤늦게 등교해 듣지 못한 사람이 있을테니 다시 한 번 공지한다. 갑작스럽겠지만 오늘부터 결석생 수가 많은 반을 임의로 묶어 합반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A반 C반은 미술, 음악중에 음악 과목을 선택한 반이지? 비슷하게, 미술을 선택한 B반은 D반과 합반 수업을 진행한다는 소식이다.
A반 선생님이 유행성 질병으로 병가를 내게 되셔서, 오늘부터 내가 A반과 C반의 통합 임시 담임을 맡게 됐고. 참고로 우리 반은 지금부터 A-1반이다. 이상, 조례 끝. 다들 조용히 1교시 준비하도록.
:성황리에 황당한 공지를 일단락한 임시 담임 선생님이 안내를 끝마친 직후 교실 앞문 너머로 사라집니다.
몇몇 아이들의 얼굴에 불만의 기색이 내비쳐지는 한편, 원래 알던 사이인지 옆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아이들도 눈에 띕니다.
바뀐 임시 시간표에 따르면 1교시는 수학이라고 하네요. 비어있던 자리가 라의 책상이었던 모양인지 책상 사물함에 손을 넣어보면 라의 이름이 적힌 교과서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
:지루한 수업시간이 끝이 나고, 마침내 점심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종이 치기도 전에 위 아래로 울려대는 아이들의 발소리는 병마가 한 바탕 휩쓸고 간 지금, 이전보다 현저히 작습니다.
오늘의 점심메뉴나 느긋하게 확인해볼까요?
아몬드밀크와 연어샐러드, 양송이 스프, 그리고 마늘빵과 그릴드비프 파니니네요.
당신이 좋아하는 메뉴가 있나요?
라 콕스:(그리 티 나진 않겠지만 표정이 밝다. 점심 메뉴가 마음에 들었던 탓. 스프나 빵 종류는 늘 반갑지.)
:만족스러운 점심메뉴에 어지러웠던 아침도 조금은 잊혀져갑니다.
스프와 빵을 좋아한다면 더 받으러 가도 좋겠어요. 아무래도 학생들의 인기 메뉴는 아몬드밀크와 파니니같습니다.
점심을 해결하고 교실로 돌아와 바뀐 시간표를 재차 확인하면, 5교시는 음악 수업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교실 칠판에 노란색 분필로 작성된 커다란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5교시 음악이래~! 교과서 챙겨서 음악실로 이동할 것!'
:하필이면 음악 수업이라니… 내키지 않습니다.
라는 교과서를 어디에 두었나요?
라 콕스:(사물함을 열어 구석진 곳에 놓아둔 교과서를 꺼낸다.)
:라가 교과서를 챙기기 위해 사물함 내부를 뒤적이면 쉽사리 음악 책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어쩐지 사용감이 영 낯익지 못합니다.
라 콕스:(음? 교과서 요리조리 살핀다. 반 친구와 책이 바뀌기라도 했나?)
라 콕스:
관찰력
기준치:70/35/14
굴림:90
판정결과:실패
:교과서를 뒤집어 살핀 라는 책 모서리에 적혀 있는 낯선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잉크가 번져있어 이름을 제외한 성씨만 확인됩니다. '3학년 C반, Cherry Ash.'
애쉬? 들어본 적 없는 성씨에요. 명확한 정보라고는 교과서의 주인이 C반의 학생이라는 점 뿐이고요.
오늘부터 전체 합반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으니, 이 교과서의 주인도 5교시의 음악실에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갖다줘도 나쁘지 않겠네요.
3학년 A반은 3층, 음악실은 5층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최근 엘리베이터 고장 문제로 여지껏 수리가 미뤄지고 있으니 하는 수 없이 계단을 이용해 올라가도록 해요.
라 콕스:(이게 왜 내 사물함에 들어 있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교과서를 챙긴다. 느릿느릿 계단을 올라 음악실로 향한다.)
:수업 시작 종울림을 목전에 둔 시간인지라 복도는 한적하기만 합니다.
주욱 시원하게 뻗은 복도 창 너머로 초록이 우거지고 청음이 기승을 부립니다. 여름이 불시에 목구멍에 들이닥친 듯한 기분.
그 막연함을 가르고 어디선가 나지막한 악기 소리가 들려옵니다.
라 콕스:
듣기
기준치:60/30/12
굴림:44
판정결과:보통 성공
:끊길듯 가냘픈 소리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연주를 재개합니다.
당연하게도 저 복도 끝에 자리하고 있는 음악실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라 콕스:
듣기
기준치:60/30/12
굴림:2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지능
기준치:80/40/16
굴림:26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순간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곡의 완성도가 훌륭하기 때문일까요?
상대는 템포와 리듬감 할 것 없이 악상의 표현이나 곡의 이해도 또한 뛰어난 편입니다.
연주자는… 고등학생이 아니지 않을까요? 라 알기로 이 학교에 이만큼이나 피아노를 잘 치는 학생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먼저 도착한 음악 선생님일지도 몰라요.
라 콕스:(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겨 본다. 창 너머로 연주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까?)
:라가 창가로 다가감과 동시에 점심을 해결하고 뒤늦게 몰려온 아이들이 교실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옵니다.
피아노 연주자는요? 당연하게도 피아노 연주는 이미 끊긴지 오래네요.
아쉬움에 젖어있을 쯤, 음악실 어딘가에서 아이들의 대화가 들려옵니다.
학생A: 근데 누가 피아노 연주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학생B: 그랬나? 아, 그러고보니 이 학교 원래 음악실에 귀신 나온다고 했어. 그 소문이 진짠가 봐!
학생A: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정말 귀신같은 걸 믿어?
학생B: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니까, 요즘 애들 없는 시간에 간간이 5층 음악실에서 피아노 연주 소리 난다고. 왜, 나 작년에 클래식 동아리에 아는 선배가 있었잖아. 그 선배가 축제 기간에 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는데, 달밤에 피아노 소리가 나서 눈 딱 감고 음악실 문을 열어봤는데 아무도 없었다는 거야!
학생A: 헛소리! 됐고, 이제 그만 앉아. 벌건 대낮부터 웬 귀신 얘기야?
학생B: 진짜라니까!
:학생들의 투닥거리는 소리가 멀어지면, 라는 자꾸만 아까의 피아노 소리가 신경쓰입니다.
선생님도 아닌 모양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였을까요?
그 전에 왜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 거지…. 정말 귀신이었나? 됐고, 신경 끄자. …그런데도 신경이 쓰입니다.
때마침 수업 종이 울립니다. 마흔 명에 육박하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음악실을 서성이다 각자 자리를 찾아 착석합니다.
라 또한 적당히 빈 자리에 몸을 앉히고 선생님을 기다리다보면… 톡톡.
누군가 어깨를 두드립니다.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면… 응? 모르는 얼굴입니다.
:기다란 머리카락을 검은 리본으로 올려 묶은 잿빛 눈동자의 소년. 뺨에 찍힌 붉은 점이 특징적인…
그 인상을 바라보고 있노라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이 묻습니다.
체리 애쉬:혹시 옆자리가 비어 있는 거면, 제가 앉아도 될까요?
라 콕스:(붉은 점 흘긋 바라보다가도 옆자리를 치워 낸다. 올려둔 것도 없긴 했다마는. 책상 말끔히 비운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고, 제 책상 위로는 음악책을 올려 둔다. 텅 빈 책상에 책 외의 것은 올려두지 않았으니 모서리에 적힌 '─── Ash' 라는 이름 또한 고스란히 드러났을 테다.) C반, 맞지?
체리 애쉬:어! 어떻게 알았어요? 아참~ 우리 A반이랑 C반밖에 없죠?
라 콕스:(또다시 고개 한 번 끄덕였다.) A반이라면 얼굴 정도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처음 보는 얼굴이니 C반일 거라고 생각했어. 이쪽은 라 콕스라고 하는데, 너는?
체리 애쉬:역시나! 나는 체리 애쉬라고 해요.
:그리곤 책 한 권을 라에게 건넵니다. 꼼꼼히 살피지 않아도 그 책은… 사라졌던 라의 음악 교과서네요!
선이 뚜렷한 손가락의 둘레를 따라 채워진 엄지의 검은색 반지의 테가 단정하게 빛을 반사합니다.
시중에 저런 디자인의 반지를 팔던가? 꼭 처음 접해 생소한 이계의 보석처럼 느껴집니다.
체리 애쉬:A반 애들이라면 저라도 조금 알고 있거든요~ 혹시, 반에서 잘 안 나와요?
라 콕스:음……. (사실이니 할 말이 없다.) 그런 편이지…. (이후 짧은 침묵. 말없이 교과서를 받더니, 이윽고 제 책상 위에 올려둔 교과서를 들어 내민다.) 애쉬라고 했지? 네 책이 내 사물함에 들어 있었어. 어쩌다 뒤바뀐 걸까.
체리 애쉬:으어~… (말끝을 길게 늘였다.) …글쎄요? 제 자리 서랍에 들어있던걸요. 아무튼 교과서가 없으면 혼나잖아요! 시작 전에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죠~ 겸사겸사 말도 트구~
:그리 말하는 체리는 사람 좋게 웃어보입니다.
뭐… 오전에 책걸상을 옮겼다고 했으니, 그 틈에 두 사람의 자리가 섞였을 법도 합니다. 아니면 정말 유령의 짓일지도 모르겠네요!
라 콕스:(그러고 보니 책걸상을 옮겼다고 했었나. 그런 것치고는 다른 교과서들은 멀쩡했던 것 같은데. 생각과 함께 말이 이어진다. 다소 짓궂은 어조.) 내가 라 콕스인 줄은 어떻게 알고? 오늘은 명찰도 달아두지 않았는걸.
체리 애쉬:응? 명찰을 안 하고 왔다구요? (그제서야 네 가슴팍에 시선이 닿는다. 이후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동자가 교실을 나뒹굴었다. 그는 멋쩍게 뺨을 긁으며,) 그게 말이죠~… 음, 사실 나는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요….
:더 물으려던 순간, 음악실의 출입구가 열리며 음악 선생님이 들어옵니다. 체리는 어느새 정자세로 몸을 돌리고 턱을 괸 채 칠판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의문만을 남긴채 대화는 흐지부지 종결되고 맙니다.
선생님:자, 오늘 78p 바로크 시대 작곡가 파트 진도 나갈 차례지? 내가 알기로 A반 C반 진도가 비슷했거든? 모두 책 펼치자.
유럽 문명사에서 지칭되는 바로크 시대란 보통 17세기를 가리킨다는 거, 저번 시간에 먼저 이야기 했었지? 17세기의 예술을 가리킨다고….
:점심시간 종료 이후, 선생님이 음악실에 등판함과 동시에 수업이 시작됩니다.
점심 식사 직후인지라 어마어마한 식곤증이 밀려오네요. 벌써부터 꾸벅꾸벅 조는 등 시동을 걸고 있는 아이들의 수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78p를 펼치기 위해 교과서 페이지를 넘기던 라는… 어라? 60p쯤에서 전에 본 적 없던 작곡가의 이름을 발견합니다.
소제목은 'A에 대하여'. 원래 음악책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던가요?
A라는 작곡가가 존재했던가요, 과거에 나름 오래간 피아노를 전공했던 자신이 교과서에 실릴 만큼 이름난 작곡가를 모를리 없는데…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듭니다.
라 콕스:
SAN Roll
기준치:49/24/9
굴림:84
판정결과:실패
:손 놓고 지내는 동안 머리가 돌처럼 굳어버린 건가? 비교적 최근에 발견되었다는 A의 곡에 대한 기사 내용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라 콕스:
관찰력
기준치:70/35/14
굴림:39
판정결과:보통 성공
:박스 하단에 작은 글씨로 새겨진 메모를 추가로 발견합니다.
실제로 <겨울이 흘린 눈물>의 원본을 보았다는 예술가의 증언에 따르면 악보 <겨울이 흘린 눈물>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특이한 인장이 찍혀 있었다고 합니다. 형태가 무척 조악했으며 세월에 바래 누렇게 떠있었다고요.
달리 흥미로운 내용은 아닙니다. 아마 작곡가 A의 자필 사인이었을 겁니다.
라 콕스:
지능
기준치:80/40/16
굴림:70
판정결과:보통 성공
:마침 몇년 전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A에 대한 기사를 접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음악에 문외한인 인물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매혹적인 악보였다는 뜬소문이 내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그런데 그게 도둑을 맞았었나봅니다. 심지어 나머지 한 곡은 분실되었고요.
라 콕스:(그러고 보니 이런 일이 있었지…. 그런데, 이 작곡가가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가? 괜히 몇 차례 책을 더 뒤적이다가도 놓는다.)
:진도가 하나 둘, 나갈 때 마다 아이들도 하나 둘씩 졸음에 꺾여나갑니다.
잘버티는가 싶던 옆자리의 체리마저도 꾸벅꾸벅 졸더니, 이내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버리네요.
말랑한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에 시선이 갔다가도 쉬이 흩어집니다.
음악실의 에어컨이 고장난 걸까요… 너무나 덥습니다. 바깥에서는 매미가 울고 풀벌레가 나무를 깁니다.
방충망에 달라붙어 있던 나비 하나가 창틀을 타고 오르다 이내 나뭇잎 너머로 자취를 감춥니다. 여름이네요.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염증이 날만큼 물러 터졌는데 시간은 너무나도 착실히 흐릅니다.
책가방을 싸거나 집에 갈 준비를 서두르며 종례를 맞이하고 있는데…
선생님:"라 콕스"
:담임 선생님이 갑작스레 라의 이름을 호명합니다.
각자 떠들던 아이들의 시선이 당신의 자리에 고였다가도 빠르게 흩어집니다.
듣자하니 임시 출석부가 음악실에 있는 것 같다며, A, C, 두 반 모두 반장이 결석해 없는 고로 라가 음악실에서 출석부를 들고 교무실에 가져다둔 뒤에 하교하라는 심부름입니다.
반문하고 싶겠지만, 선생님은 라의 책상 위에 음악실 열쇠를 내려두고 종례 선언을 끝마친 뒤 교무실로 사라집니다.
하는 수 없이 음악실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가야겠네요.
라 콕스:(난 또 내가 모르는 사이 무슨 사고라도 친 줄 알았다. 별것 아닌 심부름이라 다행이지. 열쇠를 챙겨 음악실로 향한다.)
:마스터키를 들고 5층으로 발걸음하면, 음악실의 방음 문이 좁은 틈을 벌리고 열려있음을 발견합니다.
그 사이로 오후 다섯 시의 비산하는 빛줄기가 묘연히 바닥을 적시고 있고요.
누군가 음악실에 잔류해 있는 걸까요? 마지막으로 음악실을 사용했던 다른 반의 주번이 잠그는 일을 깜빡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유추하고 있노라면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작달만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곡은… 익히 들어왔기에 잘 알 수밖에 없는 곡입니다. 드뷔시의 달빛.
누구인지 모를 연주자의 손끝에 의거하여 피아노 독주가 막 시작되는 찰나입니다.
라 콕스:
지능
기준치:80/40/16
굴림:23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부유하던 먼지와 공기가 미세한 파동이 되어 호수 밑바닥까지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부터였어요.
종례를 할 때면 계단은 한적했고 꽤 아득히 느껴지는 상층에서는 늘 정체 모를 누군가의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려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상대는 어쩌면 오늘 음악 시간 시작 전에 문 너머에 있었던 그 사람일지도 모르죠.
라 콕스:(발소리를 죽여 다가선다. 문틈 사이로 연주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을까?)
:늘 환청같은 피아노 곡소리를 들으며 계단을 내려가던 기분이 좋았는지 싫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은 여전히 열려있고 연주는 거리낌이 없습니다. 문틈 너머로 누군가가 있는지 확인하려 하면… 잘 보이지 않네요.
페달을 밟는 하얀 실내화와 교복바지가 보입니다.
라 콕스:(그대로 문에 기댄 채 눈을 감는다. 마지막 음이 울리기 전까지는 문을 열지 않을 심산이었다. 음악이 좋아서? 새삼스레 감상에 빠졌던 탓에? 연주자가 몰입한 것 같아서? 달빛은 짧은 곡이니까…. 부러 변명거리를 늘어놓는다. 음악과 멀어지고 싶은 것인지, 다시금 가까워지고 싶은 것인지…. 상념에 빠질 찰나 곡이 끝으로 치닫는다. 마지막 프레이즈가 연주되고, 페달음마저 사라질 무렵에야 눈을 뜬다. 이어 음악실 문을 두어 번 노크하고 문을 연다.)
:문을 가르고 접어든 공간의 꼭 닫혀있던 커튼이 말갛게 걷힌 가운데, 잠시 눈 앞이 하얗게 정전했습니다.
산발하는 태양 빛은 이따금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구석이 있습니다.
눈부신 빛에 적응한 시야 너머로 들어오는 것은 예의 그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 투명한 햇빛을 눈부시게 반사해 고아한 빛을 뿜는 악기 너머 건반을 다루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오늘 음악 시간에 함께 수업을 듣던 C반의 체리입니다. 막연히 듣기에도 굉장히 탁월한 실력입니다.
청명한 수풀이 푸르른 가운데 녹색으로 물든 빛이 등 뒤를 적시고 있습니다. 순간 넋이 나갈 뻔했습니다.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이 그만 두어버린 피아노를 정성껏 연주하는 체리를 바라보는 라의 심정은 어떤가요?
:체리는 노크소리에 고개를 들고 라를 마주합니다.
손가락이 건반에서 떨어져 나오면, 그 옆에 세워두었던 녹음기를 멈추고, 주머니에 집어넣습니다. 아, 눈이 마주치면…
체리 애쉬:어, 언제 왔어요?
라 콕스:방금 왔어. 4마디 즈음 연주할 때였나. (처음부터 다 들었단 뜻.) 듣기 좋던걸. 전공이야?
체리 애쉬:그냥 들어와도 되는데…. (옆머리를 손가락에 꼬았다.) 전공이라, 글쎄요. 재밌잖아요, 피아노는~ 볼 일이 있는 거예요?
라 콕스:(재미있던가? 잘 모르겠다.) 녹음하고 있었잖아. 방해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괜히 주변 살피는 체를 했다. 찾는 것은 교사의 책상에 있을 게 뻔한데도.) 출석부를 가지러 왔어. 담임 선생님 심부름으로. 금방 갈 거니까 이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체리 애쉬:출석부요? 아하~ 음악시간에 두고 갔었구나. 흠~ 이렇게 누가 찾아올 줄 알았으면 내가 가지고 갈 걸 그랬네요! 아마 교탁에 있지 않을까요? 으쌰, (반댓편으로 다리를 넘긴 그는 콩콩 뛰어 출석부를 들어올렸다가, ) 음! 이거… 우리 사진도 있을까요?
라 콕스:있지 않을까. 한번 살펴보지 그래. (권유와 동시에 한 발자국 다가선다. 그렇다. 본다면 같이 볼 셈이다.)
체리 애쉬:갑자기 합쳤다고 했으니까요~ (네게 손짓했다다.) 라는 잘 나왔어요? 내 친구는 완전 다른사람처럼 나왔던데.
라 콕스:(잘 나왔다 1 음... 2 1)
글쎄…. 비슷하게 나온 것 같은데. (그런 쪽으로는 관심이 없어서. 덧붙이며 슬금슬금 옆에 붙는다.) 너는?
체리 애쉬:나요? 나는… 잘… 기억이 안나는데…?! (슬그머니 제 사진을 손으로 덮는다. 슬그머니 저 혼자만 미리 확인해본다….)
…… ……. 오! ………(그제서야 손을 치운다.) 어때요?(???)
라 콕스:(출석부의 사진을 한 번 보고, 체리 애쉬를 한 번 보고… 다시 출석부의 사진을 두 번 보고, 체리 애쉬를 두 번 본다. 영문 모를 침묵이 길어진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순한 장난이었다.)
체리 애쉬:어어?!… (괜히 상처입은 표정을 한다. 그럴 리 없다는 듯 다시 제 사진을 보았다가, 삐죽 아랫입을 내민다.) 이, 이상해요? 괜찮은 것 같은데….
라 콕스:(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고 작게 웃는다. 잘게 떨리는 어깨가 멎을 무렵에야 말을 잇는다.) 장난이야, 장난. 잘 나왔어. 네 모습 그대로인걸. 체리 애쉬라고 했지. 음악실엔 자주 오니?
체리 애쉬:에잇, 놀랐잖아요~ 라도 엄청 잘 나왔어요, 실물만큼은 아니지만~… 아! 라라고 불러도 되죠? 같은 반이기도 하구. 괜찮으면 증명사진도 교환할래요? 분명 지갑에 하나 남았던 것 같거든요~? (네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분주히 사진을 찾던 것을 멈추곤,) 음악실이라~ 보통 그렇죠! 왜요?
라 콕스:음악실에 유령이 있다고 해서. 한 번쯤 본 적은 없는지 물으려고 했지. (무던히 답하면서도 지갑을 꺼낸다. 라 콕스의 성정상 타인과─게다가 통성명을 한 지 하루도 되지 않은 상대라면 더욱이!─ 소지품을, 더군다나 사진을 교환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거부를 표하기도 전에 사진을 찾아 내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희한한 일이었다. 모든 게 햇볕 탓이다. 날씨의 탓이고, 여름의 탓이다.)
