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실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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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무지하여 눈치 채지 못했을 뿐 실은 무언가 바뀌기 시작했던 그 날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를 것 하나 없던 오전이었음이라고.
그러니까…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베란다 창문 너머로,

코드를 꽂아두었던 유리 티포트의 주둥이에서 수증기 빠지는 소리가 납니다. 오전 댓바람부터 틀어두었던 뉴스의 주제가 전환된 것은 그 때였습니다.
라가 티포트의 전원을 끄고 이른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식탁에 앉으면, TV속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나운서의 표정은 짐짓 심각합니다. 편성된 채널의 인트로격인 멘트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본격적인 보도가 시작됩니다.
그러고보니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은데…. 문득 TV의 볼륨을 낮춰두었던 것이 떠오릅니다.
라 콕스:(리모컨을 어디에 두었더라…. 주변 두리번대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은 없는 듯. 게으르다. TV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아나운서 한 달 전 A시에서 시작된 유행성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최근 세계보건기구는 전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입자가 기이하게도 단백질 껍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DNA나 RNA등의 유전체 또한 실재하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아나운서: 더욱 특이한 점은 환자의 체내에서 발견된 바이러스 입자가 오존분자와 유사한 형식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입자를 과연 바이러스 입자라고 일컬을 수 있겠느냐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아울러 전염성이 강하다고는하지만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동물에게서 동물에게로, 곤충 내지는 공기나 물을 통해서 감염이 이루어지는 병이 아니므로 전염병이라 칭하기에도 무리가 있다는 겁니다.
일부 학자들이 지구온난화의 가속으로 인한 미지의 바이러스일 가능성을 주장하는 한편, 당국을 포함한 WHO에서는 계속해서 질병의 감염 경로를 연구중에 있습니다.

이번 전염병에 감염되면 체중이 급격히 감소하고 피부가 트는 등 사람에 따라 각종 면역력 결핍 증상을 보이지만,
대표적인 증상은 서서히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하다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이라는 기자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37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환자들은 해열제 섭취시 효과를 보였지만 일시적인 호전세를 보인뒤 다시 펄펄 끓는 열병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항간에서는 유행성 독감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던데…. 참 기묘한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라는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라 콕스:(깊은 잠? TV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연다. 전염병에 관한 소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정말 심각하다면 휴교를 했겠지…. 조금은 안일한 생각과 함께 아침 거리를 꺼내기 시작한다.)
(라 콕스는 본디 아침을 잘 챙겨 먹는 타입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바쁜 아침, 분주히 움직이고 싶진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으며, 이른 오전부터 속을 가득 채우고 싶진 않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고로 오늘의 아침 또한 무척이나 간단했을 것이다. 토스터에 식빵을 넣어 굽는다. 양면이 노릇노릇해진 빵을 꺼내 단면에 버터를 바르고, 그대로 입에 문다. 바삭거리는 소리를 뒤로한 채 커피마저 컵에 따르니, 단출한 식사의 완성이었다.)

라가 느긋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있노라면, 등교시간이 임박합니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등교하나요?
라 콕스:(천천히… 느긋하게… 서두르지 않고 느릿느릿 걸어서 등교합니다.)

곧 떨어질 것처럼 덜렁거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라 콕스:(응? 명찰 만지작.)
명찰: (툭...)

라는 느긋하게 걸어서 등교하기로 합니다. 길목에서는 화창하고 잔잔한 풍의 피아노 협주곡이 들려오네요.
라 콕스: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45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왜일까요? 피아노를 그만둔 뒤로 건반에 더 손을 댄 적은 없어도 곡을 듣는 것까지 질렸던 적은 없는데….
라 콕스: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93 |
| 판정결과: | 실패 |

넓지도 좁지도 않은 시멘트 길의 인도를 따라,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등교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씁쓸한 입맛을 돋굽니다. 여름이니까요.
정문 통과는 여유롭게 세이프. 라는 3학년 A반의 학생으로,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서면 조례 직전 출석이 막 진행되려던 참입니다.


C반 선생님이요? 여긴 A반인데요? 그러고보니 자리 배치도 어제와 묘하게 다른 것 같은 기분이?
라가 생각하고 있노라면 선생님은 도끼눈을 뜹니다. 분필이 날아오기 전에 얼른 비어있는 자리에 앉는 것이 이롭습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90 |
| 판정결과: | 실패 |

라는 한달전부터 시작된 유행성 질병으로 인해 텅텅 비어있던 열댓 개의 책걸상이 모르는 아이들의 머리통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역시 반을 잘못 들어온걸까요?
다시금 교탁으로 눈을 돌리면 출석체크 진행이 한창입니다. 앞자리나 옆자리에 앉은 친구를 살피거든 A반 학생, 라의 반 친구가 맞습니다.
아무래도 C반 아이들과 한데 섞여 있는 모양인데, 어떡할까요?
라 콕스:(이게 무슨 일이람…. 앞자리에 앉은 A반 학우에게 말을 걸어 본다.) 반 배치가 조금 바뀐 것 같은데. 담임 선생님도 그렇고.
A반 친구: 아~ 요즘 애들 전부 열 난다고 병결 장난 아니잖아. C반 애들이랑 합반 수업한댔어. 그래서 아침부터 책걸상 옮기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지각이나 할 걸.
유독 결석생 많은 반은 오늘부터 이렇게 묶어서 수업 할 건가봐. 아무리 끼리끼리 감염 안 되는 병이라지만 이 시국에 학교를 나오라니… 너무하지 않냐?
라 콕스:(뜻밖의 이득을 본 사람 됨.) 그러게 말이야. 결석자가 더 늘기 전에 휴교나 해버렸으면 좋겠네.
(잠시 낯선 얼굴 주욱 둘러본다.) 합반 수업은 오늘만 하는 건가?
A반 친구: 등교하기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고? (네 말에 킥킥 웃는다.) 아마 애들 어느정도 돌아오기 전 까지는 계속 합반일걸~

쩍 벌어지는 입 너머로 피로함이 다 느껴질 정돕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라 콕스: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17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다들 하품을 하고 있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조례 풍경이네요.
…잠시 뒤 라를 포함한 모든 학생의 출석체크가 종료됩니다.
임시 통합 담임을 맡게된 C반의 선생님이 교탁 위로 출석부를 탕탕, 두어번 두드린 뒤 말합니다.

A반 C반은 미술, 음악중에 음악 과목을 선택한 반이지? 비슷하게, 미술을 선택한 B반은 D반과 합반 수업을 진행한다는 소식이다.
A반 선생님이 유행성 질병으로 병가를 내게 되셔서, 오늘부터 내가 A반과 C반의 통합 임시 담임을 맡게 됐고. 참고로 우리 반은 지금부터 A-1반이다. 이상, 조례 끝. 다들 조용히 1교시 준비하도록.

몇몇 아이들의 얼굴에 불만의 기색이 내비쳐지는 한편, 원래 알던 사이인지 옆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아이들도 눈에 띕니다.
바뀐 임시 시간표에 따르면 1교시는 수학이라고 하네요. 비어있던 자리가 라의 책상이었던 모양인지 책상 사물함에 손을 넣어보면 라의 이름이 적힌 교과서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

종이 치기도 전에 위 아래로 울려대는 아이들의 발소리는 병마가 한 바탕 휩쓸고 간 지금, 이전보다 현저히 작습니다.
오늘의 점심메뉴나 느긋하게 확인해볼까요?
아몬드밀크와 연어샐러드, 양송이 스프, 그리고 마늘빵과 그릴드비프 파니니네요.
당신이 좋아하는 메뉴가 있나요?
라 콕스:(그리 티 나진 않겠지만 표정이 밝다. 점심 메뉴가 마음에 들었던 탓. 스프나 빵 종류는 늘 반갑지.)

스프와 빵을 좋아한다면 더 받으러 가도 좋겠어요. 아무래도 학생들의 인기 메뉴는 아몬드밀크와 파니니같습니다.
점심을 해결하고 교실로 돌아와 바뀐 시간표를 재차 확인하면, 5교시는 음악 수업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교실 칠판에 노란색 분필로 작성된 커다란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5교시 음악이래~! 교과서 챙겨서 음악실로 이동할 것!'

라는 교과서를 어디에 두었나요?
라 콕스:(사물함을 열어 구석진 곳에 놓아둔 교과서를 꺼낸다.)

…그런데 어쩐지 사용감이 영 낯익지 못합니다.
라 콕스:(음? 교과서 요리조리 살핀다. 반 친구와 책이 바뀌기라도 했나?)
라 콕스: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90 |
| 판정결과: | 실패 |

잉크가 번져있어 이름을 제외한 성씨만 확인됩니다. '3학년 C반, Cherry Ash.'
애쉬? 들어본 적 없는 성씨에요. 명확한 정보라고는 교과서의 주인이 C반의 학생이라는 점 뿐이고요.
오늘부터 전체 합반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으니, 이 교과서의 주인도 5교시의 음악실에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갖다줘도 나쁘지 않겠네요.
3학년 A반은 3층, 음악실은 5층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최근 엘리베이터 고장 문제로 여지껏 수리가 미뤄지고 있으니 하는 수 없이 계단을 이용해 올라가도록 해요.
라 콕스:(이게 왜 내 사물함에 들어 있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교과서를 챙긴다. 느릿느릿 계단을 올라 음악실로 향한다.)

주욱 시원하게 뻗은 복도 창 너머로 초록이 우거지고 청음이 기승을 부립니다. 여름이 불시에 목구멍에 들이닥친 듯한 기분.
그 막연함을 가르고 어디선가 나지막한 악기 소리가 들려옵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44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당연하게도 저 복도 끝에 자리하고 있는 음악실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2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26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상대는 템포와 리듬감 할 것 없이 악상의 표현이나 곡의 이해도 또한 뛰어난 편입니다.
연주자는… 고등학생이 아니지 않을까요? 라 알기로 이 학교에 이만큼이나 피아노를 잘 치는 학생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먼저 도착한 음악 선생님일지도 몰라요.
라 콕스:(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겨 본다. 창 너머로 연주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까?)

피아노 연주자는요? 당연하게도 피아노 연주는 이미 끊긴지 오래네요.
아쉬움에 젖어있을 쯤, 음악실 어딘가에서 아이들의 대화가 들려옵니다.
학생A: 근데 누가 피아노 연주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학생B: 그랬나? 아, 그러고보니 이 학교 원래 음악실에 귀신 나온다고 했어. 그 소문이 진짠가 봐!
학생A: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정말 귀신같은 걸 믿어?
학생B: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니까, 요즘 애들 없는 시간에 간간이 5층 음악실에서 피아노 연주 소리 난다고. 왜, 나 작년에 클래식 동아리에 아는 선배가 있었잖아. 그 선배가 축제 기간에 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는데, 달밤에 피아노 소리가 나서 눈 딱 감고 음악실 문을 열어봤는데 아무도 없었다는 거야!
학생A: 헛소리! 됐고, 이제 그만 앉아. 벌건 대낮부터 웬 귀신 얘기야?
학생B: 진짜라니까!

선생님도 아닌 모양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였을까요?
그 전에 왜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 거지…. 정말 귀신이었나? 됐고, 신경 끄자. …그런데도 신경이 쓰입니다.
때마침 수업 종이 울립니다. 마흔 명에 육박하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음악실을 서성이다 각자 자리를 찾아 착석합니다.
라 또한 적당히 빈 자리에 몸을 앉히고 선생님을 기다리다보면… 톡톡.
누군가 어깨를 두드립니다.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면… 응? 모르는 얼굴입니다.

그 인상을 바라보고 있노라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이 묻습니다.

라 콕스:(붉은 점 흘긋 바라보다가도 옆자리를 치워 낸다. 올려둔 것도 없긴 했다마는. 책상 말끔히 비운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고, 제 책상 위로는 음악책을 올려 둔다. 텅 빈 책상에 책 외의 것은 올려두지 않았으니 모서리에 적힌 '─── Ash' 라는 이름 또한 고스란히 드러났을 테다.) C반, 맞지?

라 콕스:(또다시 고개 한 번 끄덕였다.) A반이라면 얼굴 정도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처음 보는 얼굴이니 C반일 거라고 생각했어. 이쪽은 라 콕스라고 하는데, 너는?


선이 뚜렷한 손가락의 둘레를 따라 채워진 엄지의 검은색 반지의 테가 단정하게 빛을 반사합니다.
시중에 저런 디자인의 반지를 팔던가? 꼭 처음 접해 생소한 이계의 보석처럼 느껴집니다.

라 콕스:음……. (사실이니 할 말이 없다.) 그런 편이지…. (이후 짧은 침묵. 말없이 교과서를 받더니, 이윽고 제 책상 위에 올려둔 교과서를 들어 내민다.) 애쉬라고 했지? 네 책이 내 사물함에 들어 있었어. 어쩌다 뒤바뀐 걸까.


뭐… 오전에 책걸상을 옮겼다고 했으니, 그 틈에 두 사람의 자리가 섞였을 법도 합니다. 아니면 정말 유령의 짓일지도 모르겠네요!
라 콕스:(그러고 보니 책걸상을 옮겼다고 했었나. 그런 것치고는 다른 교과서들은 멀쩡했던 것 같은데. 생각과 함께 말이 이어진다. 다소 짓궂은 어조.) 내가 라 콕스인 줄은 어떻게 알고? 오늘은 명찰도 달아두지 않았는걸.


의문만을 남긴채 대화는 흐지부지 종결되고 맙니다.

유럽 문명사에서 지칭되는 바로크 시대란 보통 17세기를 가리킨다는 거, 저번 시간에 먼저 이야기 했었지? 17세기의 예술을 가리킨다고….