체리 애쉬:아~ 아하~… …아하하하! (한참을 크게 웃었다) 라도 유령얘기를 신경쓸 줄은 몰랐는데! 네에, 그거 아마 내 얘기일 거예요. 방과후마다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치
거든요. (왜그냥갓지요?)
(제 사진을 네게 건네곤 네 것을 받아갔다.) 와~ 신난다! 애들은 전혀 바꿔주질 않았거든요. 잘 못나왔으면 좀 어떤지. 보여주기 싫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아! 그래서 그런가? (즐거운 얼굴로 교환한 사진을 바라보다가, 눈을 맞춘다.) 라도, 피아노 치죠?
라 콕스:(프레임 너머의 얼굴을 곁눈질한다. 사진, 이상하게 나왔네. 웃는 게 훨씬 나아. 따위의 생각을 하며 받은 것을 제 지갑에 밀어 넣는다. 타인의 사진을 지갑에 보관한다니! 연인 관계에나 할 법한 행위였음에도 자각이 없다. 어쩌면 인지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쳤었지. 지금은 그만뒀어. 왜?
체리 애쉬:엇! 정말요? 왜요?… (눈에 띄게 아쉬운 얼굴이다. 느릿한 손가이 지갑 안으로 사진을 밀어넣으면, 조심스레 입을 뗀다.) 사실… 준비하고 있는 곡이 하나 있거든요. 객관적인 시선으로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데, 다른 사람들은 다 병결이라. 으음…~~ (힐끔힐끔….)
라 콕스:다른 데에 재미를 붙였거든. 그래도 듣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네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도와줄 수 있어.
체리 애쉬:그럼, 피아노가 싫어졌다거나… 그런 건 아닌거죠~? (가볍게 웃는 소리와 함께 굳었던 표정이 풀린다.) 진짜요?! 그래줄래요? 그럼, 내일 조례시간 전에 음악실로 와줄 수 있어요? 음~ 한 7시 쯤!
라 콕스:그렇긴 한데. (어째서 네 표정이 굳었던 건지. 의문은 밀어 삼킨 채 고개를 끄덕인다.) 유령 치곤 이른 시간인걸. (가벼운 농.) 그래, 내일 보자. 기대하고 있을게.
체리 애쉬:좋아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슬슬 돌아갈까요? 출석부도 가져다 놓아야 하잖아요.
라 콕스:같이 가려고?
체리 애쉬:응? 우리 사진도 교환했는데~ 친구를 두고 혼자 갈 거예요~?
라 콕스:더 연습하다 갈 줄 알았지. 끝났다면 같이 가자.
체리 애쉬:네~ 집에 가요!
:아침 밝아옵니다. 이른 시간부터 밝아오는 하늘과, 평소와는 다른 때에 울리는 알람소리.
체리의 부탁대로 라는 7시에 맞추어 등교를 하게 됩니다.
나뭇잎 사이를 걸러 들어온 햇빛이 묘하게 어슴푸레하게 느껴지는 오전, 공기는 제법 서늘하고 묶어놓지 않은 커튼에 바람이 나부낍니다.
암막 커튼과 그 위에 이중으로 쳐놓은 쉬폰 커튼이 펄럭일 때마다 텅 빈 사각형의 교실 위로 유령의 몸짓같은 그림자가 일렁이길 반복합니다.
오늘은 라가 가장 빨리 등교한 걸까요? 책가방을 내려놓고 교실을 둘러보면…
텅 빈 서른 대여섯 개의 책상중 유일하게 책가방이 올라와 있는 책상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라 콕스:(책가방이 올라와 있는 책상에 시선을 둔다.)
:책상 위엔 책가방이 올라와 있으며, 나무로 만들어진 책걸상 모서리에 임시 시간표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왼쪽 상단에는 반과 번호를 묶어놓은 학번과 자리 주인의 이름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군요.
라 콕스:(이름 흘긋 본다.)
:Cherry Ash. 용지 위엔 하루사이 익숙해져버린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라 콕스:(음…… 책가방도 슬쩍 본다.)
:책가방을 내려 놓은 직후 이곳에서 무언가를 꺼내 갔는지 가방 지퍼가 살짝 열려 있습니다.
가볍게 살펴보면, 네 다섯권 정도의 얇은 악보집들과 필기 노트, 교과서 몇 권, 필통따위의 학용품들, 손목 아대 등이 있네요.
…주제와 동떨어진 물건이 중간중간 끼어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범해 보입니다.
라 콕스:(혹시나… 뭔갈 놔두고 가지는 않았는지…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본다.)
라 콕스:
관찰력
기준치:70/35/14
굴림:84
판정결과:실패
:켜켜이 쌓여 있는 악보집들 사이로 표지가 누렇게 떠있는 악보집 하나를 발견합니다.
꽤 오래 된 악보집인 모양인지 표지만 들여다보아도 꼬질꼬질한데다 기스가 잔뜩 나있습니다.
라 콕스:(곡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을까?)
:가방 안에서 살피는 정도로는 잘 보이지 않네요, 꺼내서 펼쳐볼까요?
라 콕스:(슬쩍… 펼쳐본다.)
:체리, 미안해!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라는 밀려오는 죄책감을 감당해야합니다..
라 콕스:
SAN Roll
기준치:48/24/9
굴림:83
판정결과:실패
:미.. 미안해.. 라 콕스 이성 1 감소합니다.
악보를 펼쳐보면, 음표가 수놓인 모양을 미루어 생초면의 작품입니다. 체리는 작곡도 겸하고 있는 걸까요?
아울러 1p 상단에 뉴스 헤드라인처럼 자필로 작성되어 있는 곡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건… 이탈리아어같네요.
이름을 읽어보려면,
라 콕스:
교육
기준치:60/30/12
굴림:10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이탈리아어라면 이전에 가볍게 접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야, 라는 책을 좋아하니까요. 그 때의 지식을 더듬어…
곡명은… <여름의 유령> 이네요.
라 콕스:
지능
기준치:80/40/16
굴림:2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첫 마디만을 살펴도 꽤나 매혹적인 곡입니다. 불현듯 어제 5교시에 음악 교과서에서 발견했던 'A에 대하여' 대목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어요.
A는 16세기의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로 <겨울이 흘린 눈물>과 곡명이 알려지지 않은 의문의 계절 환상곡을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 했던가?
도둑 맞아 곡명은 미궁 속에 숨어 있다던 계절 환상곡이 마음에 걸립니다.
만약 <여름의 유령>이 정말 300년 이상 된 곡이라면, <겨울이 흘린 눈물>과의 작곡 시기가 얼추 맞물리겠습니다.
라 콕스:
SAN Roll
기준치:47/23/9
굴림:45
판정결과:보통 성공
:…그런데, 어라?
단언할 수 없으나 이 장면은 분명 언젠가 본 적이 있습니다. 혹은 경험했거나요.
데자뷰란 본디 뜬금없는 현상이긴 합니다만,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불쾌하다기보다는, 지금 이 장소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
라 콕스:
SAN Roll
기준치:47/23/9
굴림:77
판정결과:실패
:라 콕스 이성 1 감소합니다.
체리의 악보를 살펴보고 있으면, 교실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7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립니다.
시계를 확인하면 시침과 분침은 7을 가리키고 있고 초침은 막 숫자 5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약속 시간인 오전 7시입니다.
찜찜하다기보단 의뭉스러운 상태가 이어집니다. 우선은 더 늦기 전에 음악실로 올라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마치 그 누구도 손대지 않은 것처럼 음악실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보지만 오늘은 이 너머에서 달리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는군요.
라 콕스:(어제처럼 음악실 문을 두어 번 노크한 뒤 문을 연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면 부드럽게 돌아갑니다. 열려 있으므로 어렵지 않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네요.
음악실로 들어서면 어제와 같이 환하고 눈부신 여름의 햇살이 라의 전신을 덮칩니다.
이름난 과거 음악가들의 초상화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방음벽 어귀에 붙어 있고, 교탁 너머의 칠판에는 분필 가루가 얕게 묻어나긴 했으나 그 나름대로 깨끗하고 푸르기만 합니다.
오래된 악기만이 머금은 특유의 냄새는 익숙한 종류여서, 늘 이 냄새를 기억하고 있던 심장만이 조용히 두방망이질 칩니다.
창틀 너머로 풀잎의 싱그럽고도 비릿한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콧잔등을 건드리면 그제야 정신이 드는 것입니다.
그 단정하고 고요한 음악실 가운데 그랜드피아노 앞에는 약속처럼 체리가 앉아 있습니다. 체리는 뚜껑이 닫힌 피아노에 팔꿈치를 기댄 채 머리를 지탱하고 있네요.
:이 둔한 소년은 여전히 당신의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상태로, 어딘가 몸이 좋지 않은듯 안색이 창백합니다.
비단 오전의 하얀 백색광선 탓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지나갑니다.
라 콕스:체리? 왜 그래? (서둘러 다가선다. 당신의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대기도 했다. 열이 나나?)
:그 때, 체리가 고개를 들어 당신을 올려다봅니다. 병약한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금새 밝은 미소를 띕니다. 일순 닿았던 피부엔, 여름처럼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던 것도 같습니다.
체리 애쉬:어! 언제 왔어요? 그냥 부르지. 라도 참 기척이 없네요~ 나도 그런 말을 좀 듣거든요.
라 콕스:(고개를 들면, 볼에 가져다 대었던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그런 것보다도…. 너, 아프잖아. 열이 있는데. 괜찮은 거 맞아?
체리 애쉬:(멀뚱히 바라보다, 머쓱한 듯 제 뺨을 긁었다.) 걱정해주는 거예요? 헤헤, 그정돈 아닌데. 이렇게 움직일 수도 있구요. 정말 아프면 꼭~ 쉴테니까! 무엇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 (제 옆의 악보집을 책상 위에 펼쳐놓았다.)
이 곡들 말예요, 어떤 것 같아요? 라가 좋아하는 노래도 있어요?
라 콕스:(말썽꾸러기 동생 보는 듯한 눈빛…. 작게 한숨을 쉰다.) 약속한 거야. 정말 아프면 꼭 쉬기.
(이어 악보집을 바라본다.) 글쎄…. 특별히 좋아하는 건. (없다고 답하려 했다. 문득 시야 속으로 들어 온 악보에 말을 멈추어 내더니, 손가락을 들어 짚는다. 바흐의 칸타타 147번.) 이건 꽤 좋아했었지.
체리 애쉬:네에~ 약속! 염려 말아요! (몸을 일으킨 그는 네 손 끝을 향해 시선을 굴린다. 찬찬히 악보를 읽어내리다가,) 칸타타 147… 상투스네요? 나도 이거 좋아하는데. 혹시 교회 다녀요?
라 콕스:가끔 따라가는 정도지. 부모님이 신자시거든. (그마저도 피아노를 관둔 뒤에는 걸음 한 적이 없었다. 신앙은 없고, 예배는 지루했다. 앞으로도 자신이 종교를 가질 일은 없겠다 싶을 정도로.) 너는?
체리 애쉬:정말요? 부럽다! 우리 집은 이제 나 말곤 다니는 사람이 없거든요. 사실 같은 곳을 다니고 있었다던가~? (장난스레 웃는다.)
라 콕스: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겠네. (그리 대꾸하면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며 단정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체리 애쉬는 여름을 닮은 사람이었으며, 라 콕스는 여름을 잊을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너만 괜찮다면 한 번 쳐주지 않을래. 네가 연주하는 걸 듣고 싶어.
체리 애쉬:그럴까요? (많이 쳐보진 않았는데…, 사족을 덧붙이던 그는 피아노 위에 악보와 녹음기를 올려두곤 바로 앉는다. 한 두번 쳐 본 것이 아니라는 듯, 아마추어답지 않은 자세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퍽 정갈해 보였다.)
(짧은 심호흡을 시작으로, 피아노의 현을 타고 공기 중을 자유롭게 누비는 유려한 연주가 들려온다. 정갈한 손끝이 자유로이 건반을 뛰어올랐고, 독특하지만 경박하지 않은 기교가 훌륭한 실력에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꼭 아지랑이처럼 투명한… * 커튼이 풍등처럼 흔들리고, 비행기의 날개소리가 울리면 그의 손이 떨어져 나온다.) …어땠어요?
라 콕스:(귀에 익은 선율이 음악실을 가득 메운다. 기실 라 콕스는 음악에 무료를 느끼던 참이었다. 그랬기에 감상조차 멀리하였고 좋아하던 곡마저 좋아했었다며 표현하지 않았던가. 다만, 어째서인지 이 순간만큼은 음악이 싫지 않아서….)
…좋았어, 전부. (이리 답해버리고야 만다. 열없는 진심을 여름에 담아, 당신에게로.)
준비하고 있는 곡이 있다고 했지. 그것도 듣고 싶은데. 연주해줄 수 있을까?
체리 애쉬:진짜요? 전부 좋아요~? (신발 밑창이 대리석 바닥을 기분좋게 쓸었다. 슥, 슥. 마찰음이 정적을 두어번 깰 쯤이면, 악보를 모아 제 무릎에 정돈한다.) 그것 말이죠~ 사실 무슨 노래를 연주하면 좋을지 아직 못 정했거든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라가 골라준 걸로 할까봐요. 바흐 칸타타 147, 좋잖아요!
라 콕스:(느릿느릿 눈을 깜박인다. 준비하고 있는 연주가 아니라, 준비하고 있는 이 있다고 했잖아. 무얼 숨기고 있기라도 한 건지.) 무슨 연주이길래? 콩쿠르를 준비 중인 거라면, 곡은 바꾸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요강은 확인해 본 거야? (갑자기 현실적인 걱정이나 하며…)
체리 애쉬:에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녜요! 가볍게 남은 자리를 채울 뿐인걸요. 콩쿨이라~ 라는 콩쿨에 나가 본 적 있어요? 어땠어요? 실제로도 마구… 긴장되고 그래요? 사람도 많고?
:곡들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쯤, 덜컹!
일말의 소음과 함께 간이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악보집들이 바닥에 우수수 쏟아져 섞입니다.
체리는 깜짝 놀라 흩어진 악보집들을 주섬주섬 줍기 시작하네요. 낱장의 악보가 발에 채입니다.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진 내용물들을 살피니 체리가 보여준 악보를 제외하고 나서도 그 수가 꽤 많습니다.
훑어보면 체리의 이름이 적혀있는 책도 눈에 들어오지만 구매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포장조차 뜯지 않은 악보집도 더러 보입니다.
라 콕스:
관찰력
기준치:70/35/14
굴림:44
판정결과:보통 성공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틈에 거꾸로 뒤집혀 있던 낡은 악보집 한 권입니다.
뒤집혀 있던 탓에 곡명을 읽지는 못했지만… 라는 악보집의 어귀에 자리하고 있던 어떤 인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주 찰나였지만 <은은하게 빛나던 모양새가 아주 특이한 문양> 이었습니다.
일견 누군가의 자필 사인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라 콕스:(곁에 쪼그리고 앉더니 같이 악보집을 줍기 시작했다. 포장조차 뜯지 않은 악보집도, 낡은 악보집도 모두 주워 내민다.) 이걸 다 들고 다니는 거야?
체리 애쉬:고마워요! (살갑게 웃으며 받아들었다.) 음~ 아뇨오~ 오늘만요~! 집에 있던 건 전부 가져왔거든요. 종이에 뭔가 써있다 하면 죄다 챙겨온 거라, 전부 악보가 아닐 수도… 있고…?
라 콕스:(대답 대신 바닥에 떨어진 낱장의 악보를 주워 든다. 인쇄면을 면면히 훑는가 싶다가도,) 그러게. 전부 악보가 아닌 모양이야. 여기, 네 시험지도 섞여 있네.
체리 애쉬:네에?! 농담이죠?! (급히 바닥의 인쇄물들을 회수했다. 제 시험지를 빠르게 살피곤,) 봤어요? 몇 점인지…?
라 콕스:응, 농담이야. (시험지로 추정되는 종이를 살피면, 평범한 악보가 보였을 것이다. 라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웃음기 어린 어조.) 오늘 말이야, 늦잠이라도 잔 거니? (당신이 주운 악보며 악보집들을 가리킨다.) 눈에 보이는 건 다 집어 온 느낌이라.
체리 애쉬:놀랐잖아요~! 아직 내 성적을 보여주고 싶지 않단 말예요…. 늦잠은! 그…! 나는 분명 넉넉하게 일어났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의외로 찾는 게 어려운 거 있죠! …….(어색하게 웃는 소리가 이어진다.) …진짠데… 먼저 약속해놓고 깜빡 늦는 일은…. (그러나 줄어드는 목소리...)
라 콕스:(깜빡 늦을 뻔했다는 소리군….) 늦어도 신경 안 썼을 거야. 난 기다리는 것에 익숙하거든. 그것보다도…. 떨어진 것 중에 굉장히 낡은 악보집이 있던데. 그건 무슨 곡이야?
체리 애쉬:낡은 악보집요? (시선이 천장 위로 올라가다가도,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하 그것 말이죠, 제가 연주할 수 없는 곡이에요. (누구도 연주해서는 안되기도 하지만… 작게 중얼인 그는 모은 악보를 정리해 피아노 의자에 집어넣었다.) 슬슬 돌아갈까요? 같이 커튼 좀 쳐줄래요?
라 콕스:누구도? (의문을 내비쳤으나 그뿐이다.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통성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동급생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너는 악보만 챙기고 있어. 몸도 안 좋잖아.
체리 애쉬:그정도는 아니라니까요~ 걱정 마요! 그럼 문단속은 내가 할게요, 괜찮죠? (들고 왔던 녹음기를 주머니에 넣고, 자물쇠와 열쇠를 챙겼다.) 맞다, 해가 지고 나서 학교의 음악실엔 들어오면 안 된다는 거 알아요?
라 콕스:(커튼을 전부 내린 뒤 당신의 곁에 섰다.) 아니, 처음 듣는 얘기야. 그런 괴담도 있었나?
체리 애쉬:밤의 음악실엔…(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곤 비밀스레 속삭이다, 와하하 웃으며 놀래킨다.) 귀신이 나오거든요~! 아하, 아하하~! 내가 아니고, 진짜, 진짜 나오는 모양이에요~ 마주치면 큰 일이 난다나. 아무튼, 조심하는 게 좋겠죠?
라 콕스:(이 음악실, 터가 안 좋은가….)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너도 조심해야겠네. 나보다는 네가 더 음악실에 올 일이 많을 거 아냐. 놔두고 가는 것 없지? 해가 진 뒤에 찾으러 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 꼼꼼하게 챙겨야지.
체리 애쉬:헉! 그런가!? 잠시만요! 한 번만 더 볼게요!
라 콕스:
정신
기준치:50/25/10
굴림:58
판정결과:실패
:음악실의 문이 닫히기 전…
닫히는 문틈 사이로 시선이 날아든 것은 잠깐이었습니다.
암막커튼 바깥으로 빛이 차단되어 삽시간에 어두운 칠흑이 내려앉은 음악실이 유독 기이하게 빛났던 것도 같습니다.
귀신 이야기를 들은 직후여서일까요? 찝찝한 기분이 듭니다.
라 콕스:
SAN Roll
기준치:46/23/9
굴림:69
판정결과:실패
(정말 터가 안 좋나 보군…….)
체리 애쉬:이제 돌아가요! …응? 라, 왜그래요? 진짜 귀신이라도 본 것 처럼….
라 콕스:본 것 같아…. (이런 말이나.) 어서 나가자.
체리 애쉬:네에?! 진, 진짜요?! (화들짝 음악실에서 떨어지며...)
점심 시간이 종료되고 또 다시 식곤증이 학생들의 수면욕을 지배하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오후 1시 20분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은 5교시. 물리 시간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있고 불어오는 바람의 빛은 투명합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자장가 같고, 내리쬐는 햇살과 돌아가는 에어컨 소리가 기분이 좋아 졸음만 쏟아집니다.
선생님:거시 세계를 다루는 이론을 뭐라고 한다? 시간의 상대성 이론이라고 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관찰자나 광원의 속도에 관계 없이 진행중인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고 설명 해줬었지?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속도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어허, 왜 다들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어?
적어도 강한 중력이 시공간을 휘게 한다는 이야기는 기억하고 있겠지? 내가 그렇게 강조했는데. 블랙홀은 시공간에 구멍을 뚫는다고 별표까지 달아줬을 거야. 교과서 확인해 봐.
:선생님은 불만스러운 듯, 장난스레 눈썹 한 쪽을 치켜올리더니.
선생님:다들 졸고 있는 것 같으니 잠깐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볼까?
다들 어렸을 적에 시간 여행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 있지? 실제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의 경우 광속에 가까워질 수록 시간이 느려지니까, 빛보다 빨리 나아가면 시간이 거꾸로 흐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
하지만 빛보다 빠른 물질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지? 2011년에 유럽 입자물리 연구소 CERN에서 초광속입자 해프닝이 있기도 했는데, 궁금한 녀석은 학교 끝나고 찾아보도록 해라.
공부를 제대로 한 녀석들은 눈치를 챘겠지만, 시간과 공간이 속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빛보다 빠르게 나아갈 경우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게 아니라 허수의 방향으로 흘러가버린다.