점심 식사 직후인지라 어마어마한 식곤증이 밀려오네요. 벌써부터 꾸벅꾸벅 조는 등 시동을 걸고 있는 아이들의 수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78p를 펼치기 위해 교과서 페이지를 넘기던 라는… 어라? 60p쯤에서 전에 본 적 없던 작곡가의 이름을 발견합니다.
소제목은 'A에 대하여'. 원래 음악책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던가요?
A라는 작곡가가 존재했던가요, 과거에 나름 오래간 피아노를 전공했던 자신이 교과서에 실릴 만큼 이름난 작곡가를 모를리 없는데…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듭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49/24/9 |
| 굴림: | 84 |
| 판정결과: | 실패 |

라 콕스: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39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실제로 <겨울이 흘린 눈물>의 원본을 보았다는 예술가의 증언에 따르면 악보 <겨울이 흘린 눈물>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특이한 인장이 찍혀 있었다고 합니다. 형태가 무척 조악했으며 세월에 바래 누렇게 떠있었다고요.
달리 흥미로운 내용은 아닙니다. 아마 작곡가 A의 자필 사인이었을 겁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70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음악에 문외한인 인물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매혹적인 악보였다는 뜬소문이 내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그런데 그게 도둑을 맞았었나봅니다. 심지어 나머지 한 곡은 분실되었고요.
라 콕스:(그러고 보니 이런 일이 있었지…. 그런데, 이 작곡가가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가? 괜히 몇 차례 책을 더 뒤적이다가도 놓는다.)

잘버티는가 싶던 옆자리의 체리마저도 꾸벅꾸벅 졸더니, 이내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버리네요.
말랑한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에 시선이 갔다가도 쉬이 흩어집니다.
음악실의 에어컨이 고장난 걸까요… 너무나 덥습니다. 바깥에서는 매미가 울고 풀벌레가 나무를 깁니다.
방충망에 달라붙어 있던 나비 하나가 창틀을 타고 오르다 이내 나뭇잎 너머로 자취를 감춥니다. 여름이네요.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염증이 날만큼 물러 터졌는데 시간은 너무나도 착실히 흐릅니다.
책가방을 싸거나 집에 갈 준비를 서두르며 종례를 맞이하고 있는데…


각자 떠들던 아이들의 시선이 당신의 자리에 고였다가도 빠르게 흩어집니다.
듣자하니 임시 출석부가 음악실에 있는 것 같다며, A, C, 두 반 모두 반장이 결석해 없는 고로 라가 음악실에서 출석부를 들고 교무실에 가져다둔 뒤에 하교하라는 심부름입니다.
반문하고 싶겠지만, 선생님은 라의 책상 위에 음악실 열쇠를 내려두고 종례 선언을 끝마친 뒤 교무실로 사라집니다.
하는 수 없이 음악실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가야겠네요.
라 콕스:(난 또 내가 모르는 사이 무슨 사고라도 친 줄 알았다. 별것 아닌 심부름이라 다행이지. 열쇠를 챙겨 음악실로 향한다.)

그 사이로 오후 다섯 시의 비산하는 빛줄기가 묘연히 바닥을 적시고 있고요.
누군가 음악실에 잔류해 있는 걸까요? 마지막으로 음악실을 사용했던 다른 반의 주번이 잠그는 일을 깜빡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유추하고 있노라면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작달만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곡은… 익히 들어왔기에 잘 알 수밖에 없는 곡입니다. 드뷔시의 달빛.
누구인지 모를 연주자의 손끝에 의거하여 피아노 독주가 막 시작되는 찰나입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23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그러고보니 며칠 전부터였어요.
종례를 할 때면 계단은 한적했고 꽤 아득히 느껴지는 상층에서는 늘 정체 모를 누군가의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려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상대는 어쩌면 오늘 음악 시간 시작 전에 문 너머에 있었던 그 사람일지도 모르죠.
라 콕스:(발소리를 죽여 다가선다. 문틈 사이로 연주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을까?)

문은 여전히 열려있고 연주는 거리낌이 없습니다. 문틈 너머로 누군가가 있는지 확인하려 하면… 잘 보이지 않네요.
페달을 밟는 하얀 실내화와 교복바지가 보입니다.
라 콕스:(그대로 문에 기댄 채 눈을 감는다. 마지막 음이 울리기 전까지는 문을 열지 않을 심산이었다. 음악이 좋아서? 새삼스레 감상에 빠졌던 탓에? 연주자가 몰입한 것 같아서? 달빛은 짧은 곡이니까…. 부러 변명거리를 늘어놓는다. 음악과 멀어지고 싶은 것인지, 다시금 가까워지고 싶은 것인지…. 상념에 빠질 찰나 곡이 끝으로 치닫는다. 마지막 프레이즈가 연주되고, 페달음마저 사라질 무렵에야 눈을 뜬다. 이어 음악실 문을 두어 번 노크하고 문을 연다.)

산발하는 태양 빛은 이따금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구석이 있습니다.
눈부신 빛에 적응한 시야 너머로 들어오는 것은 예의 그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 투명한 햇빛을 눈부시게 반사해 고아한 빛을 뿜는 악기 너머 건반을 다루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오늘 음악 시간에 함께 수업을 듣던 C반의 체리입니다. 막연히 듣기에도 굉장히 탁월한 실력입니다.
청명한 수풀이 푸르른 가운데 녹색으로 물든 빛이 등 뒤를 적시고 있습니다. 순간 넋이 나갈 뻔했습니다.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이 그만 두어버린 피아노를 정성껏 연주하는 체리를 바라보는 라의 심정은 어떤가요?

손가락이 건반에서 떨어져 나오면, 그 옆에 세워두었던 녹음기를 멈추고, 주머니에 집어넣습니다. 아, 눈이 마주치면…

라 콕스:방금 왔어. 4마디 즈음 연주할 때였나. (처음부터 다 들었단 뜻.) 듣기 좋던걸. 전공이야?

라 콕스:(재미있던가? 잘 모르겠다.) 녹음하고 있었잖아. 방해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괜히 주변 살피는 체를 했다. 찾는 것은 교사의 책상에 있을 게 뻔한데도.) 출석부를 가지러 왔어. 담임 선생님 심부름으로. 금방 갈 거니까 이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라 콕스:있지 않을까. 한번 살펴보지 그래. (권유와 동시에 한 발자국 다가선다. 그렇다. 본다면 같이 볼 셈이다.)

라 콕스:(잘 나왔다 1 음... 2 1)
글쎄…. 비슷하게 나온 것 같은데. (그런 쪽으로는 관심이 없어서. 덧붙이며 슬금슬금 옆에 붙는다.) 너는?

…… ……. 오! ………(그제서야 손을 치운다.) 어때요?(???)
라 콕스:(출석부의 사진을 한 번 보고, 체리 애쉬를 한 번 보고… 다시 출석부의 사진을 두 번 보고, 체리 애쉬를 두 번 본다. 영문 모를 침묵이 길어진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순한 장난이었다.)

라 콕스:(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고 작게 웃는다. 잘게 떨리는 어깨가 멎을 무렵에야 말을 잇는다.) 장난이야, 장난. 잘 나왔어. 네 모습 그대로인걸. 체리 애쉬라고 했지. 음악실엔 자주 오니?

라 콕스:음악실에 유령이 있다고 해서. 한 번쯤 본 적은 없는지 물으려고 했지. (무던히 답하면서도 지갑을 꺼낸다. 라 콕스의 성정상 타인과─게다가 통성명을 한 지 하루도 되지 않은 상대라면 더욱이!─ 소지품을, 더군다나 사진을 교환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거부를 표하기도 전에 사진을 찾아 내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희한한 일이었다. 모든 게 햇볕 탓이다. 날씨의 탓이고, 여름의 탓이다.)

거든요. (왜그냥갓지요?)
(제 사진을 네게 건네곤 네 것을 받아갔다.) 와~ 신난다! 애들은 전혀 바꿔주질 않았거든요. 잘 못나왔으면 좀 어떤지. 보여주기 싫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아! 그래서 그런가? (즐거운 얼굴로 교환한 사진을 바라보다가, 눈을 맞춘다.) 라도, 피아노 치죠?
라 콕스:(프레임 너머의 얼굴을 곁눈질한다. 사진, 이상하게 나왔네. 웃는 게 훨씬 나아. 따위의 생각을 하며 받은 것을 제 지갑에 밀어 넣는다. 타인의 사진을 지갑에 보관한다니! 연인 관계에나 할 법한 행위였음에도 자각이 없다. 어쩌면 인지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쳤었지. 지금은 그만뒀어. 왜?

라 콕스:다른 데에 재미를 붙였거든. 그래도 듣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네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도와줄 수 있어.

라 콕스:그렇긴 한데. (어째서 네 표정이 굳었던 건지. 의문은 밀어 삼킨 채 고개를 끄덕인다.) 유령 치곤 이른 시간인걸. (가벼운 농.) 그래, 내일 보자. 기대하고 있을게.

라 콕스:같이 가려고?

라 콕스:더 연습하다 갈 줄 알았지. 끝났다면 같이 가자.


체리의 부탁대로 라는 7시에 맞추어 등교를 하게 됩니다.
나뭇잎 사이를 걸러 들어온 햇빛이 묘하게 어슴푸레하게 느껴지는 오전, 공기는 제법 서늘하고 묶어놓지 않은 커튼에 바람이 나부낍니다.
암막 커튼과 그 위에 이중으로 쳐놓은 쉬폰 커튼이 펄럭일 때마다 텅 빈 사각형의 교실 위로 유령의 몸짓같은 그림자가 일렁이길 반복합니다.
오늘은 라가 가장 빨리 등교한 걸까요? 책가방을 내려놓고 교실을 둘러보면…
텅 빈 서른 대여섯 개의 책상중 유일하게 책가방이 올라와 있는 책상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라 콕스:(책가방이 올라와 있는 책상에 시선을 둔다.)

왼쪽 상단에는 반과 번호를 묶어놓은 학번과 자리 주인의 이름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군요.
라 콕스:(이름 흘긋 본다.)

라 콕스:(음…… 책가방도 슬쩍 본다.)

가볍게 살펴보면, 네 다섯권 정도의 얇은 악보집들과 필기 노트, 교과서 몇 권, 필통따위의 학용품들, 손목 아대 등이 있네요.
…주제와 동떨어진 물건이 중간중간 끼어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범해 보입니다.
라 콕스:(혹시나… 뭔갈 놔두고 가지는 않았는지…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본다.)
라 콕스: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84 |
| 판정결과: | 실패 |

꽤 오래 된 악보집인 모양인지 표지만 들여다보아도 꼬질꼬질한데다 기스가 잔뜩 나있습니다.
라 콕스:(곡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을까?)

라 콕스:(슬쩍… 펼쳐본다.)

라 콕스:
| 기준치: | 48/24/9 |
| 굴림: | 83 |
| 판정결과: | 실패 |

악보를 펼쳐보면, 음표가 수놓인 모양을 미루어 생초면의 작품입니다. 체리는 작곡도 겸하고 있는 걸까요?
아울러 1p 상단에 뉴스 헤드라인처럼 자필로 작성되어 있는 곡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건… 이탈리아어같네요.
이름을 읽어보려면,
라 콕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10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곡명은… <여름의 유령> 이네요.
라 콕스: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2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A는 16세기의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로 <겨울이 흘린 눈물>과 곡명이 알려지지 않은 의문의 계절 환상곡을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 했던가?
도둑 맞아 곡명은 미궁 속에 숨어 있다던 계절 환상곡이 마음에 걸립니다.
만약 <여름의 유령>이 정말 300년 이상 된 곡이라면, <겨울이 흘린 눈물>과의 작곡 시기가 얼추 맞물리겠습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47/23/9 |
| 굴림: | 45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단언할 수 없으나 이 장면은 분명 언젠가 본 적이 있습니다. 혹은 경험했거나요.
데자뷰란 본디 뜬금없는 현상이긴 합니다만,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불쾌하다기보다는, 지금 이 장소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
라 콕스:
| 기준치: | 47/23/9 |
| 굴림: | 77 |
| 판정결과: | 실패 |

체리의 악보를 살펴보고 있으면, 교실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7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립니다.
시계를 확인하면 시침과 분침은 7을 가리키고 있고 초침은 막 숫자 5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약속 시간인 오전 7시입니다.
찜찜하다기보단 의뭉스러운 상태가 이어집니다. 우선은 더 늦기 전에 음악실로 올라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마치 그 누구도 손대지 않은 것처럼 음악실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라 콕스:(어제처럼 음악실 문을 두어 번 노크한 뒤 문을 연다.)

음악실로 들어서면 어제와 같이 환하고 눈부신 여름의 햇살이 라의 전신을 덮칩니다.
이름난 과거 음악가들의 초상화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방음벽 어귀에 붙어 있고, 교탁 너머의 칠판에는 분필 가루가 얕게 묻어나긴 했으나 그 나름대로 깨끗하고 푸르기만 합니다.
오래된 악기만이 머금은 특유의 냄새는 익숙한 종류여서, 늘 이 냄새를 기억하고 있던 심장만이 조용히 두방망이질 칩니다.
창틀 너머로 풀잎의 싱그럽고도 비릿한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콧잔등을 건드리면 그제야 정신이 드는 것입니다.
그 단정하고 고요한 음악실 가운데 그랜드피아노 앞에는 약속처럼 체리가 앉아 있습니다. 체리는 뚜껑이 닫힌 피아노에 팔꿈치를 기댄 채 머리를 지탱하고 있네요.

비단 오전의 하얀 백색광선 탓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지나갑니다.
라 콕스:체리? 왜 그래? (서둘러 다가선다. 당신의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대기도 했다. 열이 나나?)


라 콕스:(고개를 들면, 볼에 가져다 대었던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그런 것보다도…. 너, 아프잖아. 열이 있는데. 괜찮은 거 맞아?

이 곡들 말예요, 어떤 것 같아요? 라가 좋아하는 노래도 있어요?
라 콕스:(말썽꾸러기 동생 보는 듯한 눈빛…. 작게 한숨을 쉰다.) 약속한 거야. 정말 아프면 꼭 쉬기.
(이어 악보집을 바라본다.) 글쎄…. 특별히 좋아하는 건. (없다고 답하려 했다. 문득 시야 속으로 들어 온 악보에 말을 멈추어 내더니, 손가락을 들어 짚는다. 바흐의 칸타타 147번.) 이건 꽤 좋아했었지.

라 콕스:가끔 따라가는 정도지. 부모님이 신자시거든. (그마저도 피아노를 관둔 뒤에는 걸음 한 적이 없었다. 신앙은 없고, 예배는 지루했다. 앞으로도 자신이 종교를 가질 일은 없겠다 싶을 정도로.) 너는?