즉,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을 위해선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소리지. 우주 끈이나 웜홀을 사용한다거나. 하지만 웜홀이 그저 가상의 이론 상태일 뿐인 지금, 시간여행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선생님:자, 과연 미래에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가능할까? 혹여나 그렇게 미래에서 건너온 사람은 과거의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라 콕스:
자료조사
기준치:60/30/12
굴림:50
판정결과:보통 성공
:선생님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끝으로 샛길로 빠졌던 수업을 재개합니다.
선생님:다음 시간까지 시간여행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해 제출하도록. 숙제다!
:뒤늦게 파격적인 숙제의 내용을 공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꾸벅꾸벅 졸던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 한껏 야유합니다.
5교시 수업은 다시 본래의 활기를 되찾습니다.
라 콕스:
정신
기준치:50/25/10
굴림:7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얼마 있지 않아 활짝 펼쳐진 라의 교과서 위엔 뜯어진 메모지 조각이 올라옵니다.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미지
:[들를 곳이 있는데 같이 가줄래요?]
이미지
:정도의 내용으로, 방과후에 시간을 내달라는 부탁입니다.
라 콕스:
관찰력
기준치:70/35/14
굴림:22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쪽지의 귀퉁이가 엉성하게 찢겨져 나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 들킬까봐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죠.
라 콕스:(쪽지의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더듬어보다, 이윽고 쪽지를 잘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별달리 하는 일도 없으니 당신에게 시간쯤 내어주는 것은 어렵지도 않다.)
체리 애쉬:(빤히 쳐다보다.. 또 쪽지 던짐)
바빠요?
라 콕스:(대답을 원했던 거였군…. 시선 마주했다간 선생님께 덜미를 잡힐 것이 뻔하니 꿋꿋하게 교과서─정확히는 교과서 위의 쪽지─만을 바라보았다. 이어 필기를 하는 척 메모지를 꺼내 답장을 끼적였다.)
[아니. 방과 후에 보자.]
[그런데 체리, 지금은 수업 시간이야. 집중해야지.]
체리 애쉬:(기쁜 듯 미소를 짓다가도, 입을 삐죽 내밀기도 한다. 이내 신나서 또 답을 작성한다.) 너무 졸려요... 이러면 잠이 좀 깨지 않을까?
라 콕스:어제 늦게 잤어?
체리 애쉬:당연히 일찍 잤죠! 그런데… 음… 그거랑 좀 달라
라 콕스:뭐가 다른데? 수업이 지루한가?
체리 애쉬:그렇죠! 라는 안 졸려요?
라 콕스:난 괜찮아. 수업도 꽤 재밌고. 시간 여행 얘기도 해주셨잖아.
체리 애쉬:대박... 라 공부 잘하죠?
라 콕스:아니, 성적은 편차가 심해. 관심 있는 것만 보거든. 넌 어떻길래? 아침에 했던 농담을 생각하면…. (부러 뒷말은 적지 않았다.)
체리 애쉬:그럼 뭘 제일 잘해요? 나는...ㅎㅎ 안 알려줄래용
라 콕스:문학이나 서양미술사 같은 것…. 왜 안 알려줘?
체리 애쉬:헐~ 엄청 잘 어울려요! 음악은요? …아얏!
선생님:쉬는시간까지 10분남았다, 집중해!
:일찍 끝내주세요~ 어리광 섞인 체리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반 친구들이 하나 둘 동조합니다.
선생님은 교과서로 교탁을 내리치다가도, 못 이기는 척 5분 전에 끝내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체리 애쉬:아싸~ (엎드려 라의 표정을 살핀다.) 어때요?
라 콕스:(어쩔 수 없단 듯 웃는다.) 그래도 아직 수업 안 끝났어. 일어나서 집중해야지.
체리 애쉬:(웃음기 어린 헛기침이 들린다. 자세를 바로하고 집중하는 척 교과서에 시선을 꽂지만, 반댓 손으로는 저가 넘긴 메모지를 툭툭, 건드렸다.)
라 콕스:좋아했었어.
(샤프 끝으로 메모지 톡톡 두드리다가도, 이어 적는다.)
싫어하는 건 아냐. 그런데, 조금 지루해.
체리 애쉬:(고민하는 척.. 열심히 수업 듣는 척...) 왜요? 노래를 너무 많이 들었나…
라 콕스:그런 것 같기도…. 넌 음악을 왜 좋아하는데?
체리 애쉬:흠, 연주가 재밌어서?
라 콕스:(재미있던가? 쉽사리 답을 적지 못한다. 너와 만난 뒤부터는 계속 고민하게 돼.지겹진 않아? 결국은 반복이잖아.
체리 애쉬:전혀요, 음악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선생님이 수업을 마치면, 행복하게 웃으며 자리에 엎드린다.) 다음 수업 전에 깨워줘요, 알겠죠? (그리곤 네 옷깃을 살살 흔든다.)
라 콕스:(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곱씹는 찰나 수업이 끝난 모양이었다. 집중하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은 것은 자신인데,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것 또한 자신인 듯했다. 책상 위로 늘어진 붉은 머리카락에 시선을 두었다. 기어이 그 끝자락을 잡아 문질러 보기도 했다.)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자 둬.
체리 애쉬:(손을 놓은 그는, 잘자요~ 라고, 말하는 듯한 입모양으로 눈을 감았다.)
학교가 끝나고, 두 사람은 함께 하교합니다. 해 지는 속도가 느린 여름인지라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는 있음에도 쨍한 햇빛이 어깨를 데웁니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로 배경을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연기처럼 자리합니다.
체리 애쉬:맞다, 저녁 먹고 갈 수 있어요? 많이 돌아다닐텐데 배고프잖아요.
라 콕스:시간이라면 많아. 그런데, 들를 곳이 어디길래?
체리 애쉬:서점요! 선생님이 숙제 내주셨잖아요~ 우리 집엔 시간여행.. 그런 책은 없거든요! 그런데 놀러 나와서 공부부터 하긴 싫으니까~ 다른 데도 좀 들리자구요. 어때요?
라 콕스:(물끄러미… 보다가 툭 묻는다.) 체리, 교제 중인 사람은 없는 거지?
체리 애쉬:으응? 그건 왜요?
라 콕스:오해받을 만한 상황이겠다 싶어서….
체리 애쉬:네에? 아하하! 라도 그런 생각 해요? 괜찮아요~ 연애는 초등학생 때 이후로 안해봤으니까!
:한참 걸어 이동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근처에 위치한 상가 거리에 들어섭니다.
상가 거리는 이 근방에서 가장 훌륭한 발전이 이루어진 곳으로 특히 인근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습니다.
몇 달 전에 비해 돌아다니는 유동객의 수는 눈에 띌 만큼 줄었지만, 그런대로 여전히 붐비는 장소네요.
사거리에 접어들자 때마침 초록불이 점등합니다. 간만에 나온 거리의 풍경이지만 무언가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부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흐릿하나마 기억을 되살려 근처 상점가별 위치를 도식화시켜봅니다. 왼쪽 인도로 접어들면 뭐가 있더라….
라 콕스:(서점 먼저 둘러보자고 했다간 원망 어린 눈초리를 받을 것만 같다….) 바로 밥을 먹기엔 시간이 이르니까, 백화점 먼저 들르자.
체리 애쉬:좋아요! 옷 구경 해볼래요? 윈도우쇼핑, 좋아해요?
라 콕스:좋아하는 편이지. (옷 외의 것들은 말이야…. 뒷말은 삼켜 낸다. 그렇다. 라는 치장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체리 애쉬에게는 관심을 두었으니, 이마저도 즐거울 것.) 넌…. 왠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아. 좋아하지?
체리 애쉬:구경 자체도 좋지만~ 골라주면서 이것저것 이야기 하는 게 가장 재밌죠! 가요, 남성 의류는 3층인가 봐요!
라 콕스:(느릿느릿 뒤쫓는다. 3층으로 향했다.)
:상가의 중심지와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는 백화점. 회전문을 타고 들어서면 차가운 에어컨 냉기가 텁텁한 여름의 열기에 젖어있던 옷감과 피부를 감쌉니다.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오르면, 의류와 신발, 악세사리를 판매하는 매장이 즐비해있습니다.
체리 애쉬:라, 세상에는 우정 팔찌와 시밀러 룩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아요? 흠, 당장 맞추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요. 우리는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물론 오래 지낸 것 같은 친밀함과, 정이 있지만. 라는 부담스러울 수 있을테니까. 나는 이해해요! 암요, 나는 우리가 정말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만서도! 그래서는 안되는 거겠죠!
라 콕스:(이거, 굉장히…….) ……맞추고 싶어?
체리 애쉬:…맞춰 줄 거예요?!
라 콕스:네가 바란다면.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체리 애쉬:내가 바라는 것 말고요~! 라는 어때요?
라 콕스:네가 바라는 게 곧 내가 바라는 일이라는 소리야. 싫었다면 널 따라오지도 않았을걸. (그러고 보면, 방과 후에 동급생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간만이다 싶다. 아니, 어쩌면 처음일지도…. 그야, 사람을 만나는 만큼 자신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지 않나. 그만큼 책을 읽는 것도, 바둑을 두는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체리 애쉬:정말이죠~? 내가 지켜보기에 라는, 엄청 이타적인 것 같아요. 자기 의견은 묻지 않으면 잘 얘기해주지 않거든요, 알고 있었어요? 지금도 좋다고 대답한 것 같지만~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라고한 거나 다름없잖아요? (걸음을 멈추어 진열 된 옷을 뒤적였다. 옷걸이를 들어올리는가 싶더니 네 목 아래에 대어보인다. 얇은 재질로 되어있는 하얀색의 여름셔츠.) 그러니~ 물어보는 건 내가 할게요! 마음에 들어요?
라 콕스:하지만…. 좋은 걸 좋다고 했을 뿐인데. (사소한 반론. 입속말은 금세 사라졌다. 제 목 아래에 셔츠가 대어졌던 탓.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급히 덧붙인다. 흡사 변명을 늘어놓는 모양새. 아무래도 당신의 말을 신경 쓰는 것 같다.) 셔츠 종류는 평소에도 좋아하던 거야. 즐겨 입는 거기도 하고. 넌 어떤데? 네가 입을 거기도 하니까, 네 취향도 고려해야지.
체리 애쉬:(네 대답에 기분 좋게 웃는다.) 글쎄요~ 나는 셔츠보다 티가 더 좋긴 해요. 움직이기도 편하고~ 걸리는 것도 별로 없고. 그래도 이왕 맞춰입는 건데 예쁜 게 좋잖아요! (고민하는 듯 길게 늘어지는 비음, 그의 손길에 옷걸이는 부드럽게 걸이 위를 미끄러진다.) 블라우스가 더 좋을까? 라한테도 잘 어울릴 것 같구요. 아! 외투도 좋겠어요! 아~ 어쩌지! 보통 뭘 사야 잘 맞췄다고 소문이 나죠?!
라 콕스:글쎄…. (모든 게 처음이었으니 알 턱 없다. 친밀한 사이의 친구들은 누구나 이런 과정을 거친단 말인가? 나는 세상을 쉽게만 살아왔던 걸까…. 따위의 생각을 하기도 했다. 보랏빛 눈이 분주하게도 움직이며 옷들을 훑는다. 고민 끝에 집어 든 것은 얇은 재질의 베이지색 가디건이었다. 여름날, 갑자기 서늘해진 밤에 걸치면 좋을 법한 것.) 네게는 이쪽이 더 어울릴 것 같기도…. (그리 말하며 분홍색을 흘긋거린다.)
체리 애쉬:(와! 크지 않은 탄성을 내지른다. 네게 어울릴 것 같다며 이것 저것 살핀 옷들을 팔 위에 대롱대롱 걸어둔 채로, 분홍빛 가디건을 집어들어 즐겁게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옷 위의 무언가를 발견하기 전까지의 이야기.) 귀엽다! 같은 디자인이네요! 분홍색 옷은 입어 본 적 없는데, 보통 살 일이 없거든요. 노란 옷은 많은데 말예요, 이거 봐요. 어때요? 잘 어울려요…오…? 가슴쪽에 체리 그림이….
라 콕스:(이런 게 있었나? 싶은 눈으로 그림을 훑는 것도 잠시, 문득 시선을 당신에게로 옮겨 낸다.) 응? 체리… 싫어해? ( 질문.)
체리 애쉬:네에?! 아뇨오, 좋아해요~?! 귀엽잖아요~?! 그런데, 음. 너무 귀여우니까. 다른 게 좋을 것 같아서. 같은 색의… 자요! 저 쪽에도 많아 보여요! (어색한 말투와 함께 순식간에 옷걸이를 내려놓은 그는 네 등을 살살 밀어나가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라 콕스:(싫어하는군….) 체리, 취향이 아닌 건 그렇다고 말해도 돼. 내게 다 맞춰주려고 할 필요는 없어. (순순히 밀리며… 그리 말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머리 끈이나 팔찌, 반지 등 각종 장신구를 늘어놓은 진열대가 보인다. 우정 팔찌 얘기를 했었지. 진열된 것을 살펴보려는 찰나 팔찌보다도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홀린 듯 그 앞에서 물건을 집어 든다. 손 위로 검은 리본이 걸쳐졌다. 조금은 충동 어린 말을 뱉기도 했다.) 나도 머리 끈을 바꿔 볼까….
체리 애쉬:라…. (고마움이 어린 눈빛으로 올려다 보다, 입술을 말아물었다.) 그래두, 이왕 골라줬는데 겨우 체리그림 때문에 싫다고 하긴 싫었는 걸요. 이것도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같은 감정일까요? 라가 이해되는 것 같기두~ 하고~ (가만히 네 어깨에 턱을 얹고 허리를 끌어안은 채 쫑쫑 딸려갔다.) 좋죠! 리본 좋아해요?
라 콕스:(라 콕스는 살아오며 상대방의 말을 흘리면 흘렸지, 놓쳐본 적은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분명 이름을 불린 것 같은데, 그 뒤로 말이 이어졌던 것도 같은데. 퍼뜩 눈을 뜨니 들려오는 것은 …해요? 라는 의문형 어미뿐이다. 그래, 체리 애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예외가 되어가고 있다. 둘린 팔을 떼어내지 않는 것도 그 맥락일 터다.) …미안. 제대로 못 들었어. 다시 한번 말해줄래?
체리 애쉬:응? 체리그림 때문에 싫다고 하고싶지 않았다고 한 거? 아니면… 나도 라가 좋으면 좋은 것 같아? (떨어져나와 옆의 악세사리들을 살폈다.) 리본 좋아하나 봐요~ 그 잠깐동안 집중했잖아요. 내가 한 말도 못 듣구~
라 콕스:아…. 응, 맞아. 그러긴 했지. (리본이 아니라 닿아오는 온기에 집중한 것일 테지만.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리본을 바라보는 척, 허리에 둘린 희멀건 팔을 바라본다.) 좋아질 것 같아. 잘 묶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가르쳐줄래?
체리 애쉬:어렵지 않죠! 그런데 라는 머리색이 어두우니까… 이거! 흰 색은 어때요? 내 리본보다는 얇지만~ 헤헤, 맞추려고 한 거 맞죠?
라 콕스:(헛기침했다.) 티 났어?
체리 애쉬:아니면 민망할 뻔 했는데요~ (장난스레 웃는다.) 라는 평소에 리본을 하고다니지는 않았으니까, 어렴풋이 그렇겠거니~ 하구요.
라 콕스:……그럼 이걸로. (능청은커녕 열없는 대답을 내놓고야 만다. 검은 리본을 내려두고 흰 리본을 쥔다. 그대로 걸음을 재촉해 옆 진열대의 앞에 선다. 전시된 팔찌를 구경하는 척, 고개를 떨구었으나 아무래도 귀 끝이 붉다.)
체리 애쉬:응? 정말 그걸로 괜찮아요? (붉은 귀 끝을 마주하면, 괜히 열감이 오른다.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네 옆에 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목소리.) 아! 그러고보니, 소원팔찌라는 것 알아요?
라 콕스:네가 좋다면, 나도 좋으니까…. (읊조림에 가까운 말. 전하고자 뱉은 말이 아니었으므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들어본 적은 있어. 끊어질 때까지 차고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왜, 관심 있어?
체리 애쉬:응~ 소원에 관심이 있다기보단 예뻐서요. 무슨 소원을 빌 지는 끊어지기 전까지만 생각하면 되겠지, 그쵸? (검푸른빛, 하얀빛, 보랏빛의 끈이 균형있게 얽힌 끈 팔찌를 골라 네 앞에 보인다.) 나는~ 보라색으로 살까 봐요~
라 콕스:(참으로 이상한 하루다. 평소였다면 신도 들어주지 않는 기도를 팔찌 따위가 이루어줄 리 없다며 관심을 끊었을 것이다. 다만,) 네가 보라색을 좋아했던가? (지금의 라 콕스를 보라. 사족을 덧붙이기는커녕 제 몫의 붉은색 팔찌를 고르는 꼴이란.)
체리 애쉬:좋아하죠~ 라 눈 색이잖아요? (붉은 색 팔찌를 고르는 너를 보곤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린다) 이정도만 해도 충분히 티 나겠네요~ 그런데… 이젠 끊어지면 조금 서운할 것 같아.
라 콕스:(말을 잃는다. 무어라 대꾸하면 좋을지 떠올리지 못한 탓이다. 수도 없이 넘긴 책장이 무용할 정도로 생각나는 문장이 없다. 귀가하면 책을 좀 더 읽어봐야겠다 싶다. 앞으로 며칠간은 도서관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말까,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당신과 대화할 일 줄이고 싶진 않으니 실행에 옮기진 않을 테지만.) 그땐 다른 걸 맞추면 되지. 두 번째로 맞추는 건 끊어지지 않는 것으로 골라 보자.
체리 애쉬:얼레~ 끊어지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잖아요. 그럼 다음엔 소원팔찌 말고, 예쁜 패션팔찌로 사요! 좋죠? 어때요?
라 콕스:그래, 그때 또 구경하러 오자. (주섬주섬 고른 것들의 값을 치른다. 곱게 포장된 종이 가방을 든 채 당신을 바라보았다.) 배고프진 않고? 슬슬 식사하러 갈까.
체리 애쉬:(계산을 마치고, 점원에게서 받은 팔찌를 곧장 손목에 끼운다.) 좋아요~ 밥은 내가 살게요, 생각보다 산 게 없기도 하구… 좋아하는 식당이 있거든요!
요즘 SNS에서 핫하다는 소문의 그 맛집입니다. 막 이름이 뜨기 시작한 체인점이라는데, 듣기로는 양식을 취급한다고 하던가요?
라 콕스:
기준치:50/25/10
굴림:37
판정결과:보통 성공
:체리와 라가 도착한 시점은 때마침 마지막으로 웨이팅을 받은 팀이 들어가고 난 후로,
단 5분만 기다리면 입장이 가능하다는 직원의 안내가 이어집니다.
체리 애쉬:운이 좋았네요! 여기 원래 인기가 엄청 많거든요~
라 콕스:그래? 맛있는 곳인가 봐. 예전에도 와 본 적 있어?
체리 애쉬:그럼요! 유명하고, 맛있고, 예쁘고, 좋은 곳은 다 가봐야 해요. 재미있잖아요~
:음식점은 패밀리 레스토랑 풍으로 잔잔한 클래식이 연주되어 흘러나오고 있으며 깔끔한 화이트 톤의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구성입니다.
직원은 두 사람을 창가쪽 자리로 안내한 뒤 메뉴판을 건네주고 사라집니다. 학생들이 먹기엔 다소 부담스러워 보이지만…. 라에겐 어떤가요?
라 콕스:(평소 바깥을 나돌아다니지 않으니 돈은 차곡차곡 쌓여만 갔을 것이다…. 문제없다!)
체리 애쉬:맛있겠다! 스파게티가 새로 나왔나봐요. 처음 왔을 땐 없었던 것 같거든요! 음… 근데 카프레제도 맛있었구, 리조또도…. (끄응 앓는 소리,)뭐 먹지…?
라 콕스:네가 말한 것들 전부 하나씩 시켜보는 건? (반면 이쪽은 태평하기만 하다. 무얼 시켜도 상관이 없는 듯….) 두 사람이니 메뉴 세 개 정돈 먹을 수 있을 거야. 양이 많더라도 부족한 것보단 낫지.
체리 애쉬:하지만… 남기면 요리사분들이 슬퍼할걸요?
라 콕스:거기까진 생각해본 적이 없었네…. (이어 짧은 침묵. 메뉴판을 당신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난 가리는 게 없으니 네가 먹고 싶은 걸 먹어보자.
체리 애쉬:그럼~ 안 먹어본 걸로 시켜볼까요? 비프 샐러드랑, 양갈비. 나머지 하나는… 고민하는 우리를 위해 추천 수프~?
라 콕스:(고개 끄덕끄덕.) 음료는?
체리 애쉬:음! 콜라가 좋겠어요!
라 콕스:그래. (메뉴는 체리가 골랐으니 주문은 이쪽이 할 셈이다. 직원을 불러 골라 둔 메뉴들을 주문했다.) 예전에도 여길 왔다고 했지? 그땐 누구와 같이 온 거야?
체리 애쉬:어… 가족…이랑요? 어머니가 이 곳 랍스터를 좋아하시거든요…~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어딘가 어색한 말투…)
라 콕스:로봇처럼 말하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어?
체리 애쉬:음… 음~…! 아니에요! 누구랑 왔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서요… 그래도 좋아하는 음식점은 맞아요! 정말 맛있거든요!
라 콕스:(의아한 낯이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기대되네. 식사한 뒤엔 카페를 들러 보고 싶은데… 잘 아는 곳이 있다면 추천해줄 수 있어? 평소에 자주 다니던 곳이라든지.
체리 애쉬:카페라, 그러고보니 안쪽에 작고 조용한 카페가 있었던 것 같아요. 디저트도 귀여웠던 것 같은데, 카페 좋아해요?
라 콕스:자주 가는 편은 아니지만, 커피 향을 좋아해. 차 종류도 좋아하는 편이고. 너는 어떤데?
체리 애쉬:커피요? 학생인데두요?! 저는 음료수가 좋던데, 고구마라떼도 좋구, 스무디도, 에이드도…
라 콕스:응, 학생인데도. 술이나 담배 같은 것도 아닌데 뭘. (잘게 웃는다.) 단 걸 좋아하나 봐?
체리 애쉬:헤헤, 생각보다 그렇게 잘 먹진 않지만요. (서빙 된 메뉴를 능숙하게 배치한다.) 아! 그래도, 홍차라면 좀 먹어본 적 있어요. 홍차도 잘 알아요? 고소하고, 향이 부드럽고, 음..~ 약간 노란빛인….
라 콕스:(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아하니 한두 번 방문한 것 같진 않다. 그런 것치고는 같이 온 사람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고. 말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이어지다 뚝 끊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거…. 꼭, 질투하는 사람 같지 않나?)
(도출된 결론에 행동마저 멈추어 낸 채 의문을 품었다. 어쩌면 숨마저 멈추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자연스럽게도,) …미안. 방금 뭐라고 했지?
(당신의 말마저 흘리고야 만다. 이걸로 두 번째였다.)
체리 애쉬:응? 고소하고, 부드럽고, 노란 빛인 홍차요~? 분명 이름이 D…로 시작했던 거 같은데. 생각같은? 매웠던 것 같기도 해요. (빤히 시선을 마주하다, 네 앞에 식기구를 놓아준다.) 오늘 많이 피곤해요? 무리해서 따라온 거 아니죠…?
라 콕스:응? 그런 거 아냐. 그냥….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어서. 구경하다 보니 시선이 빼앗겼나 봐. (당신 몫의 식기구를 정돈해 놓아주었다.) 이렇게까지 챙겨 줄 필요는 없는데…. 아래로 동생이 있니?
체리 애쉬:정말이죠~? 카페에서 졸기 없기예요! (금세 미소짓는다.) 오히려 내가 막내인걸요? 그냥~ 형을 따라하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방금 저 멋있었어요?
라 콕스:(멋있었느냐니! 참 해맑고도 귀여운 질문이다. 웃음기 숨길 생각도 않고 그래, 답하니 짧은 말 사이로도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형이 있었구나. 사이가 좋나 봐. 나이 터울이 비슷한 가족과 늘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 힘들지는 않아? 겪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난 외동이라서, 가끔 만나는 친척 동생들을 제외하고는 형제라 부를 만한 아이들이 없거든.
체리 애쉬:사실 나, 늦둥이거든요. 그래서 부모님보다는 음~ 형이랑 더 오래 지냈어요. 두 분 다 많이 바빠서요. 알아요? 의사세요, 둘 다. 그래서 라가 좋은 걸지도 모르겠어, 우리 형이랑 많이 닮았거든요. 침착하구, 음. 어른스럽고. 난 그런 성격이 아니거든요. 척 보면 알겠죠? (수프를 떠서 네 앞에 놓아주곤 제 몫을 챙겼다.) 왤까요? 나두 같은 배에서 태어났는데! 진중성도 없고, 철드는 것도 너무 어려워요~ 라도 책 읽는 거 좋아하죠? 부럽다~ 멋있구…. 역시 형으로 태어나는 거랑 막내로 태어나는 건 좀 다른가?
라 콕스:그런 성격이 아닌 게 뭐 어때서. (만류해도 계속 챙겨줄 성싶으니, 결국은 바지런히 움직이는 손 바라보기만 했다. 보랏빛 시선이 끊임없이 당신을 좇는다.) 넌 체리 애쉬잖아. 네 형이나, 라 콕스가 아닌…. (습관적으로 매무새를 단장했다.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 매고, 기운 깃을 정돈하고…. 바둑이나 체스를 시작하며 생긴 버릇이었다. 다음 수를 고민할 때 보이고는 했던 행동들.)
가벼우니 주변 사람의 기분마저 띄워주고, 득실을 재기보단 행동할 수 있잖아. 책 읽는 것 대신 체육을 좋아하니 세상을 직접 뛰어볼 수도 있을 테지. 부러워하지 마. 난 네가 그런 사람이어서 좋아하는 거니까. (뱉고 보니 고백 같다. 느릿느릿 덧붙인다.) …네 형도, 분명 그럴걸.
체리 애쉬:그,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는데…. (조잘대던 말문이 닫힌다. 머리까지 차오른 열감이 감기 탓인지, 부끄럼 탓인지 알 길이 없다. 고기를 바르던 나이프가 뼈 위를 헛질하여 딱, 딱 소리와 함께 그릇에 부딪힌다. 사람은 제 모습을 볼 수 없다지만, 체리 애쉬는 제 꼴을 뻔히 짐작했다. 어리숙하고, 민망스런. 그는 레스토랑의 조명이 밝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네게서 한시도 뗀 적 없던 시선을 마침내 거두었다.)
아하하~ 그런가? 그래두, 다들 되고싶은 모습같은 건 하나씩 있잖아요. 그런거죠, 뭐. …아! 여기! 에어컨이 빵빵해서 좋네요! 따뜻한 음식이 많아서 좀 덥네, 라는요? 쨍쨍한 곳에 있다가 겨우 시원한 곳 들어왔는데, 이렇게 더운 음식 먹어도 괜찮아요? 내 콜라 나눠줄까요?
라 콕스:(타인을 담아본 적 없는 눈이 실로 처음 상대를 담아낸 셈이다. 당신의 변화 하나 눈치채지 못할 리 없으나, 구태여 그 사실을 집지는 않는다. 정확히는, 그럴 여유조차 없었을 터다.) 아니….. 괜찮아. 탄산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리고는 침묵. 어색하게 뱉어낸 문장을 이어내는 것이 못내 버겁다. 둘 사이의 침묵이 이토록 어색했던가? 오늘 아침, 당신의 연주를 들을 때만 해도 그렇진 않았던 것 같은데. 괜히 제 몫의 물을 한 모금 삼킨다.) 그러고 보니, 체리. 피아노는 어쩌다 시작하게 된 거야? 전공은…. 아니라고 했던가.
체리 애쉬:그렇구나! 기억해 둘게요! 아, 그러니까… 다음에 음료수를 사주고싶을 때, 탄산을 사주면 안되잖아요. (그리 말하곤 콜라를 제 입에 밀어넣는다. 혀를 타고 넘어가는 음료수가 무슨 맛인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목구멍을 찌르는 따끔한 감각만이 제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피아노요? 그러게요… 성당에서 들었던가. 형을 따라서 시작했었던가? 너무 오래되어서요. 둘 다 일지도 몰라요. 피아노는 앉아서도 보여줄 수 있는 활동이잖아요. 그걸로 관심을 받고싶었던 것 같아요, 물론~ 지금은 재밌어서 계속 하고있어요! 아예 직업으로 삼을 용기는 없지만요~ 대학에서까지 피아노를 한다고 했다간 부모님이… (창백히 질려 고개를 털었다. 잡념을 떨치려는 듯이,) 아무튼요! 라는요? 왜 피아노를 시작했었어요?
라 콕스:(상대의 표정 세심히 살핀 것치고는 의문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부모님이 엄하신가 보군… 정도의 추측만을 했다. 이것저것 캐물을 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아직은 말이다.) 혼자 집중할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하거든. 집에 있는 책을 다 읽었을 즈음 거실에 놓인 피아노가 눈에 들어오더라. 꽤 재미있었어. 연습할 때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좋았고. 그런데…. (왜 지루해졌을까? 근본적인 의문을 떠올릴 즈음에는 입을 다문다. 자신 또한 원인을 정의하지 못했던 탓이다.)
체리 애쉬:그렇죠, 피아노는 보통 혼자 하는 취미잖아요~ 나, 언제는 피아노를 칠 줄 안다고 했다가 친구들이 의심을 하는 거예요! 뭐, 늘 이곳 저곳 돌아다니긴 하니까, 그렇겠다 싶지만~ 그렇구나, 그래서 책도 좋아했구나… 거실에 피아노가 있어요? 라의 부모님도 피아노를 치셨어? (끊어지는 문장, 네 다물린 입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그런데~?
라 콕스:(그럴 만도 하지. 활발한 이미지잖아. …응? 난 의심 안 했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원래는 거실에 있었지만, 지금은 내 방으로 옮겨두었지. 먼지깨나 쌓였을걸. 질문 하나하나 나긋나긋 답하는 것을 보아 이 흐름이 싫지는 않은 것 같다. 기실 타인과의 대화를 그렇구나. 알겠어. 그래, 고마워. 쯤으로 잘라버리곤 했던 라 콕스치고는 답지 않은 태도이긴 했다. 오고 가는 말의 소재보다는 단순히 화자가 당신이기에 기꺼워 보이는 것이겠지.)
어느 순간부터 지루해졌어. 왜 그렇게 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관객이 생기는 게 싫었던 걸까…. (확신 없는 투. 어깨 으쓱하고 만다.)
체리 애쉬:정말요? 잘 어울려요? (활짝 웃지는 않았어도 퍽 기분 좋은 모양새였다. 샐러드를 양껏 오물거리는 입가가 만족스럽다.) 그럼… 라는 늘 혼자 치고, 혼자 들은 거예요? (너무 아까워. 다른 사람의 곡이라고 하더라도 연주하는 순간만큼은 자신의 음악일텐데. 못 다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체리 애쉬는 탄식했다. 검지 손가락을 타고, 붉게 내려 온 옆머리가 미끄러진다. 짧은 고민 끝에 그는 더듬거리며 입술을 떼었다.) 나, 나는 라랑 같이 피아노를 치고 싶었는데….
라 콕스:그렇지…. (이후 침묵. 너무 사교성 없어 보이나…. 하지만 라 콕스는 사람과 마주하는 것이 싫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귀찮았다. 타고 나길 그랬으니 이제 와 꾸며내기에도 멋쩍지 않은가. 당신의 고민과는 달리 참으로 가벼운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으니, 내어놓는 대답 또한 무겁지 않다.) 왜? 연주하고 싶은 연탄곡이라도 있는 거야?
체리 애쉬:그렇다기 보단~ 음~… 피아노는요, 다들 금방 그만두잖아요. 어릴 때야 다들 교양을 쌓는다고 쉽게들 시작한다지만, 고등학교에 올라와서까지 정을 붙이고 이어가는 사람은 잘 없으니까… 하지만~! 라는 최근까지 피아노를 쳤잖아요! 네에? 왜요~?! 서운해요. 단순히 어려워서, 힘들어서면 함께 극복할 수 있을텐데. 지루해진 거였다니, 나는 이제 어떠케 햐야…… ……음?! (적잖이 아쉬운 티를 내며 입 안에 고기를 밀어넣은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들을 꼭꼭 씹어 삼켰다. 음료를 들이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요, 라가 피아노를 치던 때에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뭐예요?
라 콕스:(잘 먹으니 보기 좋네. 덩달아 포크를 움직인다. 덜어낸 샐러드를 깨작깨작 먹으며 답한다. 충분한 고민을 거쳤으니 적지 않은 침묵이 흘렀을 테지만, 두 사람 간의 침묵은 더는 어색지 않다.) 글쎄…. 처음으로 하나의 곡을 완성했을 때? 완성이라고 표현하는 건 좀 거창하긴 하네…. 마음에 드는 연주를 했을 때로 정정해 볼까.
(생각에 잠긴 양 시선이 허공을 배회한다. 드물게도 당신과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래…. 작은 별 변주곡이었을 거야. 어릴 땐 유독 그걸 많이 연주했었거든. (그리고 툭, 묻는다.) 연주할 줄 알아? 그 곡.
체리 애쉬:(음, 음, 음. 대답하듯 짧은 비음을 내뱉는다. 짧게 동요의 가사를 붙여 흥얼거리다가도, 의아한 듯 묻는다. 그야, 작은 별 변주곡은 다른 클래식들에 비해 난이도가 높은 곡이 아니기도 했고, 보통 사람이라면 더 어렵고 화려한 곡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업신 여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공자에게 묻기엔 독특한 질문이지 않은가.)
작은 별 변주곡은, 네에. 아마도. 피아노가 익숙해 졌을 때 즈음 연주해봤던 것 같아. Twinkle Twinkle Little Star~ 유명하잖아요! 음~… 그런데, 왜 그 곡이었어요? 각별한 이유라도 있었어요?
라 콕스:포핸즈로 편곡된 버전을 들은 적이 있었거든. (어디에서 그 연주를 들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라디오인지, TV인지, 거리의 음악 소리였는지, 혹은 날아든 나비를 따라 걸음 옮겼더니 담장 너머에서부터 들려오던 소리였는지…. 그 후로 홀린 이마냥 악보를 찾았던 기억만이 남아 있다. 타인과 함께 피아노 앞에 앉을 일 없으니 연탄곡을 익혀 봐야 제대로 된 연주가 될 리 없다. 그런데도 고집스레 원곡이 아닌 악보를 익혀두었던 연유는….)
집에 악보가 있을 거야. 너만 괜찮다면 같이 연주해 줄래? (……당신을 위해서였나? 알 수 없다.)
체리 애쉬:가지고 있어요? 그럼 이미… (누군가와 연주해 본 것 아니냐. 체리 애쉬는 물으려했지만, 아마 네 부모님과 함께했으리라 멋대로 추측한다. 늘어지는 문장을 끊어내면, 웃음기 어린 입꼬리만 남아있다. 눈 깜짝할 새에 차려진 음식을 비워낸 그는 조용히 식기구를 내려놓는다.) 좋아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요! 음~ 이왕 이렇게 된 거, 라의 집에도 초대해 주면 좋구. 굳이 학교에 가져올 필요 없잖아요! (그저 새로 사귄 친구의 집에 놀러가고 싶은 것 뿐이었지만. 네가 알더라도 상관 없다는 듯이.)
라 콕스: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집에 있는 피아노는 조율이 망가져 있을 거야. 연주할 만한 상태는 아닐 테니까…. 악보는 학교로 가져갈게. (이대로 말을 맺었다면 눈치 없는 사람이 되었겠지. 그렇기에 느릿느릿 덧붙이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건 다른 이유를 생각해 줘. 단순히 날 보러 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자신 또한 식기를 내려놓는다. 소리 나지 않게 의자를 밀고 일어난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아직 둘러보고 싶은 곳이 많거든.
체리 애쉬:오래 봐주지 않았나 봐요…? 아쉽다~ 라가 피아노를 시작하기 전 부터 집에 있었던 거라면 나이가 꽤 있을텐데. 오래된 피아노는 치는 것 만으로도 뭔가… 뭔가… 그… 있잖아요. 알죠?! 그런 느낌! 몽글몽글하고, 추억이 있었던 것 같은…. 그럼요, 피아노도 구경하구. 라도 보러 갈래요. 선물은 뭐가 좋아요? (짧은 웃음소리.) 어라… 더 먹지 않아도 돼요?
라 콕스:(고개 젓는다. 선물도, 음식도 전부 거절하는 셈이다.) 이 정도면 충분해. 다음엔 영화관을 둘러볼까 하는데, 괜찮은 게 있다면 같이 보고 싶어서. 나중에 서점에 들러야 할 걸 생각하면 이쯤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거든.
체리 애쉬:(고개를 끄덕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두요~ 선물은 주는 재미가 있단 말예요. 이런 때 아니면 특별히 줄 기회도 없는데. 날이 좋아서 사왔다고 하는 건 좀 이상하잖아요~? 조금은 생각해 줘요!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뛰어간 그는,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치곤 돌아온다.) 영화관? 보고싶은 게 있는 건 아니구?
라 콕스:(라 콕스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느린 행동거지가 이럴 때만큼은 방해가 되는구나.) 얻어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다음 일정들은 내가 사게 해 줘.
(그 다음 말이 이어지기까지는 시간깨나 들었는데, 라 콕스는 신간 도서는 빠삭하게 꿰고 있을지언정 현재 상영 중인 영화는 전혀, 하나도! 아는 것이 없는 인물이었던 탓이다. 결국은 순순히 시인한다.) 확인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 넌?
:영화관은 대형 상가건물 5층에 입점해 있습니다. 인테리어 리뉴얼이 진행되며 한동안 영업을 하지 않던 곳인데 때마침 저번 주에 정상 개관되었다고 합니다.
엘리베이터는 공사중이기 때문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동해야겠네요.
네온 조명이 은은하게 유리바닥을 적시는 5층에 발을 디디면 가장 먼저 달콤하고 짭쪼름한 팝콘 냄새가 풍깁니다.
체리 애쉬:글쎄요~ 방학 땐 집에선 조금 봤던 기억이 있는데, 지난 주에 다시 개관되었다고 하니까... 흠~ 뭐가 나왔으려나~ 다 보고 나오면 밤일테니까, 공포영화 빼구... 공포영화 빼구... (상영표 앞으로 쪼르르 뛰어가 확인했다)
:상영표를 확인하면… 여름 특집 테마의 납량 괴담 공포물과 로맨스 코미디,
평론가의 리뷰가 후하다는 액션 영화나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SF풍 판타지 영화도 눈에 띄네요.
동심이 필요한 어른들을 겨냥한 3D 애니메이션 영화 포스터도 붙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카운터 직원에게 문의하거나 자동 발권 기계를 이용해 티켓을 발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 콕스:(공포영화는 빼고…. 자연스럽게 한 개의 영화를 뛰어넘고 나머지를 살핀다.) 액션 영화보다는 SF영화가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체리 애쉬:좋아요! (그리곤 문득, 네게로 시선을 옮기는 것이다. SF라고?) 그런데, SF는 보통 내용이 어렵지 않아요? 라는 책을 많이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게 많은가?
라 콕스:음…. 꼭 그런 건 아니야. 읽어내지 못하는 것들도 많고.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의 포스터를 훑어내린다.) 이걸 보면 숙제를 써내는 게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액션 영화는 대체로 시끄럽잖아. 그런 건 좀 피로하더라. (이런 말이나 덧붙인다.)
체리 애쉬:진짜? 뭔가 라는 말이죠~ 전부 알아들을 것 같은 분위기가 있거든요! 아침에도 이런 비슷한 것 물어보지 않았던가? 공부를 잘하느냐구.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안경을 쓴 사람은 머리가 좋아보인다! 그런 이미지가 있잖아요! …라고 물어도, 라가 대답하긴 부끄러우려나? (옆에 진열 되어 있는 영화의 템플릿을 뽑아 네 손에 하나 쥐여준다.) 헤헤, 그렇긴 하죠~ 액션영화는 깨지고 부숴지는 게 많으니까! 그럼… 여기! 로맨스 영화도 있는데, 이건 관심 없어요? 별로 안 좋아해?
라 콕스:(순순히 받아 든다. 함께 보자는 듯 거리 좁혀 내며 손에 쥔 것 당신 쪽으로 기울이기도 했다.) 싫어하는 건 아닌데, 찾아서 본 적은 없는 것 같네. 로맨스는 영상보다는 글로 접하는 걸 더 좋아하거든. 너는 어떤데? 로맨스 영화. 좋아해?
체리 애쉬:좋아하죠! 뭐… 친구끼리 보게 된다면 조금 부끄럽겠지만. 사실 귀신이 나오는 영화를 빼면 싫어하는 건 별로 없어요. 그래서 말야, 내가 여태 잘~ 생각해 봤는데! 미지의 존재도 좋지만~ 음~ 사람얘기가 더 재밌는 것 같아요. 친근감이 있다고 할까? (템플릿을 천천히 훑어내리다 시간여행. 네 글자 위에 손 끝이 멈춘다.) 라는 시간여행을 한다면 어느 때로 가고싶어요? 미래나 과거… 다들 바라는 시점이 다르잖아요.
라 콕스:(역시 귀신은 싫어하는구나.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눈을 굴린다. 손끝 따라 시선 움직였으니, 멈춘 곳 또한 같다.) 글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짧은 간극. 성실히 고민한 뒤에야 답을 내어놓는다.)
여행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나? 미래로 떠나는 건 달갑지 않아. 나 이외의 사람들만이 늙어버린 세계에 떨어지는 거잖아. 그렇다고 과거로 떠나기엔…. 바꾸고 싶은 인생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큰 사건 없이 평범하게 살아왔거든. 지금에 만족해. (글자를 훑던 눈이 당신을 바라본다. 말 잇지 않고 기다리는 모양새. 꼭 당신의 의견을 묻는 것만 같다.)
체리 애쉬:엇… (멀뚱히 두 눈만 깜빡였다.) 아뇨! 라의 여행이니까, 내가 반대할 것도 없지! 그렇게 들으니까 떠나지 않는 것도 좋네. 과거로 간다 해도 아직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거구, 미래로 간다 해도 나만 늙어있을 수도 있을테니까. 흠. 그런데 보통 이런 걸 물어보면 둘 중 하나로 대답해주거든요. 그렇구나아…~ 라는 지금으로도 좋은 거구나….