라 콕스: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겠네. (그리 대꾸하면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며 단정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체리 애쉬는 여름을 닮은 사람이었으며, 라 콕스는 여름을 잊을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너만 괜찮다면 한 번 쳐주지 않을래. 네가 연주하는 걸 듣고 싶어.

(짧은 심호흡을 시작으로, 피아노의 현을 타고 공기 중을 자유롭게 누비는 유려한 연주가 들려온다. 정갈한 손끝이 자유로이 건반을 뛰어올랐고, 독특하지만 경박하지 않은 기교가 훌륭한 실력에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꼭 아지랑이처럼 투명한… * 커튼이 풍등처럼 흔들리고, 비행기의 날개소리가 울리면 그의 손이 떨어져 나온다.) …어땠어요?
라 콕스:(귀에 익은 선율이 음악실을 가득 메운다. 기실 라 콕스는 음악에 무료를 느끼던 참이었다. 그랬기에 감상조차 멀리하였고 좋아하던 곡마저 좋아했었다며 표현하지 않았던가. 다만, 어째서인지 이 순간만큼은 음악이 싫지 않아서….)
…좋았어, 전부. (이리 답해버리고야 만다. 열없는 진심을 여름에 담아, 당신에게로.)
준비하고 있는 곡이 있다고 했지. 그것도 듣고 싶은데. 연주해줄 수 있을까?

라 콕스:(느릿느릿 눈을 깜박인다. 준비하고 있는 연주가 아니라, 준비하고 있는 곡이 있다고 했잖아. 무얼 숨기고 있기라도 한 건지.) 무슨 연주이길래? 콩쿠르를 준비 중인 거라면, 곡은 바꾸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요강은 확인해 본 거야? (갑자기 현실적인 걱정이나 하며…)


일말의 소음과 함께 간이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악보집들이 바닥에 우수수 쏟아져 섞입니다.
체리는 깜짝 놀라 흩어진 악보집들을 주섬주섬 줍기 시작하네요. 낱장의 악보가 발에 채입니다.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진 내용물들을 살피니 체리가 보여준 악보를 제외하고 나서도 그 수가 꽤 많습니다.
훑어보면 체리의 이름이 적혀있는 책도 눈에 들어오지만 구매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포장조차 뜯지 않은 악보집도 더러 보입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44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뒤집혀 있던 탓에 곡명을 읽지는 못했지만… 라는 악보집의 어귀에 자리하고 있던 어떤 인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주 찰나였지만 <은은하게 빛나던 모양새가 아주 특이한 문양> 이었습니다.
일견 누군가의 자필 사인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라 콕스:(곁에 쪼그리고 앉더니 같이 악보집을 줍기 시작했다. 포장조차 뜯지 않은 악보집도, 낡은 악보집도 모두 주워 내민다.) 이걸 다 들고 다니는 거야?

라 콕스:(대답 대신 바닥에 떨어진 낱장의 악보를 주워 든다. 인쇄면을 면면히 훑는가 싶다가도,) 그러게. 전부 악보가 아닌 모양이야. 여기, 네 시험지도 섞여 있네.

라 콕스:응, 농담이야. (시험지로 추정되는 종이를 살피면, 평범한 악보가 보였을 것이다. 라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웃음기 어린 어조.) 오늘 말이야, 늦잠이라도 잔 거니? (당신이 주운 악보며 악보집들을 가리킨다.) 눈에 보이는 건 다 집어 온 느낌이라.

라 콕스:(깜빡 늦을 뻔했다는 소리군….) 늦어도 신경 안 썼을 거야. 난 기다리는 것에 익숙하거든. 그것보다도…. 떨어진 것 중에 굉장히 낡은 악보집이 있던데. 그건 무슨 곡이야?

라 콕스:누구도? (의문을 내비쳤으나 그뿐이다.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통성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동급생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너는 악보만 챙기고 있어. 몸도 안 좋잖아.

라 콕스:(커튼을 전부 내린 뒤 당신의 곁에 섰다.) 아니, 처음 듣는 얘기야. 그런 괴담도 있었나?

라 콕스:(이 음악실, 터가 안 좋은가….)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너도 조심해야겠네. 나보다는 네가 더 음악실에 올 일이 많을 거 아냐. 놔두고 가는 것 없지? 해가 진 뒤에 찾으러 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 꼼꼼하게 챙겨야지.

라 콕스: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58 |
| 판정결과: | 실패 |

닫히는 문틈 사이로 시선이 날아든 것은 잠깐이었습니다.
암막커튼 바깥으로 빛이 차단되어 삽시간에 어두운 칠흑이 내려앉은 음악실이 유독 기이하게 빛났던 것도 같습니다.
귀신 이야기를 들은 직후여서일까요? 찝찝한 기분이 듭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46/23/9 |
| 굴림: | 69 |
| 판정결과: | 실패 |
(정말 터가 안 좋나 보군…….)

라 콕스:본 것 같아…. (이런 말이나.) 어서 나가자.

점심 시간이 종료되고 또 다시 식곤증이 학생들의 수면욕을 지배하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오후 1시 20분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은 5교시. 물리 시간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있고 불어오는 바람의 빛은 투명합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자장가 같고, 내리쬐는 햇살과 돌아가는 에어컨 소리가 기분이 좋아 졸음만 쏟아집니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속도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어허, 왜 다들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어?
적어도 강한 중력이 시공간을 휘게 한다는 이야기는 기억하고 있겠지? 내가 그렇게 강조했는데. 블랙홀은 시공간에 구멍을 뚫는다고 별표까지 달아줬을 거야. 교과서 확인해 봐.


다들 어렸을 적에 시간 여행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 있지? 실제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의 경우 광속에 가까워질 수록 시간이 느려지니까, 빛보다 빨리 나아가면 시간이 거꾸로 흐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
하지만 빛보다 빠른 물질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지? 2011년에 유럽 입자물리 연구소 CERN에서 초광속입자 해프닝이 있기도 했는데, 궁금한 녀석은 학교 끝나고 찾아보도록 해라.
공부를 제대로 한 녀석들은 눈치를 챘겠지만, 시간과 공간이 속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빛보다 빠르게 나아갈 경우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게 아니라 허수의 방향으로 흘러가버린다.
즉,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을 위해선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소리지. 우주 끈이나 웜홀을 사용한다거나. 하지만 웜홀이 그저 가상의 이론 상태일 뿐인 지금, 시간여행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라 콕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50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5교시 수업은 다시 본래의 활기를 되찾습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7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22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라 콕스:(쪽지의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더듬어보다, 이윽고 쪽지를 잘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별달리 하는 일도 없으니 당신에게 시간쯤 내어주는 것은 어렵지도 않다.)

바빠요?
라 콕스:(대답을 원했던 거였군…. 시선 마주했다간 선생님께 덜미를 잡힐 것이 뻔하니 꿋꿋하게 교과서─정확히는 교과서 위의 쪽지─만을 바라보았다. 이어 필기를 하는 척 메모지를 꺼내 답장을 끼적였다.)
[아니. 방과 후에 보자.]
[그런데 체리, 지금은 수업 시간이야. 집중해야지.]

라 콕스:어제 늦게 잤어?

라 콕스:뭐가 다른데? 수업이 지루한가?

라 콕스:난 괜찮아. 수업도 꽤 재밌고. 시간 여행 얘기도 해주셨잖아.

라 콕스:아니, 성적은 편차가 심해. 관심 있는 것만 보거든. 넌 어떻길래? 아침에 했던 농담을 생각하면…. (부러 뒷말은 적지 않았다.)

라 콕스:문학이나 서양미술사 같은 것…. 왜 안 알려줘?



선생님은 교과서로 교탁을 내리치다가도, 못 이기는 척 5분 전에 끝내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라 콕스:(어쩔 수 없단 듯 웃는다.) 그래도 아직 수업 안 끝났어. 일어나서 집중해야지.

라 콕스:좋아했었어.
(샤프 끝으로 메모지 톡톡 두드리다가도, 이어 적는다.)
싫어하는 건 아냐. 그런데, 조금 지루해.

라 콕스:그런 것 같기도…. 넌 음악을 왜 좋아하는데?

라 콕스:(재미있던가? 쉽사리 답을 적지 못한다. 너와 만난 뒤부터는 계속 고민하게 돼.) 지겹진 않아? 결국은 반복이잖아.

라 콕스:(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곱씹는 찰나 수업이 끝난 모양이었다. 집중하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은 것은 자신인데,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것 또한 자신인 듯했다. 책상 위로 늘어진 붉은 머리카락에 시선을 두었다. 기어이 그 끝자락을 잡아 문질러 보기도 했다.)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자 둬.

학교가 끝나고, 두 사람은 함께 하교합니다. 해 지는 속도가 느린 여름인지라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는 있음에도 쨍한 햇빛이 어깨를 데웁니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로 배경을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연기처럼 자리합니다.

라 콕스:시간이라면 많아. 그런데, 들를 곳이 어디길래?

라 콕스:(물끄러미… 보다가 툭 묻는다.) 체리, 교제 중인 사람은 없는 거지?

라 콕스:오해받을 만한 상황이겠다 싶어서….


상가 거리는 이 근방에서 가장 훌륭한 발전이 이루어진 곳으로 특히 인근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습니다.
몇 달 전에 비해 돌아다니는 유동객의 수는 눈에 띌 만큼 줄었지만, 그런대로 여전히 붐비는 장소네요.
사거리에 접어들자 때마침 초록불이 점등합니다. 간만에 나온 거리의 풍경이지만 무언가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부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흐릿하나마 기억을 되살려 근처 상점가별 위치를 도식화시켜봅니다. 왼쪽 인도로 접어들면 뭐가 있더라….
[식당][카페][영화관][백화점][서점] 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라 콕스:(서점 먼저 둘러보자고 했다간 원망 어린 눈초리를 받을 것만 같다….) 바로 밥을 먹기엔 시간이 이르니까, 백화점 먼저 들르자.

라 콕스:좋아하는 편이지. (옷 외의 것들은 말이야…. 뒷말은 삼켜 낸다. 그렇다. 라는 치장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체리 애쉬에게는 관심을 두었으니, 이마저도 즐거울 것.) 넌…. 왠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아. 좋아하지?

라 콕스:(느릿느릿 뒤쫓는다. 3층으로 향했다.)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오르면, 의류와 신발, 악세사리를 판매하는 매장이 즐비해있습니다.

라 콕스:(이거, 굉장히…….) ……맞추고 싶어?

라 콕스:네가 바란다면.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라 콕스:네가 바라는 게 곧 내가 바라는 일이라는 소리야. 싫었다면 널 따라오지도 않았을걸. (그러고 보면, 방과 후에 동급생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간만이다 싶다. 아니, 어쩌면 처음일지도…. 그야, 사람을 만나는 만큼 자신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지 않나. 그만큼 책을 읽는 것도, 바둑을 두는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라 콕스:하지만…. 좋은 걸 좋다고 했을 뿐인데. (사소한 반론. 입속말은 금세 사라졌다. 제 목 아래에 셔츠가 대어졌던 탓.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급히 덧붙인다. 흡사 변명을 늘어놓는 모양새. 아무래도 당신의 말을 신경 쓰는 것 같다.) 셔츠 종류는 평소에도 좋아하던 거야. 즐겨 입는 거기도 하고. 넌 어떤데? 네가 입을 거기도 하니까, 네 취향도 고려해야지.

라 콕스:글쎄…. (모든 게 처음이었으니 알 턱 없다. 친밀한 사이의 친구들은 누구나 이런 과정을 거친단 말인가? 나는 세상을 쉽게만 살아왔던 걸까…. 따위의 생각을 하기도 했다. 보랏빛 눈이 분주하게도 움직이며 옷들을 훑는다. 고민 끝에 집어 든 것은 얇은 재질의 베이지색 가디건이었다. 여름날, 갑자기 서늘해진 밤에 걸치면 좋을 법한 것.) 네게는 이쪽이 더 어울릴 것 같기도…. (그리 말하며 분홍색을 흘긋거린다.)

라 콕스:(이런 게 있었나? 싶은 눈으로 그림을 훑는 것도 잠시, 문득 시선을 당신에게로 옮겨 낸다.) 응? 체리… 싫어해? (그 질문.)

라 콕스:(싫어하는군….) 체리, 취향이 아닌 건 그렇다고 말해도 돼. 내게 다 맞춰주려고 할 필요는 없어. (순순히 밀리며… 그리 말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머리 끈이나 팔찌, 반지 등 각종 장신구를 늘어놓은 진열대가 보인다. 우정 팔찌 얘기를 했었지. 진열된 것을 살펴보려는 찰나 팔찌보다도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홀린 듯 그 앞에서 물건을 집어 든다. 손 위로 검은 리본이 걸쳐졌다. 조금은 충동 어린 말을 뱉기도 했다.) 나도 머리 끈을 바꿔 볼까….

라 콕스:(라 콕스는 살아오며 상대방의 말을 흘리면 흘렸지, 놓쳐본 적은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분명 이름을 불린 것 같은데, 그 뒤로 말이 이어졌던 것도 같은데. 퍼뜩 눈을 뜨니 들려오는 것은 …해요? 라는 의문형 어미뿐이다. 그래, 체리 애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예외가 되어가고 있다. 둘린 팔을 떼어내지 않는 것도 그 맥락일 터다.) …미안. 제대로 못 들었어. 다시 한번 말해줄래?

라 콕스:아…. 응, 맞아. 그러긴 했지. (리본이 아니라 닿아오는 온기에 집중한 것일 테지만.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리본을 바라보는 척, 허리에 둘린 희멀건 팔을 바라본다.) 좋아질 것 같아. 잘 묶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가르쳐줄래?

라 콕스:(헛기침했다.) 티 났어?

라 콕스:……그럼 이걸로. (능청은커녕 열없는 대답을 내놓고야 만다. 검은 리본을 내려두고 흰 리본을 쥔다. 그대로 걸음을 재촉해 옆 진열대의 앞에 선다. 전시된 팔찌를 구경하는 척, 고개를 떨구었으나 아무래도 귀 끝이 붉다.)

라 콕스:네가 좋다면, 나도 좋으니까…. (읊조림에 가까운 말. 전하고자 뱉은 말이 아니었으므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들어본 적은 있어. 끊어질 때까지 차고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왜, 관심 있어?

라 콕스:(참으로 이상한 하루다. 평소였다면 신도 들어주지 않는 기도를 팔찌 따위가 이루어줄 리 없다며 관심을 끊었을 것이다. 다만,) 네가 보라색을 좋아했던가? (지금의 라 콕스를 보라. 사족을 덧붙이기는커녕 제 몫의 붉은색 팔찌를 고르는 꼴이란.)

라 콕스:(말을 잃는다. 무어라 대꾸하면 좋을지 떠올리지 못한 탓이다. 수도 없이 넘긴 책장이 무용할 정도로 생각나는 문장이 없다. 귀가하면 책을 좀 더 읽어봐야겠다 싶다. 앞으로 며칠간은 도서관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말까,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당신과 대화할 일 줄이고 싶진 않으니 실행에 옮기진 않을 테지만.) 그땐 다른 걸 맞추면 되지. 두 번째로 맞추는 건 끊어지지 않는 것으로 골라 보자.

라 콕스:그래, 그때 또 구경하러 오자. (주섬주섬 고른 것들의 값을 치른다. 곱게 포장된 종이 가방을 든 채 당신을 바라보았다.) 배고프진 않고? 슬슬 식사하러 갈까.

요즘 SNS에서 핫하다는 소문의 그 맛집입니다. 막 이름이 뜨기 시작한 체인점이라는데, 듣기로는 양식을 취급한다고 하던가요?
라 콕스: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37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단 5분만 기다리면 입장이 가능하다는 직원의 안내가 이어집니다.

라 콕스:그래? 맛있는 곳인가 봐. 예전에도 와 본 적 있어?


직원은 두 사람을 창가쪽 자리로 안내한 뒤 메뉴판을 건네주고 사라집니다. 학생들이 먹기엔 다소 부담스러워 보이지만…. 라에겐 어떤가요?
라 콕스:(평소 바깥을 나돌아다니지 않으니 돈은 차곡차곡 쌓여만 갔을 것이다…. 문제없다!)

라 콕스:네가 말한 것들 전부 하나씩 시켜보는 건? (반면 이쪽은 태평하기만 하다. 무얼 시켜도 상관이 없는 듯….) 두 사람이니 메뉴 세 개 정돈 먹을 수 있을 거야. 양이 많더라도 부족한 것보단 낫지.

라 콕스:거기까진 생각해본 적이 없었네…. (이어 짧은 침묵. 메뉴판을 당신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난 가리는 게 없으니 네가 먹고 싶은 걸 먹어보자.

라 콕스:(고개 끄덕끄덕.) 음료는?

라 콕스:그래. (메뉴는 체리가 골랐으니 주문은 이쪽이 할 셈이다. 직원을 불러 골라 둔 메뉴들을 주문했다.) 예전에도 여길 왔다고 했지? 그땐 누구와 같이 온 거야?

라 콕스:로봇처럼 말하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어?

라 콕스:(의아한 낯이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기대되네. 식사한 뒤엔 카페를 들러 보고 싶은데… 잘 아는 곳이 있다면 추천해줄 수 있어? 평소에 자주 다니던 곳이라든지.

라 콕스:자주 가는 편은 아니지만, 커피 향을 좋아해. 차 종류도 좋아하는 편이고. 너는 어떤데?

라 콕스:응, 학생인데도. 술이나 담배 같은 것도 아닌데 뭘. (잘게 웃는다.) 단 걸 좋아하나 봐?

라 콕스:(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아하니 한두 번 방문한 것 같진 않다. 그런 것치고는 같이 온 사람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고. 말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이어지다 뚝 끊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거…. 꼭, 질투하는 사람 같지 않나?)
(도출된 결론에 행동마저 멈추어 낸 채 의문을 품었다. 어쩌면 숨마저 멈추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자연스럽게도,) …미안. 방금 뭐라고 했지?
(당신의 말마저 흘리고야 만다. 이걸로 두 번째였다.)

라 콕스:응? 그런 거 아냐. 그냥….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어서. 구경하다 보니 시선이 빼앗겼나 봐. (당신 몫의 식기구를 정돈해 놓아주었다.) 이렇게까지 챙겨 줄 필요는 없는데…. 아래로 동생이 있니?

라 콕스:(멋있었느냐니! 참 해맑고도 귀여운 질문이다. 웃음기 숨길 생각도 않고 그래, 답하니 짧은 말 사이로도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형이 있었구나. 사이가 좋나 봐. 나이 터울이 비슷한 가족과 늘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 힘들지는 않아? 겪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난 외동이라서, 가끔 만나는 친척 동생들을 제외하고는 형제라 부를 만한 아이들이 없거든.

라 콕스:그런 성격이 아닌 게 뭐 어때서. (만류해도 계속 챙겨줄 성싶으니, 결국은 바지런히 움직이는 손 바라보기만 했다. 보랏빛 시선이 끊임없이 당신을 좇는다.) 넌 체리 애쉬잖아. 네 형이나, 라 콕스가 아닌…. (습관적으로 매무새를 단장했다.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 매고, 기운 깃을 정돈하고…. 바둑이나 체스를 시작하며 생긴 버릇이었다. 다음 수를 고민할 때 보이고는 했던 행동들.)
가벼우니 주변 사람의 기분마저 띄워주고, 득실을 재기보단 행동할 수 있잖아. 책 읽는 것 대신 체육을 좋아하니 세상을 직접 뛰어볼 수도 있을 테지. 부러워하지 마. 난 네가 그런 사람이어서 좋아하는 거니까. (뱉고 보니 고백 같다. 느릿느릿 덧붙인다.) …네 형도, 분명 그럴걸.

아하하~ 그런가? 그래두, 다들 되고싶은 모습같은 건 하나씩 있잖아요. 그런거죠, 뭐. …아! 여기! 에어컨이 빵빵해서 좋네요! 따뜻한 음식이 많아서 좀 덥네, 라는요? 쨍쨍한 곳에 있다가 겨우 시원한 곳 들어왔는데, 이렇게 더운 음식 먹어도 괜찮아요? 내 콜라 나눠줄까요?
라 콕스:(타인을 담아본 적 없는 눈이 실로 처음 상대를 담아낸 셈이다. 당신의 변화 하나 눈치채지 못할 리 없으나, 구태여 그 사실을 집지는 않는다. 정확히는, 그럴 여유조차 없었을 터다.) 아니….. 괜찮아. 탄산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리고는 침묵. 어색하게 뱉어낸 문장을 이어내는 것이 못내 버겁다. 둘 사이의 침묵이 이토록 어색했던가? 오늘 아침, 당신의 연주를 들을 때만 해도 그렇진 않았던 것 같은데. 괜히 제 몫의 물을 한 모금 삼킨다.) 그러고 보니, 체리. 피아노는 어쩌다 시작하게 된 거야? 전공은…. 아니라고 했던가.

라 콕스:(상대의 표정 세심히 살핀 것치고는 의문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부모님이 엄하신가 보군… 정도의 추측만을 했다. 이것저것 캐물을 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아직은 말이다.) 혼자 집중할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하거든. 집에 있는 책을 다 읽었을 즈음 거실에 놓인 피아노가 눈에 들어오더라. 꽤 재미있었어. 연습할 때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좋았고. 그런데…. (왜 지루해졌을까? 근본적인 의문을 떠올릴 즈음에는 입을 다문다. 자신 또한 원인을 정의하지 못했던 탓이다.)

라 콕스:(그럴 만도 하지. 활발한 이미지잖아. …응? 난 의심 안 했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원래는 거실에 있었지만, 지금은 내 방으로 옮겨두었지. 먼지깨나 쌓였을걸. 질문 하나하나 나긋나긋 답하는 것을 보아 이 흐름이 싫지는 않은 것 같다. 기실 타인과의 대화를 그렇구나. 알겠어. 그래, 고마워. 쯤으로 잘라버리곤 했던 라 콕스치고는 답지 않은 태도이긴 했다. 오고 가는 말의 소재보다는 단순히 화자가 당신이기에 기꺼워 보이는 것이겠지.)
어느 순간부터 지루해졌어. 왜 그렇게 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관객이 생기는 게 싫었던 걸까…. (확신 없는 투. 어깨 으쓱하고 만다.)

라 콕스:그렇지…. (이후 침묵. 너무 사교성 없어 보이나…. 하지만 라 콕스는 사람과 마주하는 것이 싫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귀찮았다. 타고 나길 그랬으니 이제 와 꾸며내기에도 멋쩍지 않은가. 당신의 고민과는 달리 참으로 가벼운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으니, 내어놓는 대답 또한 무겁지 않다.) 왜? 연주하고 싶은 연탄곡이라도 있는 거야?

라 콕스:(잘 먹으니 보기 좋네. 덩달아 포크를 움직인다. 덜어낸 샐러드를 깨작깨작 먹으며 답한다. 충분한 고민을 거쳤으니 적지 않은 침묵이 흘렀을 테지만, 두 사람 간의 침묵은 더는 어색지 않다.) 글쎄…. 처음으로 하나의 곡을 완성했을 때? 완성이라고 표현하는 건 좀 거창하긴 하네…. 마음에 드는 연주를 했을 때로 정정해 볼까.
(생각에 잠긴 양 시선이 허공을 배회한다. 드물게도 당신과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래…. 작은 별 변주곡이었을 거야. 어릴 땐 유독 그걸 많이 연주했었거든. (그리고 툭, 묻는다.) 연주할 줄 알아? 그 곡.

작은 별 변주곡은, 네에. 아마도. 피아노가 익숙해 졌을 때 즈음 연주해봤던 것 같아. Twinkle Twinkle Little Star~ 유명하잖아요! 음~… 그런데, 왜 그 곡이었어요? 각별한 이유라도 있었어요?
라 콕스:포핸즈로 편곡된 버전을 들은 적이 있었거든. (어디에서 그 연주를 들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라디오인지, TV인지, 거리의 음악 소리였는지, 혹은 날아든 나비를 따라 걸음 옮겼더니 담장 너머에서부터 들려오던 소리였는지…. 그 후로 홀린 이마냥 악보를 찾았던 기억만이 남아 있다. 타인과 함께 피아노 앞에 앉을 일 없으니 연탄곡을 익혀 봐야 제대로 된 연주가 될 리 없다. 그런데도 고집스레 원곡이 아닌 악보를 익혀두었던 연유는….)
집에 악보가 있을 거야. 너만 괜찮다면 같이 연주해 줄래? (……당신을 위해서였나? 알 수 없다.)

라 콕스: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집에 있는 피아노는 조율이 망가져 있을 거야. 연주할 만한 상태는 아닐 테니까…. 악보는 학교로 가져갈게. (이대로 말을 맺었다면 눈치 없는 사람이 되었겠지. 그렇기에 느릿느릿 덧붙이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건 다른 이유를 생각해 줘. 단순히 날 보러 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자신 또한 식기를 내려놓는다. 소리 나지 않게 의자를 밀고 일어난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아직 둘러보고 싶은 곳이 많거든.

라 콕스:(고개 젓는다. 선물도, 음식도 전부 거절하는 셈이다.) 이 정도면 충분해. 다음엔 영화관을 둘러볼까 하는데, 괜찮은 게 있다면 같이 보고 싶어서. 나중에 서점에 들러야 할 걸 생각하면 이쯤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거든.

라 콕스:(라 콕스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느린 행동거지가 이럴 때만큼은 방해가 되는구나.) 얻어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다음 일정들은 내가 사게 해 줘.
(그 다음 말이 이어지기까지는 시간깨나 들었는데, 라 콕스는 신간 도서는 빠삭하게 꿰고 있을지언정 현재 상영 중인 영화는 전혀, 하나도! 아는 것이 없는 인물이었던 탓이다. 결국은 순순히 시인한다.) 확인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 넌?

엘리베이터는 공사중이기 때문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동해야겠네요.
네온 조명이 은은하게 유리바닥을 적시는 5층에 발을 디디면 가장 먼저 달콤하고 짭쪼름한 팝콘 냄새가 풍깁니다.


평론가의 리뷰가 후하다는 액션 영화나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SF풍 판타지 영화도 눈에 띄네요.
동심이 필요한 어른들을 겨냥한 3D 애니메이션 영화 포스터도 붙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카운터 직원에게 문의하거나 자동 발권 기계를 이용해 티켓을 발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 콕스:(공포영화는 빼고…. 자연스럽게 한 개의 영화를 뛰어넘고 나머지를 살핀다.) 액션 영화보다는 SF영화가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라 콕스:음…. 꼭 그런 건 아니야. 읽어내지 못하는 것들도 많고.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의 포스터를 훑어내린다.) 이걸 보면 숙제를 써내는 게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액션 영화는 대체로 시끄럽잖아. 그런 건 좀 피로하더라. (이런 말이나 덧붙인다.)

라 콕스:(순순히 받아 든다. 함께 보자는 듯 거리 좁혀 내며 손에 쥔 것 당신 쪽으로 기울이기도 했다.) 싫어하는 건 아닌데, 찾아서 본 적은 없는 것 같네. 로맨스는 영상보다는 글로 접하는 걸 더 좋아하거든. 너는 어떤데? 로맨스 영화. 좋아해?

라 콕스:(역시 귀신은 싫어하는구나.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눈을 굴린다. 손끝 따라 시선 움직였으니, 멈춘 곳 또한 같다.) 글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짧은 간극. 성실히 고민한 뒤에야 답을 내어놓는다.)
여행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나? 미래로 떠나는 건 달갑지 않아. 나 이외의 사람들만이 늙어버린 세계에 떨어지는 거잖아. 그렇다고 과거로 떠나기엔…. 바꾸고 싶은 인생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큰 사건 없이 평범하게 살아왔거든. 지금에 만족해. (글자를 훑던 눈이 당신을 바라본다. 말 잇지 않고 기다리는 모양새. 꼭 당신의 의견을 묻는 것만 같다.)