(두어번 끄덕인 고개, 이어서 늘어지는 비음과 함께 영화관의 자그마한 노랫소리에 맞추어 좌우로 흔들린다.) 으으으으음, 나는요… 미래로 가고싶은 것 같아요. 과거엔 교회를 당당하게 다니지 못했거든요.
완전히 성인이 된 나는 뭘 하고 있을까, 이 전염병은 어떻게 끝이 났을까, 좋아하는 가수는 어떤 노래를 냈을지, 친구들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그리고 난, 그 때의 라도 궁금해. 미래는 수많은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결해 줄 답을 가지고 있잖아요.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다면 참 즐거울 거야.
…여기까지! 영화표, 끊으러 갈까요?
라 콕스:나는 너와 현재를 살고 있으니 우리의 미래를 알지는 못하지만…. 너는 분명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었을 것 같아. (그건 피아노가 될 수도 있겠고, 자유롭게 교회를 다니는 것일 수도 있겠고…. 혹은 성직자가 되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없다면, 그것을 빙 둘러 걸어서라도 지나칠 것만 같다. 그것이 라 콕스가 생각하는 체리 애쉬였다. 어디로 향할까 궁금해 눈길을 둘 수밖에 없는 사람.)
나는….
의지 Roll
기준치:100/50/20
굴림:80
판정결과:보통 성공
피아노를 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어때, 조금은 엿본 것 같니? (바람처럼 웃었다. 웃음기 어린 말과 함께 걸음 내디딘다. 이번에는 늦지 않았다. 두 사람 몫의 영화표를 끊어 그중 하나를 내민다.)
체리 애쉬: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을 거라구? (한 번, 시선은 멀찍이 날아간다.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 풀어진 눈썹. 장난스레 되묻는 그는 요란한 반응 대신 기쁜 미소를 지었다.)
좋네요… 피아노! 그 때엔 우리, 이미 몇 번이고 연탄곡을 완성했을지도 몰라. 라가 다시 피아노를 쳐줬으면 했던 건 나니까, 미래에서도 계~속 지켜볼게요. 어때요, 괜찮아요?
응? …에구? (영화표와 너를 번갈아 보았다. 이어 내밀어오는 영화표를 조심스레 손에 쥐어서는.) 난… 같이 가고싶었는데~! 식당의 일 때문에 그래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니까!
라 콕스:(고개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미래를 확신하고 약속하는 이치고는 성의 없어 보일 만한 행동이었으나, 보랏빛 시선만큼은 당신을 담아내지 않은 적 없었으니 눈치 빠른 이라면 감정의 깊이를 짐작할 만도 하다.) 그것 때문만은 아냐. 그냥… 해주고 싶어서 그랬지. 너도 그래서 혼자 계산하고 온 거 아니었나.
체리 애쉬:혹시나 마음 쓰고 있을까 봐. (아니라면 되었어요, 덧붙이는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그리고 엄청 빨리 예매하고 왔잖아요. 나, 라가 그렇게 빨리 움직인 거 처음 봤어….
라 콕스:(침묵한다. 나도 이렇게 빨리 움직인 게 처음인걸.) ……노력해 봤어. (이런 대답이나 한다….) 팝콘은? 먹고 싶다면 사서 들어가자.
체리 애쉬:…노력까지요?! (자리에서 이동해 카운터 앞에 섰다.) 좋아~ 난 핫도그도 먹고싶어요. 음료수는? 뭘로 마실까요?
라 콕스:(메뉴를 꼼꼼히 훑는다. 기실 이런 곳에는 탄산 없는 음료가 드무니 선택지도 몇 없긴 하다마는.) 오렌지 주스로 할게. 너는?
체리 애쉬:음, 그럼 나도 오렌지 주스로 할래요. 탄산은 아까 음식점에서 마셨으니까! 무슨 팝콘이 좋아요? 보자, 여기는 종류가 많네요! 버터, 솔티드, 캬라멜, 치즈, 갈릭, 콘소메, 허니버터… 초, 초콜릿? 간장치킨…?
라 콕스:(많다.) 캬라멜이 제일 무난한 것 같은데. 단 게 끌리지 않는다면 버터로 하자. 어때?
체리 애쉬:둘 다 좋은데요~ 흠, 흐음…. 코카콜라 맛있다.. 아니 오렌지 주스.... (딩동댕동, '버터' 위에 손가락이 멈춘다.) 버터로 해요~! 여기, 버터 팝콘이랑 핫도그 하나, 아! 소스는 머스타드로 뿌려주시구요. 케챱도 줄 수 있나요? 음료수는 오렌지주스로 두 잔요! 그리고~ 아! 큰 걸로 주세요! (그리곤 돌아본다. 맞죠?)
라 콕스:(체리 애쉬는 핫도그에 머스타드와 케첩을 뿌려 먹는다…. 기억할 것. 느릿느릿 고개 주억인다.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가 제 카드를 내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에도 꽤 민첩했을 것이다.) 상영관은 2관이네. 주문한 게 나오는 대로 이동하는 게 좋겠어.
체리 애쉬:(내밀어지는 카드를 결제가 끝날 때 까지 멍청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가,) 앗, 또?! 그럼요, 음식이 나올 때 까지… 저기! 스티커 사진이라도 찍을래요? 모처럼 놀러왔으니까. 남기면 좋잖아요~?
라 콕스:스티커 사진? (가리키는 방향 바라보니 기기가 보인다. 이런 걸 찍게 될 줄은 몰랐는데. 거부감은 들지 않았으니 이번 또한 고개를 주억이기만 한다. 선뜻 걸음 옮겨 마련된 부스 안으로 들어선다. 나란히 걸을 수 있게끔 상대를 기다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이런 건 처음 찍어 봐.
체리 애쉬:앗, 진짜요? (어느새 계산을 마치고 기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여기! 화면에서 수를 셀 건데, 땡~ 하기 전까지 포즈를 취하면 되는 거예요! 뭐가 좋을까? 브이, 하트, 윙크~ 이런 거~?
라 콕스:(뚝딱대기 시작한다. 브이? 하트? 윙크? 라 콕스에게 사진은 가족사진이나 졸업사진, 증명사진이 전부였으며 셋 다 부동자세로 입꼬리만 끌어올리면 되는 부류였다. 낯?선 활동에 거리감을 느낀 모양새.) 미안…. 이런 건 잘 몰라서. 어떻게 찍으면 잘 나오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따라 해볼게.
체리 애쉬:잘… 나오는 거? (충격받은 MZ의 표정...) 글…쎄요! 재밌게 나오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닐까? 그럼, 이렇게 브이~ 해 볼래요?
라 콕스:(이쪽도 분명 MZ가 맞을 텐데. 이상하다. 얌전히 따라 해보며….) 이렇게?
체리 애쉬:좋아요! 이제 카메라를 보면 돼요~ (하나, 둘, 셋. 기계에서 목소리가 나오면 '넷'을 세기 전에 네 옆에 붙는다. 찰칵! 플래시가 반짝이면, 쉴 틈 주지 않고 기계는 다시 수를 세었다. 그리고 다시 하나, 둘, 셋. 또 한 번 더….) …끝났다! 어땠어요? 기대된다~ 어떻게 나왔을까~ (화면 앞으로 나선 그는 펜으로 액정을 두드렸다.)
라 콕스:
기준치:50/25/10
굴림:93
판정결과:실패
체리 애쉬:
기준치:80/40/16
굴림:36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푸핫..
라 콕스:(굉장히 어색하고 딱딱하게 나왔나 보다. 침착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며….)
네가 즐거웠다면 그걸로 됐어…….
체리 애쉬:응! 무지 맘에 들어요~! 아하하! 보여요? 라, 엄청 흔들렸어요… 여긴 눈도 감고 있구. 무슨 일이에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
라 콕스:(조금 멋쩍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인데, 한 사람만 이렇게 흔들리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재능이겠다 싶다.) 긴장했나 봐. 다른 사람과 단둘이 이런 사진을 찍는 건 처음이거든. 넌 익숙해 보이네.
체리 애쉬:(물끄러미...) 조금요~? 사진 찍는 건 재밌잖아요! 시간이 지나서 다시 발견하게 되면 추억할 수도 있구. 행복 리필이라구 할까~ 그런 거죠. (네게 펜을 내밀었다.) 라도 사진 위에 그림 그려볼래요?
라 콕스:(흔쾌히 받아 든다. 그림 대신 오늘의 날짜를 써넣었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이렇게 해두면 의미가 깊어질 것 같아서. 몇 년이 흐른 뒤에 다시 보게 된다면 꽤 웃기겠는걸. (다시금 펜을 내민다.) 넌? 더 안 그려도 돼?
체리 애쉬:(눈썹이 기울었다.) 감동이야…. 그러게, 날짜도 좋네요. 나는 그런 의미있는 건 떠오르지 않… (펜을 받아 든 그는 두 사람의 얼굴 위에 동물귀와 수염을 그렸다.) …지만 귀엽죠?
라 콕스:(요즘은 이런 게 유행인가? 따위의 생각이나 했다.) 그렇네. 잘 어울려. (자신은 모르겠고… 체리 애쉬의 머리 위에 그려진 귀나, 뺨 위에 그려진 수염은 확실히 귀여웠으므로 순순히 수긍한다. 문득 밖을 바라보더니,) 우리가 주문한 게 나온 것 같은데. 슬슬 출력하고 나가자.
체리 애쉬:그렇죠~? (그가 그리던 것을 마치면, 세 장면 묶음의 한 장짜리 사진이 출력되어 떨어진다. 레이저의 열기를 털어낸 그는 퍽 만족스런 표정을 하였으나,) 한 장 밖에 안 나오네요~ 어쩐지 싸더라니! 그래도 재밌었어. 다음에 또 와요! 어때요? (네 뒤를 따라 음식들과 빨대, 냅킨을 챙긴다.) 사진, 내가 가져도 돼요?
라 콕스:응? 상관은 없지만. (양손 가득 간식거리를 들고선 다시금 티켓을 확인했다. 이어 느릿느릿 걸음 옮긴다. 이쪽이야, 덧붙이기도 했다. 지정된 좌석에 나란히 앉아 검은 스크린을 바라볼 무렵에야 입을 연다.) 잘 보관해 줘. 사진 말이야. 몇 년이 흐른 뒤에 내게 보여주는 것도 잊지 말고.
체리 애쉬:그럴게요! 그럼 그 때까지 계속 함께겠네요, 우리는~ (입꼬리 올려 미소지은 그는 고개를 돌리곤 네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잔잔히 흐르는 광고소리 속에서…) 그런데… 그거 알아요?
라 콕스:그거?
체리 애쉬:팝콘은 영화 시작 전에 다 먹는 거래요!
라 콕스:(말없이 팝콘을 당신에게 내밀었다…)
체리 애쉬:(냐암)
라 콕스:많이 먹어. 급하게 먹진 말고. 음료수도 마시고….
체리 애쉬:앗! 뺏어먹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내 핫도그도 줄게요. 여기 여기, 아직 안 먹었어요. 아~ (내민다..)
라 콕스:괜찮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작게 한 입 베어 문다. 우물우물 꿀꺽.) 어차피 나눠 먹으려고 산 거니까, 뺏어 먹는단 생각 말고 많이 먹어.
체리 애쉬:나도요, 같이 나눠먹으면 더 맛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와작와작..) 그러고 보니, 라는 캬라멜 팝콘을 더 좋아해요?
라 콕스:(집어 가기 쉽게 팝콘 기울여준다.) 단 게 먹고 싶을 땐 주로 캬라멜을 먹지. 고소한 게 먹고 싶을 땐 버터를 먹고…. 다른 시즈닝은 좀 과하게 느껴져서. 그렇지 않나?
체리 애쉬:그렇죠~ 독특한 맛이 있으면 궁금하긴 하지만요~ 보고있으니까, 단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비록 오늘은 버터지만! (흠... 시선을 굴렸다.) 그래서 말예요, 영화 시작 전에 팝콘을 다 먹는 건 광고시간에 팝콘을 모조리 먹어버려서 그런 거래요. 확실히, 두 시간 안에 팝콘 하나는 양이 적잖아요? 라지 두 개를 산다면 두 사람 정도는 먹을 수 있을 지도 몰라.
라 콕스:일리 있는 말이네. 막상 영화가 시작되면 바스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눈치를 보느라 팝콘을 안 먹게 된다는 사람도 있다더라. 그런 걸 생각하면 광고 중에 통을 비워버리는 게 제일이긴 하겠어. (라지 두 개는 좀 많지 않나 싶긴 한데…. 나지막이 덧붙인다.)
체리 애쉬:진짜요? 처음 들어봐요! 팝콘 소리를 신경쓰기도 하는구나… 하지만 그렇게 먹는 사람은 체하지 않을까요? (곰곰..) 그럼 라는요? 어떤 편이에요?
라 콕스:난 영화가 끝난 뒤에 남은 팝콘을 버리고 가는 쪽이지. (팝콘 하나를 집어 당신의 입 앞에 대어 준다.) 군것질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거든.
체리 애쉬:(얌전히 받아먹었다.. 같이 우물우물 꿀꺽.) 하지만… 아쉽지 않아요? 영화하는 내내 함께했는데, 먹히지 못하고 끝난다면 팝콘은….
라 콕스:거기까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짧은 침묵. 왠지 모를 데쟈뷰를 느낀다. 레스토랑에서도 이런 말을 했었던 것 같아.) 체리… 공감을 잘해준다는 말, 자주 듣는 편이지?
체리 애쉬:…응? 그렇게 자주는… 왜, 왜요? 뭔가 이상했어요?
라 콕스:아니, 그런 건 아니고. 왠지 그럴 것 같아서 물어봤어.
체리 애쉬:그으래요? (물끄러미...) …
….
…하지만 팝콘에게 공감해준다는 건 좀 웃긴 일 아니에요…?!
라 콕스:그럴 수도 있지. 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다시금 팝콘 하나 집어 입가에 대어주며….) 슬슬 영화도 시작하려나 봐. 그전에 다 먹어야지.
체리 애쉬:(또 받아먹는다..) …라도 먹어요. (마지막 남은 팝콘을 두 개 집어 네 입에 대어주었다)
라 콕스:(순순히 받아 먹는다.)
:두 사람이 팝콘을 모두 비우면, 잠시 뒤 조명이 암전되고… 스크린 위로 영화의 제작사들이 지나갑니다.
쿵, 쿵. 울리는 영화관의 커다란 스피커 소리와 함께 영화가 시작되면, … ….
…어느 순간부터 체리는 잠들었습니다. 어려운 내용이니까요.
라는 영화의 내용을 이해했을까요?
라 콕스:
교육
기준치:60/30/12
굴림:43
판정결과:보통 성공
(그럭저럭 재밌게 본 듯하다.)
:이성 1 회복합니다.
그렇게 상영은 끝이 납니다. 관객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나고, 쿠키는 없는 것 같네요.
라 콕스:(문득 옆자리를 보더니…. 잠들었군.) 체리,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체리 애쉬:응… …으응…? 벌써 끝났어요?
라 콕스:방금 끝났어. 좀 지루했나?
체리 애쉬:(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젓는다.) 재밌었는데,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
라 콕스:피곤했나 보네. 일어날 수 있겠어? 네가 힘들다면 카페는 다음에 가자. 서점만 잠시 들러서 자료만 찾고 돌아가는 쪽이….
체리 애쉬:아냐! 모처럼 자고 일어나서 개운해요.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한 그는 길게 스트레칭을 하곤 자리에서 일어난다.) 카페에 가면 잠도 깰테니까, 같이 서점도 들러요.
라 콕스:무리하는 거 아니지?
체리 애쉬:전혀요~ 영화가 나한테 너무 어려웠나봐! 나는 못알아 들으면 졸리거든!
라 콕스:그렇다면 다행이고. 다음엔 다른 걸 봐야겠네. 갈까? (카페로 이동합니다.)
:코너 한구석에 외따로 세워져 있는 작은 카페.
건물 외벽을 장식한 벽돌 무늬와 입구의 난간 곁에 일렬로 도열된 동물 모양 피규어들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체리 애쉬:디저트도 먹을까요? 음~ 메뉴판엔 없지만, 쇼케이스엔 있는 것 같은데!
라 콕스:그럴까. 조각 케이크 같은 걸 하나 시켜서 나눠 먹는 것도 좋겠는걸. 마실 건 정했어?
체리 애쉬:음… 고구마라떼요. 따뜻하게! 무슨 케이크가 좋아요?
라 콕스:치즈 케이크는 어때? 다른 것도 괜찮고.
체리 애쉬:좋아요! (힐끔.. 상황을 살폈다가 슬그머니 또 카드를 내미는..) 진동벨, 받아왔어요! 자리 잡으러 가요.
라 콕스:(민첩하지 못했나….) 나도 내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계속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아.
체리 애쉬:응? 그럴 리가요! 잘 생각해 봐요. 영화관두 라가 내구, 팝콘도 라가 내구... 그쵸?
라 콕스:스티커 사진도 네가 냈고. (콕 덧붙인다.)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 같은 건 없고? 어차피 서점에 들러야 하니까…. 선물해주고 싶은데.
체리 애쉬:글쎄요..~ 라가 어릴 적에 즐겨읽었던 책? 이왕이면.. 유치원생 시절~?
라는 초등학생 때도 어려운 책 읽었을 것 같아….
라 콕스:어릴 적에 읽었던 책? (곰곰….) 백과사전 같은 거? 재미는 없을 텐데. (그럴싸하게 말하긴 했으나 물론 농이다. 평범하게 동화책이나 읽었을 것.)
체리 애쉬:……책은 괜찮은 것 같아요….
라 콕스:농담이야. (때마침 진동벨이 울렸다. 벨을 쥐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가 가져올 테니까 앉아 있어. (그리 말하고는 총총 걸음 옮긴다. 머지않아 음료며 디저트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돌아오더니, 소리 나지 않게끔 테이블 위로 내려놓는다. 이어 코스터며 음료를 당신의 앞으로 놓아준다.) 여기, 따뜻한 고구마 라떼.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마셔.
체리 애쉬:(그 모습을 넋 놓고 보는가 싶더라니,) 라, 나중에 카페같은 것 차릴 생각 없어요?
라 콕스:…갑자기?
체리 애쉬:왜, 카페에서 피아노도 치구요. 요즘은 독서카페라는 것도 있잖아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라 콕스: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는 건 너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여기엔 피아노가 없나?
체리 애쉬:그러게요~ (두리번...) 여긴 없나 봐요. 그래도요, 나중에 그런 카페를 열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열게 되면, 라가 직원이구, 내가 사장님….
라 콕스:내 취직도 결정된 거야? 이런….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는 건 미래 계획에 넣어두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도 수정해야 할까 봐.
체리 애쉬:그럼~ 같이 준비하면 되겠다! 무엇보다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가장 좋겠지만요~ 그치이?
라 콕스:어제까지만 해도 바둑기사가 될 생각이었는데…. (반론치고는 힘 담겨 있지 않은 느슨한 어조였다.) 동급생 한 명에게 휘둘려서 진로마저 고심하게 될 줄은 몰랐어. (한 차례 말을 멈추어 낸다. 제 몫의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넘긴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기도 했다.) 나는 그렇다 쳐도…. 너는 어때. 졸업 이후 말이야. 뭘 할 건지 생각해뒀어?
체리 애쉬:앗, 그으래두… 피아노 좋죠? (머리카락을 넘기는 네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뭘 해도 그림이 되네….) 으응? 그러게요, 진학은 관심이 없거든요. 그냥 피아노 치는 게 즐거울 뿐이지! 미래의 나도 그렇게 생각 할 걸요? 아! 그래도 유학은 가고싶네요~ 프랑스나, 일본이나…. 라는요? 가고싶은 나라 없어요?
라 콕스:(라 콕스는 무언가를 결정 내릴 땐 미래를 가늠해보고는 했다. 설령 피아노를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질려버리지 않을까? 또 손을 거둔 채 다른 일로 시선을 돌리게 되지는 않을까. 흘러가는 생각 따라 시선 또한 움직인다. 이윽고 회색과 자색이 서로를 담아내면,) 좋아졌어. 네 덕분이야. (퍽 덤덤하게 답하고야 만다. 설령 피아노가 다시 질린다 해도, 체리 애쉬가 나타나 제 손을 끌어줄 것만 같았다. 라 콕스는 고작 하루 만에 당신과 함께 선 미래를 재어보았다.)
글쎄…. 오스트리아 정도? 빈에는 한 번쯤 가보고 싶었거든. 음악의 나라니까…. (흠.) 같이 갈래? 정해진 게 없다면 말이야.
체리 애쉬:나는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그리 말하는 입가엔 숨기지 못한 미소가 푸스스 번진다.) 그럴까요? 그럼~ 공항 근처엔 뭐가 제일 맛있는 지 알아봐야겠다! 오스트리아엔 뭐가 유명했죠? (터치패드를 밀어내는 손길이 분주하다. 유학이라더니! 마치 해외여행 계획이라도 세우는 사람처럼 들떠서는 디저트를 한 입 문 채 포크를 우물거린다.) 재밌겠다… 이거 봐요, 왕성이래. 대성당도 가보고싶지 않아? 영감이 막 솟아오를 것 같구요. 이런 곳은 한 번 연주하면 건물 전체에 울리겠죠?