(두어번 끄덕인 고개, 이어서 늘어지는 비음과 함께 영화관의 자그마한 노랫소리에 맞추어 좌우로 흔들린다.) 으으으으음, 나는요… 미래로 가고싶은 것 같아요. 과거엔 교회를 당당하게 다니지 못했거든요.
완전히 성인이 된 나는 뭘 하고 있을까, 이 전염병은 어떻게 끝이 났을까, 좋아하는 가수는 어떤 노래를 냈을지, 친구들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그리고 난, 그 때의 라도 궁금해. 미래는 수많은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결해 줄 답을 가지고 있잖아요.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다면 참 즐거울 거야.
…여기까지! 영화표, 끊으러 갈까요?
라 콕스:나는 너와 현재를 살고 있으니 우리의 미래를 알지는 못하지만…. 너는 분명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었을 것 같아. (그건 피아노가 될 수도 있겠고, 자유롭게 교회를 다니는 것일 수도 있겠고…. 혹은 성직자가 되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없다면, 그것을 빙 둘러 걸어서라도 지나칠 것만 같다. 그것이 라 콕스가 생각하는 체리 애쉬였다. 어디로 향할까 궁금해 눈길을 둘 수밖에 없는 사람.)
나는….
| 기준치: | 100/50/20 |
| 굴림: | 80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피아노를 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어때, 조금은 엿본 것 같니? (바람처럼 웃었다. 웃음기 어린 말과 함께 걸음 내디딘다. 이번에는 늦지 않았다. 두 사람 몫의 영화표를 끊어 그중 하나를 내민다.)

좋네요… 피아노! 그 때엔 우리, 이미 몇 번이고 연탄곡을 완성했을지도 몰라. 라가 다시 피아노를 쳐줬으면 했던 건 나니까, 미래에서도 계~속 지켜볼게요. 어때요, 괜찮아요?
응? …에구? (영화표와 너를 번갈아 보았다. 이어 내밀어오는 영화표를 조심스레 손에 쥐어서는.) 난… 같이 가고싶었는데~! 식당의 일 때문에 그래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니까!
라 콕스:(고개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미래를 확신하고 약속하는 이치고는 성의 없어 보일 만한 행동이었으나, 보랏빛 시선만큼은 당신을 담아내지 않은 적 없었으니 눈치 빠른 이라면 감정의 깊이를 짐작할 만도 하다.) 그것 때문만은 아냐. 그냥… 해주고 싶어서 그랬지. 너도 그래서 혼자 계산하고 온 거 아니었나.

라 콕스:(침묵한다. 나도 이렇게 빨리 움직인 게 처음인걸.) ……노력해 봤어. (이런 대답이나 한다….) 팝콘은? 먹고 싶다면 사서 들어가자.

라 콕스:(메뉴를 꼼꼼히 훑는다. 기실 이런 곳에는 탄산 없는 음료가 드무니 선택지도 몇 없긴 하다마는.) 오렌지 주스로 할게. 너는?

라 콕스:(많다.) 캬라멜이 제일 무난한 것 같은데. 단 게 끌리지 않는다면 버터로 하자. 어때?

라 콕스:(체리 애쉬는 핫도그에 머스타드와 케첩을 뿌려 먹는다…. 기억할 것. 느릿느릿 고개 주억인다.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가 제 카드를 내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에도 꽤 민첩했을 것이다.) 상영관은 2관이네. 주문한 게 나오는 대로 이동하는 게 좋겠어.

라 콕스:스티커 사진? (가리키는 방향 바라보니 기기가 보인다. 이런 걸 찍게 될 줄은 몰랐는데. 거부감은 들지 않았으니 이번 또한 고개를 주억이기만 한다. 선뜻 걸음 옮겨 마련된 부스 안으로 들어선다. 나란히 걸을 수 있게끔 상대를 기다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이런 건 처음 찍어 봐.

라 콕스:(뚝딱대기 시작한다. 브이? 하트? 윙크? 라 콕스에게 사진은 가족사진이나 졸업사진, 증명사진이 전부였으며 셋 다 부동자세로 입꼬리만 끌어올리면 되는 부류였다. 낯?선 활동에 거리감을 느낀 모양새.) 미안…. 이런 건 잘 몰라서. 어떻게 찍으면 잘 나오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따라 해볼게.

라 콕스:(이쪽도 분명 MZ가 맞을 텐데. 이상하다. 얌전히 따라 해보며….) 이렇게?

라 콕스: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93 |
| 판정결과: | 실패 |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36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푸핫..
라 콕스:(굉장히 어색하고 딱딱하게 나왔나 보다. 침착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며….)
네가 즐거웠다면 그걸로 됐어…….

라 콕스:(조금 멋쩍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인데, 한 사람만 이렇게 흔들리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재능이겠다 싶다.) 긴장했나 봐. 다른 사람과 단둘이 이런 사진을 찍는 건 처음이거든. 넌 익숙해 보이네.

라 콕스:(흔쾌히 받아 든다. 그림 대신 오늘의 날짜를 써넣었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이렇게 해두면 의미가 깊어질 것 같아서. 몇 년이 흐른 뒤에 다시 보게 된다면 꽤 웃기겠는걸. (다시금 펜을 내민다.) 넌? 더 안 그려도 돼?

라 콕스:(요즘은 이런 게 유행인가? 따위의 생각이나 했다.) 그렇네. 잘 어울려. (자신은 모르겠고… 체리 애쉬의 머리 위에 그려진 귀나, 뺨 위에 그려진 수염은 확실히 귀여웠으므로 순순히 수긍한다. 문득 밖을 바라보더니,) 우리가 주문한 게 나온 것 같은데. 슬슬 출력하고 나가자.

라 콕스:응? 상관은 없지만. (양손 가득 간식거리를 들고선 다시금 티켓을 확인했다. 이어 느릿느릿 걸음 옮긴다. 이쪽이야, 덧붙이기도 했다. 지정된 좌석에 나란히 앉아 검은 스크린을 바라볼 무렵에야 입을 연다.) 잘 보관해 줘. 사진 말이야. 몇 년이 흐른 뒤에 내게 보여주는 것도 잊지 말고.

라 콕스:그거?

라 콕스:(말없이 팝콘을 당신에게 내밀었다…)

라 콕스:많이 먹어. 급하게 먹진 말고. 음료수도 마시고….

라 콕스:괜찮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작게 한 입 베어 문다. 우물우물 꿀꺽.) 어차피 나눠 먹으려고 산 거니까, 뺏어 먹는단 생각 말고 많이 먹어.

라 콕스:(집어 가기 쉽게 팝콘 기울여준다.) 단 게 먹고 싶을 땐 주로 캬라멜을 먹지. 고소한 게 먹고 싶을 땐 버터를 먹고…. 다른 시즈닝은 좀 과하게 느껴져서. 그렇지 않나?

라 콕스:일리 있는 말이네. 막상 영화가 시작되면 바스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눈치를 보느라 팝콘을 안 먹게 된다는 사람도 있다더라. 그런 걸 생각하면 광고 중에 통을 비워버리는 게 제일이긴 하겠어. (라지 두 개는 좀 많지 않나 싶긴 한데…. 나지막이 덧붙인다.)

라 콕스:난 영화가 끝난 뒤에 남은 팝콘을 버리고 가는 쪽이지. (팝콘 하나를 집어 당신의 입 앞에 대어 준다.) 군것질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거든.

라 콕스:거기까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짧은 침묵. 왠지 모를 데쟈뷰를 느낀다. 레스토랑에서도 이런 말을 했었던 것 같아.) 체리… 공감을 잘해준다는 말, 자주 듣는 편이지?

라 콕스:아니, 그런 건 아니고. 왠지 그럴 것 같아서 물어봤어.

….
…하지만 팝콘에게 공감해준다는 건 좀 웃긴 일 아니에요…?!
라 콕스:그럴 수도 있지. 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다시금 팝콘 하나 집어 입가에 대어주며….) 슬슬 영화도 시작하려나 봐. 그전에 다 먹어야지.

라 콕스:(순순히 받아 먹는다.)

쿵, 쿵. 울리는 영화관의 커다란 스피커 소리와 함께 영화가 시작되면, … ….
…어느 순간부터 체리는 잠들었습니다. 어려운 내용이니까요.
라는 영화의 내용을 이해했을까요?
라 콕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43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그럭저럭 재밌게 본 듯하다.)

그렇게 상영은 끝이 납니다. 관객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나고, 쿠키는 없는 것 같네요.
라 콕스:(문득 옆자리를 보더니…. 잠들었군.) 체리,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라 콕스:방금 끝났어. 좀 지루했나?

라 콕스:피곤했나 보네. 일어날 수 있겠어? 네가 힘들다면 카페는 다음에 가자. 서점만 잠시 들러서 자료만 찾고 돌아가는 쪽이….

라 콕스:무리하는 거 아니지?

라 콕스:그렇다면 다행이고. 다음엔 다른 걸 봐야겠네. 갈까? (카페로 이동합니다.)

건물 외벽을 장식한 벽돌 무늬와 입구의 난간 곁에 일렬로 도열된 동물 모양 피규어들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라 콕스:그럴까. 조각 케이크 같은 걸 하나 시켜서 나눠 먹는 것도 좋겠는걸. 마실 건 정했어?

라 콕스:치즈 케이크는 어때? 다른 것도 괜찮고.

라 콕스:(민첩하지 못했나….) 나도 내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계속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아.

라 콕스:스티커 사진도 네가 냈고. (콕 덧붙인다.)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 같은 건 없고? 어차피 서점에 들러야 하니까…. 선물해주고 싶은데.

라는 초등학생 때도 어려운 책 읽었을 것 같아….
라 콕스:어릴 적에 읽었던 책? (곰곰….) 백과사전 같은 거? 재미는 없을 텐데. (그럴싸하게 말하긴 했으나 물론 농이다. 평범하게 동화책이나 읽었을 것.)

라 콕스:농담이야. (때마침 진동벨이 울렸다. 벨을 쥐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가 가져올 테니까 앉아 있어. (그리 말하고는 총총 걸음 옮긴다. 머지않아 음료며 디저트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돌아오더니, 소리 나지 않게끔 테이블 위로 내려놓는다. 이어 코스터며 음료를 당신의 앞으로 놓아준다.) 여기, 따뜻한 고구마 라떼.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마셔.

라 콕스:…갑자기?

라 콕스: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는 건 너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여기엔 피아노가 없나?

라 콕스:내 취직도 결정된 거야? 이런….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는 건 미래 계획에 넣어두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도 수정해야 할까 봐.

라 콕스:어제까지만 해도 바둑기사가 될 생각이었는데…. (반론치고는 힘 담겨 있지 않은 느슨한 어조였다.) 동급생 한 명에게 휘둘려서 진로마저 고심하게 될 줄은 몰랐어. (한 차례 말을 멈추어 낸다. 제 몫의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넘긴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기도 했다.) 나는 그렇다 쳐도…. 너는 어때. 졸업 이후 말이야. 뭘 할 건지 생각해뒀어?

라 콕스:(라 콕스는 무언가를 결정 내릴 땐 미래를 가늠해보고는 했다. 설령 피아노를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질려버리지 않을까? 또 손을 거둔 채 다른 일로 시선을 돌리게 되지는 않을까. 흘러가는 생각 따라 시선 또한 움직인다. 이윽고 회색과 자색이 서로를 담아내면,) 좋아졌어. 네 덕분이야. (퍽 덤덤하게 답하고야 만다. 설령 피아노가 다시 질린다 해도, 체리 애쉬가 나타나 제 손을 끌어줄 것만 같았다. 라 콕스는 고작 하루 만에 당신과 함께 선 미래를 재어보았다.)
글쎄…. 오스트리아 정도? 빈에는 한 번쯤 가보고 싶었거든. 음악의 나라니까…. (흠.) 같이 갈래? 정해진 게 없다면 말이야.

라 콕스:(아무래도 유학보다는 여행 계획이 된 것 같다. 다만 지적하지 않았다….) 역시, 나보다는 네가 피아니스트가 되어야 할 것 같은걸. 벌써 연주 생각을 하고 있잖아. (농.) 그것보다도…. 권유한 건 나지만, 이렇게 쉽게 허락해도 되는 건가. 프랑스나 일본에 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거긴 어쩌고?

라 콕스:그래, 아직은 먼 이야기이긴 하다. 졸업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얘기해 보자. (단순 여행이라면 오스트리아나 프랑스, 일본을 모두 경유하는 것도 괜찮지 싶다. 의자에 몸 느슨히 기대며 말 잇는다.) 이제 서점을 들를 일만 남았네. 체리, 공부할 준비는 됐어?

라 콕스:음. (예상치 못한 질문을 들어버린 낯. 정말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네가 좋아한다면 그쪽도 한 번 둘러볼까. 책이야 느긋하게 고르면 되니까.

라 콕스:(고개 끄덕인다. 빈 잔이며 접시를 트레이 위로 옮겨 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뒷정리를 마친 뒤에 카페를 나섰다. 서점으로 이동합니다.)

이동하는 동안 햇빛에 푹 절어 있던 몸이 조금은 되살아 나는 기분이네요.
체리는 무더위에 지친 기색을 하고서 서점에 들어서더니 악보집 코너 내지는 문제집 코너 근처를 서성입니다.
미리 찾아두었던 책이 있는지 검색대를 이용하는가 하면, 비슷한 출판사의 책 두어 권을 뽑아 펼쳐보기도 하며 개인적인 시간을 가집니다.
그렇게 라가 다른 책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을 때 쯤…
체리는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운동장처럼 펼쳐진 서점을 휘 둘러보면 서로 다른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가지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는 출입객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그 사이엔 책 정리로 분주한 직원들 또한 섞여있고요.
어떻게 할까요?
라 콕스:(의아한 눈치로 주변을 둘러보다, 직원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실례합니다. 일행을 찾고 있어서요. 저와 같은 교복을 입은, 붉은 머리의 학생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라 콕스:감사합니다. (고개 꾸벅…. 곧장 음악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음악 코너에 들어서니 자연한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과거 피아노를 연주하던 시절의 라에게는 익숙한 장소일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직원이 말해준 것과 달리… 체리는 보이질 않네요. 그새 자리를 옮긴걸까요?
그렇게 음악코너를 살피던 당신은 다른 악보집이나 책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사이즈의 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라 콕스:(튀어나온 책을 꺼내 본다.)
과학 코너에나 있을 법한 책이 뜬금없이 음악 코너에?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라 콕스:(오늘따라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와 자주 엮이는군…. 책을 챙겨 든 채 주위를 살핀다. 인파 사이에서 붉은 머리를 찾아볼 수 있을까?)