라 콕스:(아무래도 유학보다는 여행 계획이 된 것 같다. 다만 지적하지 않았다….) 역시, 나보다는 네가 피아니스트가 되어야 할 것 같은걸. 벌써 연주 생각을 하고 있잖아. (농.) 그것보다도…. 권유한 건 나지만, 이렇게 쉽게 허락해도 되는 건가. 프랑스나 일본에 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거긴 어쩌고?
체리 애쉬:에이, 그 연주회에 라는 없을라구요~? 흠, 그렇죠, 그런데… (물고있던 포크를 입에서 떼어내곤) 흠…. 프랑스나 일본도 좋지만, 오스트리아도 가고 싶잖아요~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나중에도 갈 수 있지만, 라랑 같이 가는 거면 둘 다 좋은 곳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구. 뭐어~ 졸업하고 나서의 얘기지만.
라 콕스:그래, 아직은 먼 이야기이긴 하다. 졸업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얘기해 보자. (단순 여행이라면 오스트리아나 프랑스, 일본을 모두 경유하는 것도 괜찮지 싶다. 의자에 몸 느슨히 기대며 말 잇는다.) 이제 서점을 들를 일만 남았네. 체리, 공부할 준비는 됐어?
체리 애쉬:공부라고 하니까 가기 싫어지는데요… …농담! 내가 가자고 했으니까~! 라는 사고 싶은 책 없어요? 요즘 문구류도 예쁜 것 많이 나오던데. 그런 건 관심 없구?
라 콕스:음. (예상치 못한 질문을 들어버린 낯. 정말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네가 좋아한다면 그쪽도 한 번 둘러볼까. 책이야 느긋하게 고르면 되니까.
체리 애쉬:아냐~! 라는 필사도 좋아할 것 같아서 물어본 거니까! 관심 없으면 됐어요. 다 먹었으면~ 슬슬 일어날까요?
라 콕스:(고개 끄덕인다. 빈 잔이며 접시를 트레이 위로 옮겨 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뒷정리를 마친 뒤에 카페를 나섰다. 서점으로 이동합니다.)
:서점의 자동문 너머로 들어서니 새 책들이 모이고 고여 있는 장소 특유의 결좋은 나무 냄새와 약간의 곰팡내 섞인 에어컨 냄새가 느껴집니다.
이동하는 동안 햇빛에 푹 절어 있던 몸이 조금은 되살아 나는 기분이네요.
체리는 무더위에 지친 기색을 하고서 서점에 들어서더니 악보집 코너 내지는 문제집 코너 근처를 서성입니다.
미리 찾아두었던 책이 있는지 검색대를 이용하는가 하면, 비슷한 출판사의 책 두어 권을 뽑아 펼쳐보기도 하며 개인적인 시간을 가집니다.
그렇게 라가 다른 책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을 때 쯤…
체리는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 보이지 않습니다.
:워낙 이리저리 잘 돌아다니는 성격이라 하지만, 그새 어디로 갔단 말인가요?
마치 운동장처럼 펼쳐진 서점을 휘 둘러보면 서로 다른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가지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는 출입객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그 사이엔 책 정리로 분주한 직원들 또한 섞여있고요.
어떻게 할까요?
라 콕스:(의아한 눈치로 주변을 둘러보다, 직원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실례합니다. 일행을 찾고 있어서요. 저와 같은 교복을 입은, 붉은 머리의 학생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직원은 기억을 더듬으려는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음악코너에서 보았던 것 같다며 답합니다.
라 콕스:감사합니다. (고개 꾸벅…. 곧장 음악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 [음악 코너]](#" style="text-decoration:none; color:White; line-height:1.5; background-color:#64B7FF; padding:4px;)
음악 코너에 들어서니 자연한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과거 피아노를 연주하던 시절의 라에게는 익숙한 장소일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직원이 말해준 것과 달리… 체리는 보이질 않네요. 그새 자리를 옮긴걸까요?
그렇게 음악코너를 살피던 당신은 다른 악보집이나 책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사이즈의 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누군가 잘못 꽂아두었는지 삐죽 튀어나와 있네요.
라 콕스:(튀어나온 책을 꺼내 본다.)
과학 코너에나 있을 법한 책이 뜬금없이 음악 코너에?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라 콕스:(오늘따라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와 자주 엮이는군…. 책을 챙겨 든 채 주위를 살핀다. 인파 사이에서 붉은 머리를 찾아볼 수 있을까?)
공그 (GM):체리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분명 그는 먼저 연락해주겠지요.
그리고 어쩌면… 과학책이 이렇게 황당한 곳에 꽂혀있는 이유를 생각하면, 정말 어쩌면 그의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여행 패러독스, 그 다음 페이지로 넘기면 여러가지 타임 패러독스에 관련된 내용들이 줄글 형식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라 콕스:
자료조사
기준치:60/30/12
굴림:21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할아버지 패러독스〉 와 〈타임 리프〉 에 관련된 대목을 발견합니다.
라 콕스:(휴대폰을 꺼내 무음 모드를 해제한 뒤 다시금 책을 팔랑팔랑 넘겨 본다. 이외에 읽어볼 만한 글이 있을까?)
:외에는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없네요. 이쯤에서 다른 직원에게 체리의 행방을 물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라 콕스:(다시 주변의 직원을 붙잡았다.) 실례합니다…. (이하 체리의 외관과 상황 설명.)
:직원은 이번에도 떠올리는 듯 싶더니, 문제집 코너 쪽에서 보았다는 답을 합니다.
라 콕스:감사합니다. (재차 인사를 건넨 뒤 문제집 코너로 이동합니다.)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새 문제집을 보러 온 학생들이 각 책장마다 두셋 즐비합니다.
과목별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어디를 살펴도 체리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네요.
문제집 코너를 살피던 당신은 빽빽이 꽂혀있는 문제집들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게으른 누군가 구매를 재고하며 아무렇게나 꽂아놓은 책일지도 모르죠.
라 콕스:(역시나 삐죽 튀어나와 있는 책을 꺼내 펼쳐 본다.)
음악 코너에나 있을 법한 책이 뜬금없이 문제집 코너에?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라 콕스:(흠…. 페이지를 넘겨 본다. 더 읽을 만한 내용이 있을까?)
:페이지를 넘겨보지만.... 이후 더 눈에띄는 글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체리로 추정되는 이 사람은, 옆코너에서 옆 코너로 옮겨가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렇다면 다음은… 과학 코너가 되겠네요.
라 콕스:(책을 챙긴 뒤 과학 코너로 이동했다.)
과학 코너에는 다른 코너에 비해 상주하고 있는 사람의 수가 적습니다.
에어컨의 냉기가 속속이 섞여든 책장 틈을 둘러보면, 마찬가지로 체리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군요.
좀처럼 구미가 당기거나 흥미로운 책을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대로 스쳐 지나가려던 라는 부자연스럽게 삐죽 튀어나온 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라 콕스:(익숙하게 책을 꺼내 책장을 넘겼다.)
:라가 살펴보면 제목은 〈전염의 역사〉… 질병학 코너에나 있을 법한 책입니다.
페이지를 넘기면 가름끈이 끼워져 있습니다.
음악, 문제집, 과학 코너를 모두 살핀 직후 누군가 라의 어깨를 두드립니다.
상대는 당연하게도… 체리네요.
책을 구매한 모양인지 악보와 문제집 몇 권을 들고 있습니다.
체리 애쉬:뭐 하고 있었어요? 흠~ 〈전염의 역사〉? 읽고 있었던 거예요?
라 콕스:응, 눈에 띄길래. (당신의 손에 들린 책을 흘긋 본다.) 다 고른 거야?
체리 애쉬:응~ 방금 막 사고 오는 길이에요! (네 품의 책들 빤히..) 라도 고른 책이 많네요~?
라 콕스:어쩌다 보니…. (전염의 역사까지 꺼내 챙긴다. 이걸로 품에 들린 책은 총 세 권이 되었다.) 계산은 못 했지만. 하고 올 테니까 조금 더 둘러보고 있을래?
체리 애쉬:(방긋 웃는다!) 아냐, 같이 가요!
라 콕스:(고개 끄덕이며 계산대로 향한다.) 네가 고른 책들도 궁금하네. 하나는 악보집인 것 같던데.
체리 애쉬:이거요? 헤헤, 악보집은 눈에 보이면 매번 사고 싶어지거든요. 계산 다 하면 같이 봐요~
라 콕스:그래. 내 것도 보여줄게. 숙제할 때 도움이 될 것 같더라. (빈말은 아니었는지, 금세 계산을 마친 뒤 돌아와 당신에게 책을 내밀었다. 시간여행 패러독스….)
체리 애쉬:우.. 우와... 엄청 어려울 것 같은 이름인데요... 쉽다고 써있지만 상대성 이.. 이... 이론?! 라는 이거 이해했어요?!
라 콕스:적힌 것까지는. 좀 더 천천히 읽어보려고. 네가 산 것들도 보여줘.
체리 애쉬:대단한데요… 나는 이거, 쇼팽 악보집. 전부터 사려고 했었는데 자꾸 까먹는 것 있죠~ (천천히 서점 밖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무래도 서점은 들어가기 어려운 분위기잖아요. 오늘 겨우 샀어요!
라 콕스:그래? 그럼, 다음에도 같이 오자. 혼자 들어가는 것보단 같이 들어가는 게 편할 거 아냐. (느릿느릿 따라나서다가도 문득 묻는다.) …데려다 줄까?
체리 애쉬:정말~? 나중에 악보집이 넘치게 되면 어떡하지! (장난스레 웃는다. 네 말에 뒷편으로 시선을 옮기면,) …어, 시간이 오래 되긴 했죠. 고마운데… 고마운데… …정말 딱 한 곳만 더 들리지 않을래요?
라 콕스:응? 여러 곳을 더 들러도 되는걸. 난 괜찮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어딜 가고 싶은데?
:그건~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댄 그는 손짓하며 앞장섭니다.
시간은 어느덧 9시. 여름이 농익어가며 하늘에 해가 떠있는 시간이 부쩍 길어졌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니 교연한 노을이 떨어져 상공과 구름이 어둡게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체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 두 사람은 어느 외진 골목길에 접어듭니다.
주변을 살피면 양옆으로 붉은 벽돌이 고루 쌓여 있고 그 표면을 담쟁이 넝쿨과 장미꽃이 똬리 틀고 있습니다.
요 근처에 이런 길이 있었던가요? 금시초문입니다.
:이곳은 하루가 다르게 바삐 변화하는 도시입니다.
도로 위에는 어제 보지 못했던 차량이 오늘의 배기음을 터뜨리며 지나다니고, 몇 달 새에 하늘을 찌를듯 드높게 건축된 신설 빌딩이 세워지는 것이 예사인 곳.
으레 생기는 변화를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야만 내일에 적응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니까요.
번화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 하나가 고스란히 남겨진 듯한 풍경은 꽤 낯설지도 모릅니다.
점점 더 좁아지는 골목을 나아가다 보면 머지 않아 그 끝에 당도합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귀퉁이에 세워진 다 낡은 악기상 앞에 머무릅니다.
:쿰쿰한 나무썩은내, 비릿한 풀냄새와 한층 짙어진 여름의 오존 냄새가 머리맡을 맴돕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흰 울타리가 빙 둘러쳐진 악기상, 기스 투성이 전면유리창 너머로 갖가지 악기들이 모습을 뽐내고 있습니다.
라가 무어라고 입을 열 새도 없이 체리는 악기상의 출입구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딸랑. 계절의 구색을 맞추듯 청명한 현관벨소리가 귓전을 때립니다.
빛이 바랜 [카운터] 좌석에 앉아 있던 악기상의 주인은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흘끗 확인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합니다.
:교복 차림새의 학생 두 명이 무언가를 살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나봐요.
목재 구조의 악기상 내부는 흐릿하나마 찝찔한 먼지 냄새가 납니다.
살피기에는 벽면 가득 들어찬 거대한 [책장]이 인상적이고, 악기상의 메인이라 할 수 있는 갖가지 [악기들]은 진열대 위에 놓여 있거나, 벽에 걸려있거나 합니다.
악기만큼은 애지중지 관리했는지 하나같이 먼지가 쌓이지 않은데다 광택이 돕니다.
체리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 눈치입니다. 악기들 사이를 서성이고 있습니다.
라 콕스:살 거라도 있어?
체리 애쉬:그건 아닌데… 음, 조금 구경하고 있을래요? 금방 갔다올게요.
라 콕스:같이 가면 안 돼?
체리 애쉬:그래두… (끄응, 고민하는 투.) 좋지만요오. 많이 돌아다닐 것 같아서. 진짜 잠깐이면 돼요! 다녀올게! (쏜살같이 너머로 뛰어갔다...)
라 콕스:(순식간에 홀로 남겨졌다. 어정쩡히 서 있다가도 몸을 돌려 악기들을 바라본다.)
:현악기, 금관악기, 목관악기, 타악기… 타현악기인 피아노까지.
이 허름한 악기상에 어울리지 않을만큼 아름답고 반짝이는 악기들이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자리합니다.
창측 한켠에는 들여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진열된 다른 악기들보다도 아름답고 깨끗한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습니다.
라 콕스:(유난히 잘 관리된 듯 보이는 피아노에 다가가 건반 뚜껑을 열어 본다. 검지로 드러난 건반 중 하나를 눌렀다. 소리도 깔끔하군.)
의지 Roll
기준치:100/50/20
굴림:28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피아노의 맑은 건반소리가 악기상 내부를 떠돕니다. 확실히, 새 것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라 콕스:(다른 특별한 점은 없을까? 반질반질한 피아노 이리저리 훑어본다.)
:별다른 점은 없어보이네요!
라 콕스:(슬그머니 건반 뚜껑을 덮고 책장으로 시선을 돌린다.)
:셀 수 없이 많은 악보집들이 책장 가득 어깨과 어깨를 맞댄 채 꽂혀 있습니다.
악보집들은 어느 한 권 빠짐 없이 세월의 흔적이 누렇게 껴있습니다.
걷어내지 못한 먼지가 얕게 쌓여 있기도 하고, 모서리가 찢어진 악보집이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종이는 관리하기 힘드니까요.
라 콕스:(비교적 상태가 멀쩡한 악보집을 꺼내 펼쳐보며…. 서점에서처럼 튀어나온 책이 있지는 않은지 살폈다.)
:서점에서처럼 튀어나온 책은 없네요. …모두 평범한 악보집 같습니다.
상태를 보아 판매용으로 진열해 둔 건 아닌 것 같고, 악기를 구매하러 온 손님이 테스트 할 수 있도록 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한 점은 없어보이네요.
라 콕스:(꺼냈던 악보집을 제자리에 꽂아둔 뒤 카운터로 향한다.)
:팔꿈치를 올린채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악기상 주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무언가 물어보면 대답은 해줍니다만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카운터 위에는 낡아빠진 [아날로그 시계]와 [라디오] 가 올라와 있고, 그 옆에 읽다만 [신문] 이 놓여 있네요.
라 콕스:(악기상이 아니라 골동품점인 것만 같군…. 아날로그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골동품 가게에서 주워올 법한 연식의 오래된 아날로그 시계.
시계약은 꼬박꼬박 잘 갈아주고 있는 모양인지 세 개의 침은 별 무리없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라 콕스:(이번에는 라디오에 시선을 두었다. 이것도 골동품인가?)
:척 보기에도 만들어진지 기십 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라디오. 노이즈 낀 저음질의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라 콕스:(옆에 놓인 신문도 훑는다. 언제적 신문이지?)
:잘 알려진 신문사의 주간 신문입니다만, …자세히 살펴보면 최신호가 아니라 몇 주 전에 발행된 신문입니다.
펼쳐 읽어보면 다음와 같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라 콕스:
지능
기준치:80/40/16
굴림:90
판정결과:실패
(흠.)
:기사 날짜를 재차 살피니 이 신문은 3주 전에 인쇄된 호입니다.
'지난주'가 덧붙어 있는 것을 미루어 유추하건대 그 매혹적이라는 B씨의 연주는 대략 한 달 전에 콘서트로 진행되었던 모양이에요.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듭니다. 혹은 위화감이거나 어떤 감이 작용하며 드는 느낌일 지도 모르고요.
콘서트가 있던 그 날 분명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체리 애쉬:돌아가요~!
:어느정도 둘러보기를 끝마치면 체리가 말을 걸어옵니다. 무언가 석연찮은듯, 혹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입니다.
체리 애쉬:찾는 악기가 있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없나 봐요. 팔리지는 않았을 텐데, 이상하다….
라 콕스:(그러고 보니, 한 달 전 A시에서 전염병이 시작됐다는 뉴스를 들은 기억이 난다.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찜찜한 마음 뒤로한 채 당신을 맞이했다.) 뭐길래 그래? 같이 찾아봐 줄 수도 있어.
체리 애쉬:그냥 평범한 피아노인데요, 엄청 낡았구. 또… 엄청 낡은….
라 콕스:굉장히 깨끗하게 관리된 피아노는 봤는데 말이야. (고개 흘긋 돌린다.) 저쪽에.
체리 애쉬:(고개를 저었다) 그럼 아닐 거예요. 엄청 헤졌거든요!
라 콕스:다시 한번 둘러볼까? 같이 찾아보면 나올지도 모르고. 그런데…. 그 피아노는 왜 찾으려고 하는 거야?
체리 애쉬:그럴까요? 흠, 이유라 하면~ 추억이 있는 물건이라서? 그냥, 보러오고 싶었는데 말예요.
그 깨끗한 피아노가 있는 바로 옆이요, 원래 거기에 있었거든요.
라 콕스:음…. 다른 사람이 와서 사 가기라도 한 걸까. 갑자기 없어진 거라면 그런 이유밖에 없을 것 같은데. 많이 아쉽겠네.
체리 애쉬:그러게요~ 그럼 시간도 많이 지났구, 슬슬 집에 돌아갈까요?
라 콕스:그래. 데려다 줄게.
:짙은 땅거미가 아스팔트와 돌바닥을 기기 시작한 저녁과 밤, 그 사이의 애매한 시간.
소등되어 있던 가로등의 불빛이 하나씩 점등하며 온전히 어두워지진 않은 길을 비춥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한 이후 도시는 저녁시간대 특유의 활기를 잃은지 오랩니다.
악기상에서 나온 두 사람은 귀갓길에 광장을 지나칩니다.
중앙에 있는 건… 피아노?
체리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피아노를 향해 다가섭니다.
:낡디 낡아 의자에 앉는 사람도, 건반에 손을 대는 사람도, 하다못해 눈길을 주는 사람도 없이 분수대 맞은 편에 그저 장식물처럼 배치되어 있는 나무 피아노입니다.
체리는 손끝으로 건반을 쓸어내리며 말합니다.
체리 애쉬:이 피아노가 여기 있었구나….
라 콕스:
정신
기준치:50/25/10
굴림:10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세상의 오류와 같은 현상, 다시 한 번 어쩐지 모를 데자뷰 현상에 사로잡힙니다.
이 장면, 어디선가 분명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꿈에서일까요?
라 콕스:
SAN Roll
기준치:46/23/9
굴림:64
판정결과:실패
:이성 1 감소.
라 콕스:네가 찾던 게 이 피아노였어?
체리 애쉬:맞아요! 엄청 낡았지 않아요? 이 정도면 못 알아 볼 수가 없지, 지금은 그 때보다 조금 더 깨끗해보이지만.
라 콕스:누가 관리를 하기라도 한 걸까. (느릿느릿 당신의 곁으로 다가가 함께 건반을 내려다본다.) 이렇게 한눈에 알아볼 정도면 꽤 깊은 추억이 담겨있나 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되나?
체리 애쉬:(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이 피아노가 각별하다기 보단, 이 피아노를 같이 보러 온 사람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옛날에 그 악기상에서 같이 이 피아노를 보러 왔었거든요.
아잇, 정말 특별한 건 없어서 말하기 민망하네. 기껏 물어봐줬는데, 부풀릴 걸 그랬나 봐.
:그렇게 말하는 체리는 자리에 앉아 피아노 위에 녹음기를 올려두고, 녹음을 시작합니다.
그의 손가락이 자유롭게 건반 위를 누비면, 게릴라 연주회가 시작됩니다.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잰걸음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의 이목이 광장의 피아노와 그에게 집중됩니다.
휴대폰을 들어 체리가 연주하는 것을 촬영하거나 동영상으로 남기는 행인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그런 체리의 연주를 바라보는 라의 심정은 어떤가요?
라도 언젠가 박수 갈채를 받으며 무대에 올랐던 적이 있을 터입니다.
:해가 온전히 졌는데도 목구멍은 뜨겁고 살갗은 익어버릴듯 따갑습니다.
가로등의 적적한 불빛이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광장을 밝힙니다.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허름하고 볼품 없던 낡아 빠진 피아노일지라도 그 정도의 연약한 빛을 반사할 수는 있는 모양입니다….
곡 하나를 완주한 체리는 라에게로 다가옵니다.
체리 애쉬:피아노, 치고 싶어졌어요?
라 콕스:(당신의 연주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감상을 가졌는지는 한 문장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네 곁에서 함께 연주하고 싶어.)
의지 Roll
기준치:100/50/20
굴림:100
판정결과:보통 성공
응……. 정말로. (Absolutely. 당신이란 사람은 참 이상했다. 홀연 듯 나타나 자신을 이다지도 흔들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이상하리만치 박동이 빠르다. 유행 중이라던 전염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혹은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인지. 하여간 두 쪽 다 곤란하다는 점만은 똑같았다.)
체리 애쉬:잘됐네요!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면 새하얀 치열이 드러나고, 해사한 미소가 번진다. 그쵸? 그는 짧게 덧붙이며 제 일처럼 기쁜 듯 웃었다.)
다음엔 꼭, 제대로 된 연주를 들려줘요. 라가 치는 피아노 정말 좋아하거든. 나, 같이 피아노 치기로 한 것도 잊지 않았어요.
라 콕스:기회가 된다면…. (느슨히 웃는다. 퍽 편안해 보이는 낯.) 지금은 손이 굳어서 안 되고. 다음에 놀러 와. 같이 연주할 수 있게끔 재활해둘 테니까.
체리 애쉬:굳어도 좋은데요! 흠~ 틀리면 틀리는대로 인간미가 있잖아요~? (아하하, 소리내어 웃으며 앞장 서 걸었다.) 농담이에요, 이제 진짜 집에 가요!
라 콕스:(보폭을 늘려 나란히 걸었을 것이다. 당신을 데려다주는 동안에는, 줄곧.)
체리 애쉬:그런데 라는, 집에 늦게 들어가도 괜찮아요?
라 콕스:이래 봬도 통금은 없는 집안인데. (농.) 이 정도는 괜찮아. 너무 늦지도 않았고…. 또, (순간 말을 멈춘다. 부모님께 친구와 놀았다고 말씀드린다면 오히려 기뻐하실걸…. 이런 말까지 덧붙이는 건 좀… 그런가? 적당히 얼버무렸다.) …아무튼.
체리 애쉬:응? 또 왜요? 어어? 왜요, 왜요! 뭔데요~!?
라 콕스:(입 꾹 다문다.) 별것 아냐. 너는? 시간이 꽤 늦어졌는데. 집에 연락은 해 뒀어?
체리 애쉬:(아랫입 삐죽이다가도… 금새 돌아온다.) 음~ 형한테는요! 이제 몰래 들어가기만 하면 돼요! (의기양양..)
라 콕스:몰래… 들어갈 수 있나? (현관으로 들어가면 무조건 걸리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했다.) 어서 들어가 봐. 조금이라도 덜 혼나야지 않겠어.
체리 애쉬:그럼요! 여지껏 한 번도 들킨 적 없었어요~ (승리의 피스를 내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라도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학교에서 봐요!
라 콕스:(자주 해봤나 보군…. 손 마주 흔든다.) 응, 푹 쉬고. 내일 보자.
그로부터 며칠 뒤, 아침. 숨통을 불사르는 듯한 무더위와 함께 잠에서 깨어나면 휴대폰에 맞춰두었던 알람이 라를 보채고 있습니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삐비비빅.
정신사나운 벨소리는 한참이고 이어집니다.
오전 댓바람부터 머리가 띵한 것이… 밤새 열대야에 시달렸는지도 모릅니다.
등교 준비를 끝마치고 집 바깥으로 나서기 직전, 끄지 않은 채로 잊고 있었던 TV에서 뉴스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퍽 익숙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네요. 정체불명의 전염성 질병에 대한 속보를 다루기 위해 신설 편성되었다던 그 코너임이 분명합니다.
라 콕스:
듣기
기준치:60/30/12
굴림:100
판정결과:대실패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정체불명의 전염성 열병에 감염된 환자의 수가 전세계 인구의 25%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시민들의 불안감은 날로 달로 급증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목격되고 있습니다. …환자들은 하나같이 여름철의 짙은 오존 냄새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많이 떠있는 것이 기이하다.'는 말을 되풀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 대학병원 의료진은 질병 감염에 따른 환각 증세의 가능성을… 다음 속보입니다…."
라 콕스:(뚝뚝 끊기는 뉴스를 들으며 비어가던 학급을 떠올린다. 고열에 시달리던 것처럼 보이던 인물을 떠올리기도 했다. 붉은 머리에 늘 즐거운 듯 휘어낸 눈이 인상적이던 사람. 괜한 걱정이길 바라며 TV의 전원을 끈다. 평소와 다름없이 느릿느릿 등교 준비를 마치고 학교로 향한다.)
:라가 교실로 향하면, 불안하게도 체리의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늘 라보다 일찍 등교하던 그였는데… 어떻게 된 걸까요?
오늘은 조금 여유롭게 등교하려나? 안일하게 앉아있어보지만…
…조례 시간이 끝날 때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조금 부자연스럽지 않나요?
반 친구들이나 선생님은 체리가 등교하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을까요?
라 콕스:(친구들에게 묻는 것보다는 선생님께 여쭙는 것이 정확하겠지…. 조례 시간이 끝나자마자 몸을 일으킨다. 드물게도 걸음을 재촉해 선생님을 따라가서는 묻는다.) 선생님, 체리 애쉬가 아직 등교하지 않았습니다. 워낙 성실한 친구라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걱정되어서요. 혹시…….
선생님:애쉬 얘기지? 최근 유행하는 열병에 걸렸다더라. 오늘은 쉬겠다던데… 아마 몇 주는 못 나올 거야.
라 콕스:그런, 가요…. (대답이 늦다. 겨우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든다. 아침 자습 시간, 수업을 앞둔 상황임에도 그리했다. 정말이지, 평소의 라 콕스였다면 거들떠보기는커녕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터부시했을 행동을 나서 하고 있는 꼴이다. 체리에게 온 연락은 없을까?)
:체리에게서 남겨진 연락은 없습니다. 그러고보니 두 반이 묶인 뒤로부터 서넛의 아이들이 병결 처리 되었습니다.
메꿔두었던 책상은 다시금 주인을 잃고 방치되길 반복합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지난 며칠간 당신과 체리는 질릴만치 붙어 다니며 시간을 공유했습니다.
그간의 시간은, 즐거웠다고 단언할 수 있나요? 연락하나 남겨주지 않은 그에게 서운하지는 않나요?
라 콕스:(열병에 걸렸는데 연락을 남길 정신이 어디에 있겠나. 서운함이라고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연락처에 등록된 당신의 이름을 빤히 바라보다, 제 쪽에서 먼저 연락을 남긴다.)
[소식 전해들었어. 몸은 좀 괜찮아? 어서 나아서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네.]
:라가 문자를 남기면 수업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옵니다… ….
하교를 알리는 묵직한 종례음과 함께, 번쩍! 마치 스위치를 올리듯 분산되어 있던 정신이 한 자리에서 맞붙었습니다.
체리에게 보낸 연락은 아직 답이 오지 않았고,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면 책가방을 싼 아이들이 교실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들어옵니다.
어느틈에 종례가 이루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종일 좀처럼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혹은 다른 생각을 했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거나요.
:학교가 파했으니 집으로 귀가해야겠죠. 늑장을 부리고 있노라면, "빨리 나가, 문 잠글 거야!" 오늘의 주번인 동급생이 톡 쏘아붙입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라는 교실 바깥으로 나가기 직전, 어쩐지 모를 기묘한 이끌림에 힘입어 체리의 책상 쪽으로 시선을 기울입니다.
때마침 덜 닫힌 창문 가장자리에 불어온 오후의 설익은 바람에 가슴이 뻐근해졌습니다.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은 건조한 1인용의 책걸상. 비어 있는 가방 걸이, 사물함 아래 가지런히 모여있는 교과서…
[C반, Cherry Ash]라고 적혀있는 코팅된 시간표까지.
기스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책상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전에 없던 기이한 감각마저 솟아나는 것입니다.
:어제는 분명 이 자리에 책상 주인이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하루종일 비어 있었습니다.
그 덧없는 사실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지던 그 때.
라 콕스:
관찰력
기준치:70/35/14
굴림:65
판정결과:보통 성공
:널빤지처럼 납작하고 어두운 책상 사물함 속, 켜켜이 정돈된 교과서 사이로부터 빼꼼 튀어나와 있는 찢어진 작은 종잇조각을 발견합니다.
라 콕스:내가 잠글 테니까, 열쇠만 놓고 가 줄래? 조금 오래 걸릴 것 같아서 그래. (종잇조각을 꺼내 펼쳐본다.)
:'그럼 꼭 잠그고 가! 열려있으면 내가 혼나니까.' 동급생은 그리 말하며 교탁에 열쇠를 두고 갑니다.
라가 종잇조각을 펼쳐보면, 그것은 어떤 위치를 가리키는 주소입니다.
혹은 약도거나. 눈에 익은 글씨체만으로도 머리통에 자연스레 그려지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이 장소는 의심할 여지 없이 며칠 전 체리와 함께 방문했던 그 악기상이 틀림 없습니다.
…잠깐, 쪽지의 귀퉁이에 무언가 적혀있나요?
라 콕스:
관찰력
기준치:70/35/14
굴림:53
판정결과:보통 성공
지능
기준치:80/40/16
굴림:18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시간을 증명하고 기억을 되새길 물건, 꼭 이것이지 않아도 현재를 회상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라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며칠 전, 체리와 함께 놀러가면서 구매했던 물건들이요.
팔찌와 머리끈, 그런 사소한 것이라도 라가 떠올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라 콕스:(시간을 증명하고 기억을 되새길 물건 하나…. 문득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본다. 어둑한 피부 위로 붉은색 팔찌가 매듭지어진 것이 보인다. 체리, 사실은 말이야. 꼭 물건이 아니어도 될 것만 같아. 붉은 것을 볼 때면 함께 보냈던 시간이 떠오를 테고, 햇볕을 쬘 때면 너와 처음 만났던 여름을 떠올리게 될 거야. 더욱이 피아노 소리는 말할 것도 없지. 그러니, 사실 나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종잇조각을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그 길로 악기상으로 향했다. 기다리는 것은 어렵지 않아. 누군갈 찾으러 가는 것도 낯설지만은 않은 것 같아. 단 한 번도 그래본 적 없는데 말이야. 피아노 소리가 나를 이끌어 주겠지. 한 마리 나비가 나를 찾아와 주겠지….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꼭 먼 옛날에 경험해본 것처럼.)
:끊임없이 기억을 더듬거나 헤매다보면 라는 일전에 함께 방문했던 악기상 앞에 도달합니다.
악기상 출입구에는 희끄무레하게 바래어 페인트칠이 벗겨진 '임시 휴업' 팻말이 걸려 있습니다.
라는 새파란 싹이 이름 모를 들꽃이나 잡초들과 뒤섞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울타리 근처를 서성입니다.
라 콕스:(음……. 넘어갈 수 있을까?)
:미련을 떨치지 못한 당신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악기상 바깥쪽의 자그맣게 무너진 울타리입니다.
그 사이로 어떤 계절의 매미 우는 소리가 이어집니다. 좁다란 공간은 마치 언젠가의 비밀스러운 길이 닦였다가 무산된 것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틈새를 들여다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몸을 구겨본다면 간신히 이동하는데에는 무리가 없어 보여요.
라 콕스:(구깃구깃…. 넘어가 본다.)
:구깃구깃… 비밀의 장소로 인도하는양 샛길을 타고 악기상 건물 외벽의 바깥 쪽을 타고 둘러 이동하다 보면,
라는 나무가 부자연스럽게 우거진 공터를 발견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풀벌레 우는 소리만 선명합니다. 이곳에 사람의 흔적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만… 메마른 흙바닥의 정가운데 뻥 뚫린 싱크홀이 나있는 것만큼은 예삿 일이 아닌 것 같군요.
구멍의 가장자리는 마치 녹은 것처럼 보이며, 비정상적으로 일렁이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존재하는 웜홀이라는 미지의 공간이 발치 아래 투영된 듯 합니다.
라 콕스:
SAN Roll
기준치:45/22/9
굴림:49
판정결과:실패
1
:이성 1 감소.
38도를 웃도는 축축한 여름임에도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라는 유사 이전의 세상에 인간이 최초로 빚어졌을 당시 하나의 재료처럼 장기 곳곳에 새겨져 있었던 본능으로 말미암아 어떤 메시지를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어쩌면 결국 이곳에 다다르기 위해 스스로 모르는 사이 오래도록 방황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구덩이를 살피면 마치 하늘을 반사한 물이라도 투영하듯 희미한 빛이 텅 빈 공간을 떠돌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깊어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근방에선 강렬한 여름의 오존 냄새가 풍깁니다. 비릿하기도 하면서 싱그럽기도 한 특유의….
라는 구멍으로 뛰어드나요?
라 콕스:(그간 시간여행과 관련된 매체를 접해온 것을 떠올렸다. 그 모든 상황이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것만 같았다. 이것은 기막힌 우연이거나, 잘 짜인 운명일 것이다. 하여간 자신이 이 구멍에 발을 내디딜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대로 구멍으로 뛰어듭니다.)
:시간의 왜곡에 뛰어들기를 결정했다면, 더 지체할 이유는 없습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친 라는 구멍 속으로 몸을 내던지기로 합니다.
찰나에 당신은 온 몸을 거스를듯 피부를 긁어대는 어떤 비인간적인 손길을 느낍니다.
전에 느껴본 적 없던 외계의 에너지가 강압적으로 몸을 잡아 당기는 듯한 감각이었습니다.
:…깜빡. 깜빡, 깜빡.
소용돌이치는 왜곡 속을 맨발로 건너온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맞게 도착한 걸까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당신은 꽤 깊은 구덩이 안에 있습니다.
깊은 구멍 안에 머물고 있는 탓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꼭 천장같은 푸른 색의 하늘이 원형으로 오려져 있습니다.
구명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라 콕스:(……올라갈 수 있을까? 내가? 여길?)
:할 수 잇다! 할 수 있어!
라 콕스:(안 될 것 아니까 처음엔 설렁설렁.)
오르기
기준치:20/10/4
굴림:53
판정결과:실패
(흠.)
근력
기준치:60/30/12
굴림:24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이게 되네?)
:해냇다~
라는 사방이 꽉 막혀있던 구멍을 아래에서 위로 기어 빠져나오는데 성공합니다.
비록 처음 한 번은 미끄러져 떨어졌지만요.
체력 1 이 감소합니다.
근처를 살피면 구덩이에 뛰어들기 전에 보았던 그 공터입니다.
장소는 그대로인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사뭇 다릅니다.
:이리저리 우거져있던 나무가 바싹 말라 타고 남은 잿더미처럼 바닥을 장악하고 있고,
맞은 편에 보이는 악기상의 벽면은 부식되어 이질적인 감상을 더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전혀 관리되지 않은 것 처럼 보이는군요.
라 콕스:꿈이라도 꾸는 걸까…. (더러워진 옷 툭툭 털며 가게 입구로 다가가 본다. 특별한 점은 없을까?)
:공터에서 빠져나와, 라는 악기상 입구에 다다릅니다.
길게 뻗은 아스팔트 도로나 굴곡진 모퉁이를 돌아보아도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발견할 수 없습니다.
공간 자체가 마치 노이즈낀 흑백 필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길로, 어떤 장소로 향하든 일말의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네요.
그저 전깃줄 위에 앉아 지저귀는 새들의 목소리나 나무에 달라붙어 노래하는 매미의 우짖음만이 공허한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당장은 [악기상]한군데정도를 살펴볼 수 있겠네요.
라 콕스:(손목에 걸린 팔찌를 내려다본다. 이것만 멀쩡하다면 되었다. 악기상의 문은 열려 있을까?)
:라가 악기상을 살피면, 녹슨 초인종이 달린 문은 걸쇠가 고장나 살짝 열려 있습니다.
직전에 보았던 '임시 휴업'팻말은 문간에 그대로 걸려 있습니다. '임시', '휴업', 하고 반으로 쪼개져 덜렁거리는 탓에 다소 음산한 기운을 더합니다.
닦지 않아 희뿌연 통유리 너머로 진열된 악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다 낡아가는 [피아노] 한 대만이 전시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라 콕스:
지능
기준치:80/40/16
굴림:83
판정결과:실패
(응?)
관찰력
기준치:70/35/14
굴림:5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어쩐지 눈에 익은 피아노에 마음을 사로잡혔습니다. 자세히 살피지 않아도 '아' 싶은 구석이 있는 모양새인 겁니다.
이 피아노는… 며칠 전 체리와 함께 광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보았던 예의 그 피아노입니다.
다 낡아 볼품 없어진 악기에 싸구려 페인트 칠을 해 디스플레이용 구색만을 갖추고 있었던 그 피아노.
라가 알기로 이 피아노는 분명 광장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악기상이 출처였던 모양입니다.
이후 길거리를 재차 둘러보지만 역시나 사람은 커녕 개미 한마리 보이지 않는 공간입니다.
라 콕스:음……. (정말 영문 모를 일이다. 보는 눈이 없다면 안으로 들어가 봐도 상관없지 않을까…. 걸쇠 걸린 문을 흔들흔들.)
:악기상에 들어설까요?
라 콕스:(들어갑니다.)
:라가 내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는 [카운터] 입니다.
좌석에 앉아 악기상을 지키고 있던 가게 주인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목재 구조의 악기상 내부는 텁텁하고 간지러운 먼지 냄새가 납니다.
어디에서도 악기는 찾아볼 수 없지만 벽면 가득 들어찬 거대한 [책장] 은 그대로네요.
라 콕스:(안으로 들어서며 카운터를 훑는다.)
:쓸쓸한 카운터 위에는 다소 눈에 익은 물건들이 주인을 잃고 방치되어 있습니다. [아날로그 시계] 와 [라디오] 에 먼지가 그득 쌓여 있습니다.
라 콕스:(아날로그 시계를 살핀다. 멈춰있겠지?)
:라는 먼지 쌓인 아날로그 시계를 들여다봅니다.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시계는 약이 거의 다 되어가는 모양 새로. 세 개의 침이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그러모아 간신히 뜀박질 하고 있습니다.
하나 부자연스러운 점은 바늘들이 하나같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래 공전해야 할 궤도를 떠나지 못한 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일련의 반복된 패턴에 기이한 느낌이 들어,
라 콕스:
SAN Roll
기준치:44/22/8
굴림:10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고장 났구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라디오를 건드려본다.)
:치직… 치지지직… 완전히 고장나버렸는지 라디오는 탁한 백색소음을 흩뿌리고 있습니다.
주파를 맞춰보고 툭툭 두드려도 보지만 고쳐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라 콕스:
기계수리
기준치:10/5/2
굴림:96
판정결과:대실패
:*"…칙, 치지직… …사망한 인구가 전체 인류의 70%에 육박했습니다.
…… 치직, …그 누구도 미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인류는 역사에서 잊혀지게 될 것입니다. 한편 …가설이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그들은…전염병이 사실은 어떤 저주이며, 감염 경로가 특이하게도 …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주를 세상에 퍼뜨린 원인이 되는 [곡의 악보를 태우는 방법] 만이…… 치직…"
…이를 마지막으로, 라디오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마침내 수명을 다 한 것이겠지요.
라 콕스:(전체 인류의 70%가 사망했다. 그 전염병으로. 병은 사실 저주였으며, 해주하는 방법은…. 들려오는 소식이 사실이든 아니든 충격받아 마땅할 정보이긴 했다. 그럼에도 기이할 정도로 침착 유지하는 것은, 라 콕스라는 인물이 본디 그러했기 때문일 터였다. 평범한 인간이라기에는 과할 정도로 관조적인 태도를 내비치는 사람. 크게 동조하지 않으며 효율적인 해답을 추구하는 이. 그런 주제에 체리 애쉬와 관련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곳에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무어, 사랑이란 다 그런 것 아니겠나?)
(아직은 돌이킬 수 있다. 모순되지 않은 다른 결과를 발생시키면 되는 일이다. 라디오를 내버려 둔 채 책장으로 향한다.)
:도둑 맞았는지 듬성듬성 비어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셀 수 없이 많은 악보집들이 책장 가득 꽂혀 있습니다.
걷어내지 못한 먼지는 더욱 무거워졌고, 제대로 자리잡지 못해 절반쯤 튀어나와 있는 책자도 여럿 보입니다.
라는 불현듯 떠올립니다. 피아노를 그만둔 뒤 악보를 어떻게 관리해왔더라, 하고.
그래서 더 살필 만한 건 없나? 책장 모서리에 전에 보지 못했던 [달력] 하나가 박힌 못 위로 장식물처럼 걸려 있음을 발견합니다.
라 콕스:(방치했지……. 놓아둔 장소에 그대로 잘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달력을 가져와 살폈다.)
:달력은 6월, 혹은 7월에 펼쳐져 있습니다. 덩그러니 매달려 있는 몸통만한 달력을 쳐다보던 당신은 달력 어귀에 적혀있던 올해의 년도를 발견합니다.
그곳에는 큼지막한 네 개의 숫자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2023년.
라 콕스:
지능
기준치:80/40/16
굴림:98
판정결과:실패
:세상의 오류를 알리듯 거꾸로 돌아가는 아날로그 시계와, 당신이 살던 현재로부터 조금 동떨어진 세월의 흐름을 가리키는 달력.
길거리에는 사람 하나 오가지 않고 시야는 마치 흑백필름을 끼워 넣은 것처럼 생기 없었습니다.
미지의 구멍, 그곳에 마치 운명같은 이끌림을 얻어 겁없이 뛰어든 당신. 눈치챕니다. 이곳은 전에 살던 2020년의 시간선이 아닙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겪은 라 콕스,
라 콕스:
SAN Roll
기준치:44/22/8
굴림:70
판정결과:실패
2
:이성 2 감소합니다.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거나 악기상을 열고 나오면, 끝없는 열기에 데워진 아스팔트가 일렁이는 건너편 골목에서 누군가의 인영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실루엣을 바라보고 있자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라를 반깁니다.