그리고 어쩌면… 과학책이 이렇게 황당한 곳에 꽂혀있는 이유를 생각하면, 정말 어쩌면 그의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여행 패러독스, 그 다음 페이지로 넘기면 여러가지 타임 패러독스에 관련된 내용들이 줄글 형식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21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라 콕스:(휴대폰을 꺼내 무음 모드를 해제한 뒤 다시금 책을 팔랑팔랑 넘겨 본다. 이외에 읽어볼 만한 글이 있을까?)

라 콕스:(다시 주변의 직원을 붙잡았다.) 실례합니다…. (이하 체리의 외관과 상황 설명.)

라 콕스:감사합니다. (재차 인사를 건넨 뒤 문제집 코너로 이동합니다.)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새 문제집을 보러 온 학생들이 각 책장마다 두셋 즐비합니다.
과목별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어디를 살펴도 체리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네요.
문제집 코너를 살피던 당신은 빽빽이 꽂혀있는 문제집들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게으른 누군가 구매를 재고하며 아무렇게나 꽂아놓은 책일지도 모르죠.
라 콕스:(역시나 삐죽 튀어나와 있는 책을 꺼내 펼쳐 본다.)
음악 코너에나 있을 법한 책이 뜬금없이 문제집 코너에?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라 콕스:(흠…. 페이지를 넘겨 본다. 더 읽을 만한 내용이 있을까?)

아무래도 체리로 추정되는 이 사람은, 옆코너에서 옆 코너로 옮겨가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렇다면 다음은… 과학 코너가 되겠네요.
라 콕스:(책을 챙긴 뒤 과학 코너로 이동했다.)
과학 코너에는 다른 코너에 비해 상주하고 있는 사람의 수가 적습니다.
에어컨의 냉기가 속속이 섞여든 책장 틈을 둘러보면, 마찬가지로 체리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군요.
좀처럼 구미가 당기거나 흥미로운 책을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대로 스쳐 지나가려던 라는 부자연스럽게 삐죽 튀어나온 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라 콕스:(익숙하게 책을 꺼내 책장을 넘겼다.)
페이지를 넘기면 가름끈이 끼워져 있습니다.
음악, 문제집, 과학 코너를 모두 살핀 직후 누군가 라의 어깨를 두드립니다.
상대는 당연하게도… 체리네요.
책을 구매한 모양인지 악보와 문제집 몇 권을 들고 있습니다.

라 콕스:응, 눈에 띄길래. (당신의 손에 들린 책을 흘긋 본다.) 다 고른 거야?

라 콕스:어쩌다 보니…. (전염의 역사까지 꺼내 챙긴다. 이걸로 품에 들린 책은 총 세 권이 되었다.) 계산은 못 했지만. 하고 올 테니까 조금 더 둘러보고 있을래?

라 콕스:(고개 끄덕이며 계산대로 향한다.) 네가 고른 책들도 궁금하네. 하나는 악보집인 것 같던데.

라 콕스:그래. 내 것도 보여줄게. 숙제할 때 도움이 될 것 같더라. (빈말은 아니었는지, 금세 계산을 마친 뒤 돌아와 당신에게 책을 내밀었다. 시간여행 패러독스….)

라 콕스:적힌 것까지는. 좀 더 천천히 읽어보려고. 네가 산 것들도 보여줘.

라 콕스:그래? 그럼, 다음에도 같이 오자. 혼자 들어가는 것보단 같이 들어가는 게 편할 거 아냐. (느릿느릿 따라나서다가도 문득 묻는다.) …데려다 줄까?

라 콕스:응? 여러 곳을 더 들러도 되는걸. 난 괜찮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어딜 가고 싶은데?

시간은 어느덧 9시. 여름이 농익어가며 하늘에 해가 떠있는 시간이 부쩍 길어졌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니 교연한 노을이 떨어져 상공과 구름이 어둡게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체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 두 사람은 어느 외진 골목길에 접어듭니다.
주변을 살피면 양옆으로 붉은 벽돌이 고루 쌓여 있고 그 표면을 담쟁이 넝쿨과 장미꽃이 똬리 틀고 있습니다.
요 근처에 이런 길이 있었던가요? 금시초문입니다.

도로 위에는 어제 보지 못했던 차량이 오늘의 배기음을 터뜨리며 지나다니고, 몇 달 새에 하늘을 찌를듯 드높게 건축된 신설 빌딩이 세워지는 것이 예사인 곳.
으레 생기는 변화를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야만 내일에 적응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니까요.
번화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 하나가 고스란히 남겨진 듯한 풍경은 꽤 낯설지도 모릅니다.
점점 더 좁아지는 골목을 나아가다 보면 머지 않아 그 끝에 당도합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귀퉁이에 세워진 다 낡은 악기상 앞에 머무릅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흰 울타리가 빙 둘러쳐진 악기상, 기스 투성이 전면유리창 너머로 갖가지 악기들이 모습을 뽐내고 있습니다.
라가 무어라고 입을 열 새도 없이 체리는 악기상의 출입구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딸랑. 계절의 구색을 맞추듯 청명한 현관벨소리가 귓전을 때립니다.
빛이 바랜 [카운터] 좌석에 앉아 있던 악기상의 주인은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흘끗 확인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합니다.

목재 구조의 악기상 내부는 흐릿하나마 찝찔한 먼지 냄새가 납니다.
악기만큼은 애지중지 관리했는지 하나같이 먼지가 쌓이지 않은데다 광택이 돕니다.
체리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 눈치입니다. 악기들 사이를 서성이고 있습니다.
라 콕스:살 거라도 있어?

라 콕스:같이 가면 안 돼?

라 콕스:(순식간에 홀로 남겨졌다. 어정쩡히 서 있다가도 몸을 돌려 악기들을 바라본다.)

이 허름한 악기상에 어울리지 않을만큼 아름답고 반짝이는 악기들이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자리합니다.
창측 한켠에는 들여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진열된 다른 악기들보다도 아름답고 깨끗한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습니다.
라 콕스:(유난히 잘 관리된 듯 보이는 피아노에 다가가 건반 뚜껑을 열어 본다. 검지로 드러난 건반 중 하나를 눌렀다. 소리도 깔끔하군.)
| 기준치: | 100/50/20 |
| 굴림: | 28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라 콕스:(다른 특별한 점은 없을까? 반질반질한 피아노 이리저리 훑어본다.)

라 콕스:(슬그머니 건반 뚜껑을 덮고 책장으로 시선을 돌린다.)

악보집들은 어느 한 권 빠짐 없이 세월의 흔적이 누렇게 껴있습니다.
걷어내지 못한 먼지가 얕게 쌓여 있기도 하고, 모서리가 찢어진 악보집이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종이는 관리하기 힘드니까요.
라 콕스:(비교적 상태가 멀쩡한 악보집을 꺼내 펼쳐보며…. 서점에서처럼 튀어나온 책이 있지는 않은지 살폈다.)

상태를 보아 판매용으로 진열해 둔 건 아닌 것 같고, 악기를 구매하러 온 손님이 테스트 할 수 있도록 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한 점은 없어보이네요.
라 콕스:(꺼냈던 악보집을 제자리에 꽂아둔 뒤 카운터로 향한다.)

무언가 물어보면 대답은 해줍니다만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라 콕스:(악기상이 아니라 골동품점인 것만 같군…. 아날로그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시계약은 꼬박꼬박 잘 갈아주고 있는 모양인지 세 개의 침은 별 무리없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라 콕스:(이번에는 라디오에 시선을 두었다. 이것도 골동품인가?)

라 콕스:(옆에 놓인 신문도 훑는다. 언제적 신문이지?)

펼쳐 읽어보면 다음와 같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90 |
| 판정결과: | 실패 |
(흠.)

'지난주'가 덧붙어 있는 것을 미루어 유추하건대 그 매혹적이라는 B씨의 연주는 대략 한 달 전에 콘서트로 진행되었던 모양이에요.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듭니다. 혹은 위화감이거나 어떤 감이 작용하며 드는 느낌일 지도 모르고요.
콘서트가 있던 그 날 분명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라 콕스:(그러고 보니, 한 달 전 A시에서 전염병이 시작됐다는 뉴스를 들은 기억이 난다.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찜찜한 마음 뒤로한 채 당신을 맞이했다.) 뭐길래 그래? 같이 찾아봐 줄 수도 있어.

라 콕스:굉장히 깨끗하게 관리된 피아노는 봤는데 말이야. (고개 흘긋 돌린다.) 저쪽에.

라 콕스:다시 한번 둘러볼까? 같이 찾아보면 나올지도 모르고. 그런데…. 그 피아노는 왜 찾으려고 하는 거야?

그 깨끗한 피아노가 있는 바로 옆이요, 원래 거기에 있었거든요.
라 콕스:음…. 다른 사람이 와서 사 가기라도 한 걸까. 갑자기 없어진 거라면 그런 이유밖에 없을 것 같은데. 많이 아쉽겠네.

라 콕스:그래. 데려다 줄게.

소등되어 있던 가로등의 불빛이 하나씩 점등하며 온전히 어두워지진 않은 길을 비춥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한 이후 도시는 저녁시간대 특유의 활기를 잃은지 오랩니다.
악기상에서 나온 두 사람은 귀갓길에 광장을 지나칩니다.
중앙에 있는 건… 피아노?
체리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피아노를 향해 다가섭니다.

체리는 손끝으로 건반을 쓸어내리며 말합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10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이 장면, 어디선가 분명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꿈에서일까요?
라 콕스:
| 기준치: | 46/23/9 |
| 굴림: | 64 |
| 판정결과: | 실패 |

라 콕스:네가 찾던 게 이 피아노였어?

라 콕스:누가 관리를 하기라도 한 걸까. (느릿느릿 당신의 곁으로 다가가 함께 건반을 내려다본다.) 이렇게 한눈에 알아볼 정도면 꽤 깊은 추억이 담겨있나 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되나?

옛날에 그 악기상에서 같이 이 피아노를 보러 왔었거든요.
아잇, 정말 특별한 건 없어서 말하기 민망하네. 기껏 물어봐줬는데, 부풀릴 걸 그랬나 봐.

그의 손가락이 자유롭게 건반 위를 누비면, 게릴라 연주회가 시작됩니다.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잰걸음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의 이목이 광장의 피아노와 그에게 집중됩니다.
휴대폰을 들어 체리가 연주하는 것을 촬영하거나 동영상으로 남기는 행인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그런 체리의 연주를 바라보는 라의 심정은 어떤가요?
라도 언젠가 박수 갈채를 받으며 무대에 올랐던 적이 있을 터입니다.

가로등의 적적한 불빛이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광장을 밝힙니다.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허름하고 볼품 없던 낡아 빠진 피아노일지라도 그 정도의 연약한 빛을 반사할 수는 있는 모양입니다….
곡 하나를 완주한 체리는 라에게로 다가옵니다.

라 콕스:(당신의 연주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감상을 가졌는지는 한 문장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네 곁에서 함께 연주하고 싶어.)
| 기준치: | 100/50/20 |
| 굴림: | 100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응……. 정말로. (Absolutely. 당신이란 사람은 참 이상했다. 홀연 듯 나타나 자신을 이다지도 흔들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이상하리만치 박동이 빠르다. 유행 중이라던 전염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혹은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인지. 하여간 두 쪽 다 곤란하다는 점만은 똑같았다.)

다음엔 꼭, 제대로 된 연주를 들려줘요. 라가 치는 피아노 정말 좋아하거든. 나, 같이 피아노 치기로 한 것도 잊지 않았어요.
라 콕스:기회가 된다면…. (느슨히 웃는다. 퍽 편안해 보이는 낯.) 지금은 손이 굳어서 안 되고. 다음에 놀러 와. 같이 연주할 수 있게끔 재활해둘 테니까.

라 콕스:(보폭을 늘려 나란히 걸었을 것이다. 당신을 데려다주는 동안에는, 줄곧.)

라 콕스:이래 봬도 통금은 없는 집안인데. (농.) 이 정도는 괜찮아. 너무 늦지도 않았고…. 또, (순간 말을 멈춘다. 부모님께 친구와 놀았다고 말씀드린다면 오히려 기뻐하실걸…. 이런 말까지 덧붙이는 건 좀… 그런가? 적당히 얼버무렸다.) …아무튼.

라 콕스:(입 꾹 다문다.) 별것 아냐. 너는? 시간이 꽤 늦어졌는데. 집에 연락은 해 뒀어?

라 콕스:몰래… 들어갈 수 있나? (현관으로 들어가면 무조건 걸리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했다.) 어서 들어가 봐. 조금이라도 덜 혼나야지 않겠어.

라 콕스:(자주 해봤나 보군…. 손 마주 흔든다.) 응, 푹 쉬고. 내일 보자.
그로부터 며칠 뒤, 아침. 숨통을 불사르는 듯한 무더위와 함께 잠에서 깨어나면 휴대폰에 맞춰두었던 알람이 라를 보채고 있습니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삐비비빅.
정신사나운 벨소리는 한참이고 이어집니다.
오전 댓바람부터 머리가 띵한 것이… 밤새 열대야에 시달렸는지도 모릅니다.
등교 준비를 끝마치고 집 바깥으로 나서기 직전, 끄지 않은 채로 잊고 있었던 TV에서 뉴스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100 |
| 판정결과: | 대실패 |

시민들의 불안감은 날로 달로 급증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목격되고 있습니다. …환자들은 하나같이 여름철의 짙은 오존 냄새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많이 떠있는 것이 기이하다.'는 말을 되풀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 대학병원 의료진은 질병 감염에 따른 환각 증세의 가능성을… 다음 속보입니다…."
라 콕스:(뚝뚝 끊기는 뉴스를 들으며 비어가던 학급을 떠올린다. 고열에 시달리던 것처럼 보이던 인물을 떠올리기도 했다. 붉은 머리에 늘 즐거운 듯 휘어낸 눈이 인상적이던 사람. 괜한 걱정이길 바라며 TV의 전원을 끈다. 평소와 다름없이 느릿느릿 등교 준비를 마치고 학교로 향한다.)