"한참 찾았어, 몸은 괜찮아진 거예요?"
체리입니다. 대답을 바라고 건넨 말은 아니었는지,
체리 애쉬:과거로 가서 라를 만나고 올게요! 생각해봤는데, 문제 없을 것 같아. 라가 정말 피아노 치는 것을 싫어했더라면 이 악기상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혼잣말을 덧붙입니다. 체리의 품에는 악보가 들려 있습니다.
이른 아침의 교실, 책상 위에 올라와있던 체리의 가방 사이에서 보았던 그 악보집이 틀림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당신은 딱 한 마디 정도 이야기 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과거의 당신을 찾기 위해 과거로의 리프를 앞둔 체리에게,
실제 '과거'의 라가 되는 당신은, 어떤 말을 던질 건가요?
라 콕스:과거의 나를 만나면…. 옆자리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어봐 줄래? 분명 좋아할 거야. (좋았거든. 아직도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해. 뒷말은 삼켜 낸다. 겨우 건넬 수 있는 단 한마디의 말, 그것치고는 시답잖으며 초라한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으로 되었다. 이외의 모든 감정은 제가 아는 체리 애쉬의 몫이지 않나. 그러니 지금은 아껴두기로 했다.)
:체리의 활짝 웃는 얼굴은, 말로 하는 것보다 확실한 답이 되어 라에게 돌아옵니다.
체리 애쉬:기다려요!
:그 말을 남긴 체리는 마치 모든 결정과 준비를 끝마친 사람처럼, 미련 없이 라를 지나쳐 악보를 들고 깊고 커다란 구멍에 뛰어듭니다.
그와 동시에, 라의 시야가 일순 아득히 멀어지고…
…다시 정신을 차리면 2023년에 묶여있던 몸은 다시금 2020년의 악기상 앞에 서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체리는 보이지 않고, 한가로운 골목길을 누비는 어린 아이들이 종종 눈에 들어옵니다.
구멍에 뛰어들기 전 당신이 손목에 착용하고 있었던 팔찌는 심하게 헤져 끊어져갑니다.
악기상 유리창 너머의 아날로그 시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정갈하게 돌아갑니다.
라 콕스:(순식간에 해져버린 팔찌를 가만 매만진다. 소원이 이루어질 때가 되었나? 그런 생각을 했다.)
:꿈이라도 꾼 걸까요? 단지 꿈이라는 한 단어로 축약하기에 보고 듣고 겪었던 모든 것들이 지나치게 현실적이었습니다.
2020년으로 돌아온 당신은…
라 콕스:
지능
기준치:80/40/16
굴림:80
판정결과:보통 성공
:라는 2023년의 악기상 라디오에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립니다.
사망한 인구, 70%. 저주를 세상에 퍼뜨린 원인은 '어떠한 곡' ….
그 곡의 악보를 태우는 방법 만이.
아마도 이 세계를 구할 유일한 수단이겠지요.
라는 그 곡의 악보가 어디에 있었는지 떠올릴 수 있나요?
라 콕스:(계절 환상곡도, 겨울이 흘린 눈물도 모두 체리와 함께 있을 때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하나는 당신의 책가방 안에서, 하나는 음악실에서….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음악실로 향할까요?
라 콕스:(이동합니다.)
:어느덧 저녁이 쏟아지고 밤으로 물들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학교로 향하는 내내 무거운 습기가 발목을 잡는듯 합니다.
한밤중의 여름은 습하니까요. 매년 이맘때쯤 장마전선이 북상하고는 했으니, 시간이 부지런히 흐른다면 며칠 안 있어 많은 비가 쏟아질 터입니다.
라는 목적지로 향하던 도중 몇가지 기현상을 목격합니다.
전봇대를 붙잡은채 119에 고열의 두통을 호소하다 잠들듯 바닥에 쓰러진 환자의 주위를 지나가던 사람이 일으켜 세우는 한편,
급히 출동하던 앰뷸런스가 어느 사거리에서 승용차와 부딪히는 등의 사고가 잇따라 발생합니다.
불가해하기 짝이 없는 세상의 불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왜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하늘을 올려다보면 소름끼칠만큼 많은 별의 형상이 아른거립니다.
학교에 도착해 음악실로 향하면 정해져 있는 수순처럼 열려 있는 문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닫히지 않은 창문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의 유영에 빼곡히 덮인 커튼이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하늘댑니다.
그랜드 피아노 앞에 놓여있는 피아노 의자 뚜껑을 열면 수납서랍 한구석에 보관되어 있는 오래된 낡은 악보집 하나가 눈에 띕니다.
악보의 이름은…
라 콕스:
교육
기준치:60/30/12
굴림:36
판정결과:보통 성공
:라는 무수한 언어서적으로부터 얻은 지식을 떠올려 제목을 읽어내는 것에 성공합니다.
악보집을 습득함과 동시에 라는 낡아빠진 악보집 어귀에 자리하고 있는 어떤 징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크툴루신화> 판정 또는 <오컬트> 판정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라 콕스:
오컬트
기준치:5/2/1
굴림:40
판정결과:실패
라 콕스:
정신
기준치:50/25/10
굴림:79
판정결과:실패
:그래요, 그 때, 체리가 쏟았던 악보집들 사이에 미운오리새끼처럼 섞여있던 그 악보집에도 이런 그림이 박혀 있었습니다. 조악하게 본떠 넣은 듯 형편 없는 문양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일견 누군가의 자필 사인처럼 보이는 문양은 꼭 도는 것 같기도 하고…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기이한 홀로그램같은 형상에 어쩐지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라 콕스:
SAN Roll
기준치:42/21/8
굴림:96
판정결과:대실패
3
:이성 3 감소합니다.
이 악보를 태우면 아마도 지긋지긋한 전염병도, 저주도 사라질 것입니다.
악보를 태울만한 공간이 있을까요?
라 콕스:
지능
기준치:80/40/16
굴림:9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자신이 라이터를 챙겼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교정의 소각장뿐입니다.
라 콕스:(악보를 챙겨 들고 소각장으로 향한다.)
:악보를 태우기 위해 음악실을 벗어나려던 라는,
눈 앞이 하얗게 아른대는 듯한 잔상을 보았습니다.
과연 잔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물에서 올라오는 듯한 인광의 기둥은 평범한 사람의 의식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떠한 영상도 초월하는 재앙과 비정상의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단지 빛은 이제 새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감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색깔의 형체 없는 흐름은 구덩이에서 곧장 천장을 향해 솟구쳐 올라가는 듯합니다.
:순수한 색채의 형태로 나타난 이계의 지성체, 세상에 알려진 어떤 스펙트럼과도 닮지 않은 희미한 색을 내는 비실체.
라 콕스:
SAN Roll
기준치:39/19/7
굴림:91
판정결과:실패
3
:아른거리던 색채는 곧 작은 개미지옥을 만들어낼듯 당신의 육신을 에워쌉니다.
순간,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듯한 역겨운 오존 냄새를 맡았습니다. 올 여름 내내 맡아왔던 비리고도 싱그러운 냄새입니다.
라 콕스:
지능
기준치:80/40/16
굴림:25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끈적하고 불쾌한 비실체가 몸 곳곳에 들러붙는 감각을 뿌리치고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습니다.
이성 3 회복합니다.
라 콕스:
정신
기준치:50/25/10
굴림:95
판정결과:실패
:라는 이 음악실에 남아있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낍니다.
그 때, 강한 힘이 당신의 팔을 끌어당겨 음악실 밖으로 끌어냅니다.
체리 애쉬:밤에는 음악실에 오면 안된다고 했잖아요!
…괜찮아요?
라 콕스:(조금은 얼떨떨한 낯. 음악실 안을 바라보다가도 당신을 마주 본다. 무엇을 보고 겪었든 간에 제게는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이 있다. 그러니 대답 대신 물음을 내뱉는다.) ……너는? 열병에 걸렸다고 들었어. 괜찮은 거야?
체리 애쉬:라가 전화도 안 받고, …아직 집에도 안 돌아왔다고 하니까….
:답지 않게 매서운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만, 그조차도 라가 들고 있는 악보집을 확인하거든 빠르게 누그러듭니다.
붙잡힌 통에 팔 전체에 전해지는 체온이 36.5 ℃를 훌쩍 넘어 섰음을 눈치챕니다.
체리의 몸은 불 위에 올려둔 물처럼 펄펄 끓고 있습니다. 이 상태로 쭉 당신을 찾아 헤매고 있던 걸까요?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그의 얼굴엔 당신을 살피려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체리 애쉬:그만 돌아가요.
라 콕스:(정말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당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떼낸다. 이어 당신의 이마를 짚는다.) 내가 할 소리야. 열이 이렇게나 나는데…. 난 이것만 처리한 뒤에 돌아갈 테니까. 응?
체리 애쉬:그럼, 그럼 같이 가요.
라 콕스:무리하면 안 되는 거 너도 알잖아.
체리 애쉬:잠깐은 괜찮아요, 내 몸은 내가 잘 아니까. 응?
라 콕스:(탐탁잖은 낯이다. 이어지는 짧은 한숨.) …도중에라도 버티기 힘들어진다면 얘기해줘야 해. 알겠지?
체리 애쉬:약속할게.
라 콕스:(체리와 함께 소각장으로 향한다.)
:라는 체리와 함께 소각장으로 이동합니다.
이 곳에서라면 악보를 태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교정은 벌레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합니다.
라 콕스:이걸 태우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했어.
체리 애쉬:(물을 것이 있는 듯 어물거리다가도, 고개를 주억인다.) 그럼 태워요.
라 콕스:왜 그래?
체리 애쉬:응? …라가 누가 말해줬다는 것 처럼 이야기 했으니까요. 하지만 근거가 없다면, 이 곳에 악보를 찾으러 위험을 무릅쓰지도 않았을테니까. 나는 라를 믿거든요.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그럴 거야.
라 콕스:(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당신은 미래에서 나를 찾아온 것이 맞냐고, 왜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이냐고, 우리는 무슨 사이였냐고…. 다만 어째서 나를 믿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자신이 당신을 신뢰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을 테니 구태여 물을 필요도 없다.) 나도 그래. 그러니까…. (알아야 할 것들은 나중에 천천히 나눠 보자. 덧붙이며 악보를 태운다.)
:라는 소각장에 악보를 밀어넣습니다. 악보는 그 많은 재앙을 낳은 물건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만치 쉽사리 불길에 찢겨나갑니다.
그렇게 모두 전소해 검회색빛 잿가루만이 허공에 날릴 때 쯤,
체리 애쉬:뜬금 없을지도 모르지만, 선생님이 내주셨던 과학 숙제 이야기요. 선생님은 미래에서 건너온 사람이 과거의 역사를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해 물었잖아. 어떻게 생각해요?
라 콕스:음…. 책에서 본 건데, 시간의 역행으로는 여러 다른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더라. 그렇다면 역사도 변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체리 애쉬:그렇구나… 나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만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 해요. 다른 시간선의 사람이 특정 시간에 개입할 수는 있다고 해도, 결정하는 건 오로지 그 시간선의 사람들 뿐이라고….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은 없어.
:그렇게 속삭이는 체리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있습니다. *
꼭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 아닌, 세상의 진리를 설파하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한참을 침묵하던 체리가 다시 한 번 입을 엽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체리 애쉬:있잖아, 라. 피아노 소리를 듣고싶지 않아요?
:그리 말하는 체리는 라에게 악보집 하나를 건네줍니다.
낡고, 오래 되었고, 허름하며, 손때 묻었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을 건네받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체리는 곧 쓰러질 것 같은 창백한 안색을 하고서 끊길 것 같은 목소리를 쥐어 짜내 한 가지 부탁을 남깁니다.
그 모습이 마치 한계에 다다른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체리 애쉬:부탁이 하나 있어요, 지금은 늦었으니 내일 오후 6시에 피아노가 놓여 있는 광장에서 그 악보를 연주해 줘.
꼭 그 광장이어야 해. 사람이 많은 곳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을 시간에, 반드시 이 곡을 연주 해줘야 해. 꼭이야.
:꼭이야. 그 말을 남긴 체리는 등을 돌려 사라집니다. 사라지는 체리를 잡아 세울 수 없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겠지만 비유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무지개를 손으로 잡을 수 없고 햇빛의 뜨거움을 유리병 속에 담지는 못하는 것과 같은.
비가 퍼부을듯 빽빽한 수증기가 마른 길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날씨 탓일까요? 오늘의 해는 일찍이 시들 요량인가봅니다.
하늘을 켜켜이 감싼 먹구름이 기묘하게 반짝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평소보다 적은 수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이 광장은 요 근방에서 유동객이 많은 장소로 손꼽히는 장소입니다.
중앙에 마련된 분수대 앞에 놓여 있는 낡아빠진 피아노가 눈에 들어옵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페인트 칠을 해두었지만 좀처럼 눈길을 사로잡지는 못하는 낡고 오래된 악기가 꼭 고물처럼 보입니다.
점점 더 무채색해지며, 점점 더 다채로워지는 모순적인 세계에 도태되어 있습니다.
그 허름한 피아노에 다가서는 것은 오로지 라, 당신 뿐이겠죠.
라 콕스:(가져온 악보를 악보대 위로 내려놓는다. 지금이 몇 시지?)
:광장의 시계를 확인하면, 시간은 점점 6시에 가까워지는 이릇입니다.
라 콕스:(건반 뚜껑을 열고 의자에 앉는다. 무대에 올라온 연주자에게는 주어지는 유예가 있다. 그 시간만큼은 오롯이 연주자만의 것이었으니, 라 또한 서두르지 않고 그 시간을 누리기로 했다. 의자의 높이를 제게 맞추고 뻑뻑한 페달을 밟아 길을 들인다. 꽉 채워 둔 셔츠의 단추를 하나쯤 풀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그리고는 심호흡. 낡은 건반 위로 손을 올린다.)
(네가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 어째서 그렇게까지 당부했는지는 알지 못해. 하지만 짐작 가는 것은 있지. 그러니까…. 체리, 날 찾으러 와.)
:당신은 시간의 풍파를 고스란히 간직한 악보대 위에 셀 수 없이 많은 나이를 먹고 자란 곡을 올려둡니다.
음표를 빼곡히 채워 넣은 악보는 종이가 어찌나 얇고 덧없는지 바람 한 점에도 부서질 것처럼 가녀립니다.
이 악보의 어느 구석이 그렇게나 특별한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체리는 당신에게 간곡히 부탁했었죠.
언젠가 당신이 최초로 건반에 손을 올려놓았을 때처럼 어깨 끝을 살짝 떨면서.
차가운 공기 한 품 찾아볼 수 없는 습하고 무더운 여름의 정가운데서 마침내 건반에 손을 올려둡니다.
:잊고 살던 서늘한 냉기가 백건과 흑건 위에 자리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깨를 익힐듯 강렬하던 더위가 한풀 꺾입니다. 추억으로 남길 뻔했던 감각들이 되살아남을 느낀 것은 그 때였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도 괜찮나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 번 연주를 그만 두었던 당신이 과연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모든 의지를 잃고 주저앉아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도망치듯 반대로 뛰어 가능한 먼 곳으로 숨었던 당신은 굳어버린 손가락으로 다시 누군가의 발걸음을 멈춰 세울만한 연주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세상에 절망과 꺾인 의지만이 잔재한다면 한 번 포기했던 당신이 이렇게 무사히 피아노 앞에 앉게 될 수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눈 앞에 놓인 골목의 폭이 서로 다를 뿐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주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언젠가 좌절하지 않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선택을 번복하고 버텨내는 겁니다!
라 콕스:
피아노 Roll
기준치:50/25/10
굴림:38
판정결과:보통 성공
:연주가 시작되면 바쁘게 거리를 활보하고, 때로는 흐릿한 풍경에서 벗어날듯 지나치던 사람들의 시선이 점차 광장에 모이기 시작합니다.
기이하게 물들었던 별빛 하늘이 풍향을 따라 꽃가루처럼 걷히고 가슴 위에 얹힌 듯 반죽되어 있던 아픔과 좌절이 단 하나의 점이 되어 흔적을 달리합니다.
곡이 끝맺음과 동시에 건반에서 손가락이 떨어지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날립니다.
뉘엿뉘엿 져가던 하늘에 수놓였던 수억 개의 별들이, 세계를 숙주삼아 성장하던 색채의 무리가 모두 걷혔음을 깨닫습니다.
라 콕스, 피아노 성장치 +86
모든 인파가 흩어지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 어느 구석에서도 체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같은 자리에 앉아 기다렸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 …
체리의 전학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돌아온 월요일의 아침에서였습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던 고열의 전염병 사태가 완전히 종식되고, 혼란했던 세계는 평화를 되찾습니다.
고열에 시달려 병결했던 아이들도 모두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울다 지친 매미가 늦여름의 끝에서 기나긴 생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시간은 부지런히 흐르고 계절이 순환합니다.
10대의 끝, 졸업식을 하루 앞둔 당신은 책상 사물함 깊숙한 곳에서 반과 반으로 접힌 쪽지 하나를 발견합니다.
라 콕스:(쪽지를 펼쳐 본다. 손목에는 해져버린 팔찌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끊어지지 않게끔, 끊어질 수 없게끔 새로운 실을 덧대어 이어낸 것.)
:눈에 익은 글씨를 확인하면 틀림 없이 체리의 글씨체입니다. 접힌 자국만이 선명하고 흐릿하게 번진 연필 자국은….
반짝, 하고. 마치 빛을 받은 유령의 신호처럼.
장마전선 소식이 들려오던 여느 2023년의 여름. 세간에 알려진 '정체불명의 전염병'사태가 종식된 날로부터 약 3년이 흘렀습니다.
좁디 좁은 골목을 돌아 울타리 어귀에 멈춰선 당신은 영업 종료 팻말이 걸려 있는 악기상 건물을 바라봅니다.
관리 되지 않아 썩어가는 나무벽은 꼭 악기상이 아닌 잊혀진 어딘가의 골동품 가게를 연상케 합니다.
그나마 빨갛게 돋아난 덩쿨장미가 건물 외벽을 타고 자라난 풍경만이 음산함을 닦아낼 뿐입니다.
라는 걸쇠가 앞길을 가로막은 악기상 처마 아래서 낡아빠진 [피아노] 한 대를 발견합니다.
라 콕스:(어쩐지 익숙한걸. 피아노 가까이 다가서 본다.)
:가까이 다가서 확인하면, 3년 전의 그 피아노임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간 이미 여러 차례 이 악기상을 방문했던 라라면, 전에는 이 피아노가 이 자리에 위치해 있지 않았음을 떠올릴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그날 이후로 행방이 묘연했던 피아노의 재등장입니다.
악보대 위에는 반듯하게 펼쳐진 [악보] 하나와 더불어 사용감이 남아 있는 [녹음기] 하나를 발견합니다.
라 콕스:이것도 익숙한 거고. (녹음기를 확인해본다.)
:녹음기는 피아노만큼이나 눈에 익는 종류입니다. 3년 전의 체리가 늘 가지고 다니던 그 녹음기니까요.
그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전원을 켜 볼 수 있는 모양입니다.
라 콕스:(전원을 켠다.)
:라가 전원 버튼을 누르면 화면이 들어옵니다.
텅 비어있는 폴더 속에서 음성메시지 한 건과 그동안 당신 앞에서 연주한 횟수 만큼의 피아노 연주 녹음 파일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라 콕스:(음성메시지를 재생한다.)
:음성메시지를 재생하면 3년 전에 녹음된 파일로, 다소 음질이 좋지 않습니다.
노이즈낀 음질 틈을 파고든 체리의 목소리가 새파란 여름의 골목길에 흩뿌려집니다.
'안녕 라. 피아노 연주 잘 들었어요.'
'눈치 챘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3년 후의 미래에서 온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살던 미래로 돌아가.'
'라와 함께했던 시간이 너무 즐거워서, 이대로 과거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날 마음을 먹었어요.'
:'지금에서야 깨닫는 거지만, 나는 이미 한 번 너를 만났던 적이 있는 것 같아.'
'과거로 향하는 구멍에 뛰어들기 직전 악기상 앞에서 널 마주쳤던 일이 있어.'
'그런데 그게 실은 '너'였던 거야. 내가 찾아 헤매길 자처했던 3년 전의….'
'신기하지 않아요? 내가 헤매기도 전에 네가 먼저 나를 만나러 와줬다는 게.'
'나는 마치 음악실의 유령처럼 그 어떤 기척도 내지 않고 숨죽인 채 라가 이곳에 이끌려 스스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정말이지 유령처럼, 질량도 형체도 존재하지 않은 채로. 무더운 과거의 여름 속에서 오롯이 목소리만으로 너를 홀려낼 생각 뿐이었던 음악실의 유령처럼…'
:음성 메시지가 종료되면 어디선가 비릿하고 싱그러운 풀냄새가 불어옵니다.
라 콕스:(녹음기를 내려두고 시선을 돌린다.)
:녹음기를 내려둔 채, 고개를 돌리면.
피아노 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당신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립니다.
붉은빛 기다란 머리카락의….
2023년, 두 번째 첫 만남.
알고 있나요? 두 사람은 괴멸해가던 일전의 미래에서도 2023년에 이 피아노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어떤 악보와 함께.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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