늘 라보다 일찍 등교하던 그였는데… 어떻게 된 걸까요?
오늘은 조금 여유롭게 등교하려나? 안일하게 앉아있어보지만…
…조례 시간이 끝날 때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조금 부자연스럽지 않나요?
반 친구들이나 선생님은 체리가 등교하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을까요?
라 콕스:(친구들에게 묻는 것보다는 선생님께 여쭙는 것이 정확하겠지…. 조례 시간이 끝나자마자 몸을 일으킨다. 드물게도 걸음을 재촉해 선생님을 따라가서는 묻는다.) 선생님, 체리 애쉬가 아직 등교하지 않았습니다. 워낙 성실한 친구라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걱정되어서요. 혹시…….

라 콕스:그런, 가요…. (대답이 늦다. 겨우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든다. 아침 자습 시간, 수업을 앞둔 상황임에도 그리했다. 정말이지, 평소의 라 콕스였다면 거들떠보기는커녕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터부시했을 행동을 나서 하고 있는 꼴이다. 체리에게 온 연락은 없을까?)

메꿔두었던 책상은 다시금 주인을 잃고 방치되길 반복합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지난 며칠간 당신과 체리는 질릴만치 붙어 다니며 시간을 공유했습니다.
그간의 시간은, 즐거웠다고 단언할 수 있나요? 연락하나 남겨주지 않은 그에게 서운하지는 않나요?
라 콕스:(열병에 걸렸는데 연락을 남길 정신이 어디에 있겠나. 서운함이라고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연락처에 등록된 당신의 이름을 빤히 바라보다, 제 쪽에서 먼저 연락을 남긴다.)
[소식 전해들었어. 몸은 좀 괜찮아? 어서 나아서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네.]

하교를 알리는 묵직한 종례음과 함께, 번쩍! 마치 스위치를 올리듯 분산되어 있던 정신이 한 자리에서 맞붙었습니다.
체리에게 보낸 연락은 아직 답이 오지 않았고,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면 책가방을 싼 아이들이 교실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들어옵니다.
어느틈에 종례가 이루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종일 좀처럼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혹은 다른 생각을 했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거나요.

자리에서 일어선 라는 교실 바깥으로 나가기 직전, 어쩐지 모를 기묘한 이끌림에 힘입어 체리의 책상 쪽으로 시선을 기울입니다.
때마침 덜 닫힌 창문 가장자리에 불어온 오후의 설익은 바람에 가슴이 뻐근해졌습니다.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은 건조한 1인용의 책걸상. 비어 있는 가방 걸이, 사물함 아래 가지런히 모여있는 교과서…
[C반, Cherry Ash]라고 적혀있는 코팅된 시간표까지.
기스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책상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전에 없던 기이한 감각마저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 덧없는 사실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지던 그 때.
라 콕스: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65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라 콕스:내가 잠글 테니까, 열쇠만 놓고 가 줄래? 조금 오래 걸릴 것 같아서 그래. (종잇조각을 꺼내 펼쳐본다.)

라가 종잇조각을 펼쳐보면, 그것은 어떤 위치를 가리키는 주소입니다.
혹은 약도거나. 눈에 익은 글씨체만으로도 머리통에 자연스레 그려지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이 장소는 의심할 여지 없이 며칠 전 체리와 함께 방문했던 그 악기상이 틀림 없습니다.
…잠깐, 쪽지의 귀퉁이에 무언가 적혀있나요?
라 콕스: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53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18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라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며칠 전, 체리와 함께 놀러가면서 구매했던 물건들이요.
팔찌와 머리끈, 그런 사소한 것이라도 라가 떠올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라 콕스:(시간을 증명하고 기억을 되새길 물건 하나…. 문득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본다. 어둑한 피부 위로 붉은색 팔찌가 매듭지어진 것이 보인다. 체리, 사실은 말이야. 꼭 물건이 아니어도 될 것만 같아. 붉은 것을 볼 때면 함께 보냈던 시간이 떠오를 테고, 햇볕을 쬘 때면 너와 처음 만났던 여름을 떠올리게 될 거야. 더욱이 피아노 소리는 말할 것도 없지. 그러니, 사실 나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종잇조각을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그 길로 악기상으로 향했다. 기다리는 것은 어렵지 않아. 누군갈 찾으러 가는 것도 낯설지만은 않은 것 같아. 단 한 번도 그래본 적 없는데 말이야. 피아노 소리가 나를 이끌어 주겠지. 한 마리 나비가 나를 찾아와 주겠지….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꼭 먼 옛날에 경험해본 것처럼.)

악기상 출입구에는 희끄무레하게 바래어 페인트칠이 벗겨진 '임시 휴업' 팻말이 걸려 있습니다.
라는 새파란 싹이 이름 모를 들꽃이나 잡초들과 뒤섞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울타리 근처를 서성입니다.
라 콕스:(음……. 넘어갈 수 있을까?)

그 사이로 어떤 계절의 매미 우는 소리가 이어집니다. 좁다란 공간은 마치 언젠가의 비밀스러운 길이 닦였다가 무산된 것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틈새를 들여다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몸을 구겨본다면 간신히 이동하는데에는 무리가 없어 보여요.
라 콕스:(구깃구깃…. 넘어가 본다.)

라는 나무가 부자연스럽게 우거진 공터를 발견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풀벌레 우는 소리만 선명합니다. 이곳에 사람의 흔적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만… 메마른 흙바닥의 정가운데 뻥 뚫린 싱크홀이 나있는 것만큼은 예삿 일이 아닌 것 같군요.
구멍의 가장자리는 마치 녹은 것처럼 보이며, 비정상적으로 일렁이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존재하는 웜홀이라는 미지의 공간이 발치 아래 투영된 듯 합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45/22/9 |
| 굴림: | 49 |
| 판정결과: | 실패 |
1

38도를 웃도는 축축한 여름임에도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라는 유사 이전의 세상에 인간이 최초로 빚어졌을 당시 하나의 재료처럼 장기 곳곳에 새겨져 있었던 본능으로 말미암아 어떤 메시지를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어쩌면 결국 이곳에 다다르기 위해 스스로 모르는 사이 오래도록 방황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근방에선 강렬한 여름의 오존 냄새가 풍깁니다. 비릿하기도 하면서 싱그럽기도 한 특유의….
라는 구멍으로 뛰어드나요?
라 콕스:(그간 시간여행과 관련된 매체를 접해온 것을 떠올렸다. 그 모든 상황이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것만 같았다. 이것은 기막힌 우연이거나, 잘 짜인 운명일 것이다. 하여간 자신이 이 구멍에 발을 내디딜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대로 구멍으로 뛰어듭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친 라는 구멍 속으로 몸을 내던지기로 합니다.
찰나에 당신은 온 몸을 거스를듯 피부를 긁어대는 어떤 비인간적인 손길을 느낍니다.
전에 느껴본 적 없던 외계의 에너지가 강압적으로 몸을 잡아 당기는 듯한 감각이었습니다.
…

소용돌이치는 왜곡 속을 맨발로 건너온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맞게 도착한 걸까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당신은 꽤 깊은 구덩이 안에 있습니다.
깊은 구멍 안에 머물고 있는 탓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꼭 천장같은 푸른 색의 하늘이 원형으로 오려져 있습니다.
구명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라 콕스:(……올라갈 수 있을까? 내가? 여길?)

라 콕스:(안 될 것 아니까 처음엔 설렁설렁.)
| 기준치: | 20/10/4 |
| 굴림: | 53 |
| 판정결과: | 실패 |
(흠.)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24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이게 되네?)

라는 사방이 꽉 막혀있던 구멍을 아래에서 위로 기어 빠져나오는데 성공합니다.
비록 처음 한 번은 미끄러져 떨어졌지만요.
체력 1 이 감소합니다.
근처를 살피면 구덩이에 뛰어들기 전에 보았던 그 공터입니다.
장소는 그대로인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사뭇 다릅니다.

맞은 편에 보이는 악기상의 벽면은 부식되어 이질적인 감상을 더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전혀 관리되지 않은 것 처럼 보이는군요.
라 콕스:꿈이라도 꾸는 걸까…. (더러워진 옷 툭툭 털며 가게 입구로 다가가 본다. 특별한 점은 없을까?)

길게 뻗은 아스팔트 도로나 굴곡진 모퉁이를 돌아보아도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발견할 수 없습니다.
공간 자체가 마치 노이즈낀 흑백 필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길로, 어떤 장소로 향하든 일말의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네요.
그저 전깃줄 위에 앉아 지저귀는 새들의 목소리나 나무에 달라붙어 노래하는 매미의 우짖음만이 공허한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당장은 [악기상]한군데정도를 살펴볼 수 있겠네요.
라 콕스:(손목에 걸린 팔찌를 내려다본다. 이것만 멀쩡하다면 되었다. 악기상의 문은 열려 있을까?)

직전에 보았던 '임시 휴업'팻말은 문간에 그대로 걸려 있습니다. '임시', '휴업', 하고 반으로 쪼개져 덜렁거리는 탓에 다소 음산한 기운을 더합니다.
닦지 않아 희뿌연 통유리 너머로 진열된 악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다 낡아가는 [피아노] 한 대만이 전시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83 |
| 판정결과: | 실패 |
(응?)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5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이 피아노는… 며칠 전 체리와 함께 광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보았던 예의 그 피아노입니다.
다 낡아 볼품 없어진 악기에 싸구려 페인트 칠을 해 디스플레이용 구색만을 갖추고 있었던 그 피아노.
라가 알기로 이 피아노는 분명 광장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악기상이 출처였던 모양입니다.
이후 길거리를 재차 둘러보지만 역시나 사람은 커녕 개미 한마리 보이지 않는 공간입니다.
라 콕스:음……. (정말 영문 모를 일이다. 보는 눈이 없다면 안으로 들어가 봐도 상관없지 않을까…. 걸쇠 걸린 문을 흔들흔들.)

라 콕스:(들어갑니다.)
좌석에 앉아 악기상을 지키고 있던 가게 주인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목재 구조의 악기상 내부는 텁텁하고 간지러운 먼지 냄새가 납니다.
어디에서도 악기는 찾아볼 수 없지만 벽면 가득 들어찬 거대한 [책장] 은 그대로네요.
라 콕스:(안으로 들어서며 카운터를 훑는다.)
라 콕스:(아날로그 시계를 살핀다. 멈춰있겠지?)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시계는 약이 거의 다 되어가는 모양 새로. 세 개의 침이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그러모아 간신히 뜀박질 하고 있습니다.
하나 부자연스러운 점은 바늘들이 하나같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래 공전해야 할 궤도를 떠나지 못한 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일련의 반복된 패턴에 기이한 느낌이 들어,
라 콕스:
| 기준치: | 44/22/8 |
| 굴림: | 10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고장 났구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라디오를 건드려본다.)

주파를 맞춰보고 툭툭 두드려도 보지만 고쳐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10/5/2 |
| 굴림: | 96 |
| 판정결과: | 대실패 |

…… 치직, …그 누구도 미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인류는 역사에서 잊혀지게 될 것입니다. 한편 …가설이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그들은…전염병이 사실은 어떤 저주이며, 감염 경로가 특이하게도 …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주를 세상에 퍼뜨린 원인이 되는 [곡의 악보를 태우는 방법] 만이…… 치직…"
…이를 마지막으로, 라디오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마침내 수명을 다 한 것이겠지요.
라 콕스:(전체 인류의 70%가 사망했다. 그 전염병으로. 병은 사실 저주였으며, 해주하는 방법은…. 들려오는 소식이 사실이든 아니든 충격받아 마땅할 정보이긴 했다. 그럼에도 기이할 정도로 침착 유지하는 것은, 라 콕스라는 인물이 본디 그러했기 때문일 터였다. 평범한 인간이라기에는 과할 정도로 관조적인 태도를 내비치는 사람. 크게 동조하지 않으며 효율적인 해답을 추구하는 이. 그런 주제에 체리 애쉬와 관련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곳에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무어, 사랑이란 다 그런 것 아니겠나?)
(아직은 돌이킬 수 있다. 모순되지 않은 다른 결과를 발생시키면 되는 일이다. 라디오를 내버려 둔 채 책장으로 향한다.)

걷어내지 못한 먼지는 더욱 무거워졌고, 제대로 자리잡지 못해 절반쯤 튀어나와 있는 책자도 여럿 보입니다.
라는 불현듯 떠올립니다. 피아노를 그만둔 뒤 악보를 어떻게 관리해왔더라, 하고.
그래서 더 살필 만한 건 없나? 책장 모서리에 전에 보지 못했던 [달력] 하나가 박힌 못 위로 장식물처럼 걸려 있음을 발견합니다.
라 콕스:(방치했지……. 놓아둔 장소에 그대로 잘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달력을 가져와 살폈다.)

그곳에는 큼지막한 네 개의 숫자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2023년.
라 콕스: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98 |
| 판정결과: | 실패 |

길거리에는 사람 하나 오가지 않고 시야는 마치 흑백필름을 끼워 넣은 것처럼 생기 없었습니다.
미지의 구멍, 그곳에 마치 운명같은 이끌림을 얻어 겁없이 뛰어든 당신. 눈치챕니다. 이곳은 전에 살던 2020년의 시간선이 아닙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겪은 라 콕스,
라 콕스:
| 기준치: | 44/22/8 |
| 굴림: | 70 |
| 판정결과: | 실패 |
2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거나 악기상을 열고 나오면, 끝없는 열기에 데워진 아스팔트가 일렁이는 건너편 골목에서 누군가의 인영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실루엣을 바라보고 있자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라를 반깁니다.
"한참 찾았어, 몸은 괜찮아진 거예요?"
체리입니다. 대답을 바라고 건넨 말은 아니었는지,


이른 아침의 교실, 책상 위에 올라와있던 체리의 가방 사이에서 보았던 그 악보집이 틀림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당신은 딱 한 마디 정도 이야기 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과거의 당신을 찾기 위해 과거로의 리프를 앞둔 체리에게,
실제 '과거'의 라가 되는 당신은, 어떤 말을 던질 건가요?
라 콕스:과거의 나를 만나면…. 옆자리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어봐 줄래? 분명 좋아할 거야. (좋았거든. 아직도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해. 뒷말은 삼켜 낸다. 겨우 건넬 수 있는 단 한마디의 말, 그것치고는 시답잖으며 초라한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으로 되었다. 이외의 모든 감정은 제가 아는 체리 애쉬의 몫이지 않나. 그러니 지금은 아껴두기로 했다.)



그와 동시에, 라의 시야가 일순 아득히 멀어지고…
…다시 정신을 차리면 2023년에 묶여있던 몸은 다시금 2020년의 악기상 앞에 서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체리는 보이지 않고, 한가로운 골목길을 누비는 어린 아이들이 종종 눈에 들어옵니다.
구멍에 뛰어들기 전 당신이 손목에 착용하고 있었던 팔찌는 심하게 헤져 끊어져갑니다.
악기상 유리창 너머의 아날로그 시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정갈하게 돌아갑니다.
라 콕스:(순식간에 해져버린 팔찌를 가만 매만진다. 소원이 이루어질 때가 되었나? 그런 생각을 했다.)

2020년으로 돌아온 당신은…
라 콕스: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80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사망한 인구, 70%. 저주를 세상에 퍼뜨린 원인은 '어떠한 곡' ….
그 곡의 악보를 태우는 방법 만이.
아마도 이 세계를 구할 유일한 수단이겠지요.
라는 그 곡의 악보가 어디에 있었는지 떠올릴 수 있나요?
라 콕스:(계절 환상곡도, 겨울이 흘린 눈물도 모두 체리와 함께 있을 때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하나는 당신의 책가방 안에서, 하나는 음악실에서….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라 콕스:(이동합니다.)

한밤중의 여름은 습하니까요. 매년 이맘때쯤 장마전선이 북상하고는 했으니, 시간이 부지런히 흐른다면 며칠 안 있어 많은 비가 쏟아질 터입니다.
라는 목적지로 향하던 도중 몇가지 기현상을 목격합니다.
전봇대를 붙잡은채 119에 고열의 두통을 호소하다 잠들듯 바닥에 쓰러진 환자의 주위를 지나가던 사람이 일으켜 세우는 한편,
급히 출동하던 앰뷸런스가 어느 사거리에서 승용차와 부딪히는 등의 사고가 잇따라 발생합니다.
불가해하기 짝이 없는 세상의 불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왜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학교에 도착해 음악실로 향하면 정해져 있는 수순처럼 열려 있는 문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닫히지 않은 창문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의 유영에 빼곡히 덮인 커튼이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하늘댑니다.
그랜드 피아노 앞에 놓여있는 피아노 의자 뚜껑을 열면 수납서랍 한구석에 보관되어 있는 오래된 낡은 악보집 하나가 눈에 띕니다.
악보의 이름은…
라 콕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36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악보집을 습득함과 동시에 라는 낡아빠진 악보집 어귀에 자리하고 있는 어떤 징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크툴루신화> 판정 또는 <오컬트> 판정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5/2/1 |
| 굴림: | 40 |
| 판정결과: | 실패 |
라 콕스: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79 |
| 판정결과: | 실패 |

일견 누군가의 자필 사인처럼 보이는 문양은 꼭 도는 것 같기도 하고…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기이한 홀로그램같은 형상에 어쩐지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42/21/8 |
| 굴림: | 96 |
| 판정결과: | 대실패 |
3

이 악보를 태우면 아마도 지긋지긋한 전염병도, 저주도 사라질 것입니다.
악보를 태울만한 공간이 있을까요?
라 콕스: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9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라 콕스:(악보를 챙겨 들고 소각장으로 향한다.)

눈 앞이 하얗게 아른대는 듯한 잔상을 보았습니다.
과연 잔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물에서 올라오는 듯한 인광의 기둥은 평범한 사람의 의식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떠한 영상도 초월하는 재앙과 비정상의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단지 빛은 이제 새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감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색깔의 형체 없는 흐름은 구덩이에서 곧장 천장을 향해 솟구쳐 올라가는 듯합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39/19/7 |
| 굴림: | 91 |
| 판정결과: | 실패 |
3

순간,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듯한 역겨운 오존 냄새를 맡았습니다. 올 여름 내내 맡아왔던 비리고도 싱그러운 냄새입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25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이성 3 회복합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95 |
| 판정결과: | 실패 |

그 때, 강한 힘이 당신의 팔을 끌어당겨 음악실 밖으로 끌어냅니다.

…괜찮아요?
라 콕스:(조금은 얼떨떨한 낯. 음악실 안을 바라보다가도 당신을 마주 본다. 무엇을 보고 겪었든 간에 제게는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이 있다. 그러니 대답 대신 물음을 내뱉는다.) ……너는? 열병에 걸렸다고 들었어. 괜찮은 거야?


붙잡힌 통에 팔 전체에 전해지는 체온이 36.5 ℃를 훌쩍 넘어 섰음을 눈치챕니다.
체리의 몸은 불 위에 올려둔 물처럼 펄펄 끓고 있습니다. 이 상태로 쭉 당신을 찾아 헤매고 있던 걸까요?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그의 얼굴엔 당신을 살피려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라 콕스:(정말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당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떼낸다. 이어 당신의 이마를 짚는다.) 내가 할 소리야. 열이 이렇게나 나는데…. 난 이것만 처리한 뒤에 돌아갈 테니까. 응?

라 콕스:무리하면 안 되는 거 너도 알잖아.

라 콕스:(탐탁잖은 낯이다. 이어지는 짧은 한숨.) …도중에라도 버티기 힘들어진다면 얘기해줘야 해. 알겠지?

라 콕스:(체리와 함께 소각장으로 향한다.)

이 곳에서라면 악보를 태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교정은 벌레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합니다.
라 콕스:이걸 태우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했어.

라 콕스:왜 그래?

라 콕스:(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당신은 미래에서 나를 찾아온 것이 맞냐고, 왜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이냐고, 우리는 무슨 사이였냐고…. 다만 어째서 나를 믿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자신이 당신을 신뢰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을 테니 구태여 물을 필요도 없다.) 나도 그래. 그러니까…. (알아야 할 것들은 나중에 천천히 나눠 보자. 덧붙이며 악보를 태운다.)

그렇게 모두 전소해 검회색빛 잿가루만이 허공에 날릴 때 쯤,

라 콕스:음…. 책에서 본 건데, 시간의 역행으로는 여러 다른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더라. 그렇다면 역사도 변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꼭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 아닌, 세상의 진리를 설파하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한참을 침묵하던 체리가 다시 한 번 입을 엽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낡고, 오래 되었고, 허름하며, 손때 묻었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을 건네받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체리는 곧 쓰러질 것 같은 창백한 안색을 하고서 끊길 것 같은 목소리를 쥐어 짜내 한 가지 부탁을 남깁니다.
그 모습이 마치 한계에 다다른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꼭 그 광장이어야 해. 사람이 많은 곳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을 시간에, 반드시 이 곡을 연주 해줘야 해. 꼭이야.

무지개를 손으로 잡을 수 없고 햇빛의 뜨거움을 유리병 속에 담지는 못하는 것과 같은.
비가 퍼부을듯 빽빽한 수증기가 마른 길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날씨 탓일까요? 오늘의 해는 일찍이 시들 요량인가봅니다.
하늘을 켜켜이 감싼 먹구름이 기묘하게 반짝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중앙에 마련된 분수대 앞에 놓여 있는 낡아빠진 피아노가 눈에 들어옵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페인트 칠을 해두었지만 좀처럼 눈길을 사로잡지는 못하는 낡고 오래된 악기가 꼭 고물처럼 보입니다.
점점 더 무채색해지며, 점점 더 다채로워지는 모순적인 세계에 도태되어 있습니다.
그 허름한 피아노에 다가서는 것은 오로지 라, 당신 뿐이겠죠.
라 콕스:(가져온 악보를 악보대 위로 내려놓는다. 지금이 몇 시지?)

라 콕스:(건반 뚜껑을 열고 의자에 앉는다. 무대에 올라온 연주자에게는 주어지는 유예가 있다. 그 시간만큼은 오롯이 연주자만의 것이었으니, 라 또한 서두르지 않고 그 시간을 누리기로 했다. 의자의 높이를 제게 맞추고 뻑뻑한 페달을 밟아 길을 들인다. 꽉 채워 둔 셔츠의 단추를 하나쯤 풀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그리고는 심호흡. 낡은 건반 위로 손을 올린다.)
(네가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 어째서 그렇게까지 당부했는지는 알지 못해. 하지만 짐작 가는 것은 있지. 그러니까…. 체리, 날 찾으러 와.)

음표를 빼곡히 채워 넣은 악보는 종이가 어찌나 얇고 덧없는지 바람 한 점에도 부서질 것처럼 가녀립니다.
이 악보의 어느 구석이 그렇게나 특별한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체리는 당신에게 간곡히 부탁했었죠.
언젠가 당신이 최초로 건반에 손을 올려놓았을 때처럼 어깨 끝을 살짝 떨면서.
차가운 공기 한 품 찾아볼 수 없는 습하고 무더운 여름의 정가운데서 마침내 건반에 손을 올려둡니다.

어깨를 익힐듯 강렬하던 더위가 한풀 꺾입니다. 추억으로 남길 뻔했던 감각들이 되살아남을 느낀 것은 그 때였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도 괜찮나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 번 연주를 그만 두었던 당신이 과연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모든 의지를 잃고 주저앉아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도망치듯 반대로 뛰어 가능한 먼 곳으로 숨었던 당신은 굳어버린 손가락으로 다시 누군가의 발걸음을 멈춰 세울만한 연주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눈 앞에 놓인 골목의 폭이 서로 다를 뿐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주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언젠가 좌절하지 않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선택을 번복하고 버텨내는 겁니다!
라 콕스: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38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이하게 물들었던 별빛 하늘이 풍향을 따라 꽃가루처럼 걷히고 가슴 위에 얹힌 듯 반죽되어 있던 아픔과 좌절이 단 하나의 점이 되어 흔적을 달리합니다.
곡이 끝맺음과 동시에 건반에서 손가락이 떨어지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날립니다.
뉘엿뉘엿 져가던 하늘에 수놓였던 수억 개의 별들이, 세계를 숙주삼아 성장하던 색채의 무리가 모두 걷혔음을 깨닫습니다.
라 콕스, 피아노 성장치 +86
모든 인파가 흩어지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 어느 구석에서도 체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 …
체리의 전학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돌아온 월요일의 아침에서였습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던 고열의 전염병 사태가 완전히 종식되고, 혼란했던 세계는 평화를 되찾습니다.
고열에 시달려 병결했던 아이들도 모두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울다 지친 매미가 늦여름의 끝에서 기나긴 생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10대의 끝, 졸업식을 하루 앞둔 당신은 책상 사물함 깊숙한 곳에서 반과 반으로 접힌 쪽지 하나를 발견합니다.
라 콕스:(쪽지를 펼쳐 본다. 손목에는 해져버린 팔찌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끊어지지 않게끔, 끊어질 수 없게끔 새로운 실을 덧대어 이어낸 것.)

반짝, 하고. 마치 빛을 받은 유령의 신호처럼.
장마전선 소식이 들려오던 여느 2023년의 여름. 세간에 알려진 '정체불명의 전염병'사태가 종식된 날로부터 약 3년이 흘렀습니다.
좁디 좁은 골목을 돌아 울타리 어귀에 멈춰선 당신은 영업 종료 팻말이 걸려 있는 악기상 건물을 바라봅니다.
관리 되지 않아 썩어가는 나무벽은 꼭 악기상이 아닌 잊혀진 어딘가의 골동품 가게를 연상케 합니다.
그나마 빨갛게 돋아난 덩쿨장미가 건물 외벽을 타고 자라난 풍경만이 음산함을 닦아낼 뿐입니다.
라는 걸쇠가 앞길을 가로막은 악기상 처마 아래서 낡아빠진 [피아노] 한 대를 발견합니다.
라 콕스:(어쩐지 익숙한걸. 피아노 가까이 다가서 본다.)

그간 이미 여러 차례 이 악기상을 방문했던 라라면, 전에는 이 피아노가 이 자리에 위치해 있지 않았음을 떠올릴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그날 이후로 행방이 묘연했던 피아노의 재등장입니다.
악보대 위에는 반듯하게 펼쳐진 [악보] 하나와 더불어 사용감이 남아 있는 [녹음기] 하나를 발견합니다.
라 콕스:이것도 익숙한 거고. (녹음기를 확인해본다.)

그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전원을 켜 볼 수 있는 모양입니다.
라 콕스:(전원을 켠다.)

텅 비어있는 폴더 속에서 음성메시지 한 건과 그동안 당신 앞에서 연주한 횟수 만큼의 피아노 연주 녹음 파일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라 콕스:(음성메시지를 재생한다.)

노이즈낀 음질 틈을 파고든 체리의 목소리가 새파란 여름의 골목길에 흩뿌려집니다.
'안녕 라. 피아노 연주 잘 들었어요.'
'눈치 챘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3년 후의 미래에서 온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살던 미래로 돌아가.'
'라와 함께했던 시간이 너무 즐거워서, 이대로 과거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날 마음을 먹었어요.'

'과거로 향하는 구멍에 뛰어들기 직전 악기상 앞에서 널 마주쳤던 일이 있어.'
'그런데 그게 실은 '너'였던 거야. 내가 찾아 헤매길 자처했던 3년 전의….'
'신기하지 않아요? 내가 헤매기도 전에 네가 먼저 나를 만나러 와줬다는 게.'
'나는 마치 음악실의 유령처럼 그 어떤 기척도 내지 않고 숨죽인 채 라가 이곳에 이끌려 스스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정말이지 유령처럼, 질량도 형체도 존재하지 않은 채로. 무더운 과거의 여름 속에서 오롯이 목소리만으로 너를 홀려낼 생각 뿐이었던 음악실의 유령처럼…'

라 콕스:(녹음기를 내려두고 시선을 돌린다.)

피아노 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당신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립니다.
붉은빛 기다란 머리카락의….
2023년, 두 번째 첫 만남.
알고 있나요? 두 사람은 괴멸해가던 일전의 미래에서도 2023년에 이 피아노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어떤 악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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