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 속의 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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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풀벌레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황궁입니다. 모두 잠든 시각이라 드문드문 순찰하는 근위병들, 늦게까지 일하는 주방 하인 등을 제외하면 사람이라곤 찾아보기 어렵죠.
이안과 당신은 궁내 성당 근처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최근 황후는 잠들었다가도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고, 종일토록 불안해하거나 공식 석상에 나가기를 거절하는 등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그럴 법도 하죠. 이 구중에 갇혀 무시당한 것도 벌써 몇 년, 황후로서 무도회 등에 나서더라도 벽의 꽃보다 못한 취급을 받은지 오래입니다.
황제조차 그를 무시하며 폭언하기 일쑤죠. 누구라도 쉽게 견디기 어려운 일일 겁니다. 그럼에도…….
이안 브란트:(당신과 함께 있을 적엔 퍽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유일하게 '사람' 같은 낯짝을 하는 순간이었다. 오늘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다리 아파, 걷기 싫어…. (별것 아닌 어리광부터 부리는 것이다.)
첸 티엔:(원체 수줍었던 탓에 사람을 대하는 것이 서툴렀다. 말을 더듬는 것은 일상이었으며 상대의 눈 하나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하니 사교계에서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타인의 눈을 피해 벽에 바짝 붙어있다가도 기어이 커튼 뒤로 몸 숨겨버리고 마는 덜떨어진 영식. 평판이 좋지 못했기에 당신의 시녀가 되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당신의 시녀가 되기 위해 이렇게 살아온 셈이지 않나. 그러므로 첸 티엔은 당신과 함께 있을 적엔 퍽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수줍어하며 말 더듬는 것은 일상이었으나 당신의 시선 한줌 피하는 일은 없다. 오늘도, 보라. 쩔쩔매면서도 곧게 눈을 마주한다. 붉은 기가 볼을 홧홧하게 물들이는 와중에도,) 어, 업어… 드릴까요? 여, 기는…. 사, 람들이 오지 않으니까. 괘, 괜찮을 거예요.
이안 브란트:아니이, 그냥…. (말 끝을 늘인다. 편한 구석이 있을 때만 보이는 말투.) 쉬고 싶네. 앉고 싶어. (앞장서 걸음을 옮기더니 아름드리 나무 아래의 한 구석에 덜컥 앉아버렸다. 값비싼 옷감이 망가지는데도 아랑곳 않고 당신더러 손짓하기만 한다.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종종 당신에게 업혀 다니기도 했을 터이지만, 오늘은 업히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가끔 그런 변덕을 부리곤 했다.) 옆에 앉아.
첸 티엔:앗…. (종종걸음으로 쫓아가 당신의 곁에 무릎을 꿇는다. 복종을 표하는 행위는 아니고, 그저 습관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 낯짝으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빨간 장미가 수 놓인 손수건을 펼친다.) 오, 옷이 더러워질 거예요. 이걸, 까, 깔아드릴 테니까…. 위에, 앉, 으시면.
이안 브란트:가질래. (덥썩 당신의 손수건을 갈취했다……. 뺏어들다시피하는 손길과는 상반되게도 손수건을 고이 두 번 접어 품 속에 집어넣었다.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편하게 앉아, 무릎에 앉게.
첸 티엔:(대답 않고 볼 발그레 물들이기만 한다. 기실 당신에게 주고 싶어 수놓은 물건이었다. 용기 내지 못해 건네지 못했지만. 붉은색은 자신을 빼닮은 색이었으니 손수건을 사용할 때만이라도 당신의 편이 있음을 떠올려주었으면 했다. 물건이 주인을 찾아갔으니, 이번에는 제 몫의 손수건을 만들어 볼까 싶다. 연보랏빛 라벤더를 수놓는 것도 좋겠다. 불경한 생각을 잘도 하며 자세를 단정한다.) 오, 오늘도…. 자장가를, 부, 불러 드릴까요? 그으, 저, 저, 저번에, 드, 드, 듣기 좋다고, 말씀해주셨으니까….
이안 브란트:(옆머리를 장식하던 머리 장신구 ―그의 머리색과 똑닮아 빛나는지도 모를 연보라색 보석이 박혀 있는―을 떼어 당신의 손에 쥐였다.) 이건 네가 가지렴.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 이로써 현재 황후에게 눈에 띄는 장신구라곤 없다. 자연스레 당신의 무릎 위에 앉았다. 황후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문을 입증하기라도 하는 듯 야윈 몸. 비스듬하게 모로 앉아 당신에게 체중을 실어 기댄다.) 응. 지금 불러 주면 안 돼?
첸 티엔:(흐읍. 숨을 들이켠다. 이런 걸 받을 줄은 몰랐어요. 표정 위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감정이 하나, 좋은 것만 입고 화려한 것을 잔뜩 두르셨으면 해요. 둘, 조금 더 많이 드시면 좋을 텐데…. 마지막으로 셋. 세 가지의 감정이 가감 없이 낯 위를 스쳤다. 머뭇거리면서도 당신의 허리에 팔을 두른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혹시라도 당신이 제 무릎에서 떨어질까 봐. 그러니 이 행동은 흑심이 아닌 애정임이 틀림없다. 다리가 바닥에 맞닿아 떨어질 곳이라곤 어디에도 없음에도 그리 생각했다.) 바, 깥에선…. 부, 부끄러워요. 하지만…. 오늘, 저녁을. 조, 조금만, 더 드셔주신다고 약속해주신다면…. 히, 힘내볼게요.
이안 브란트:(당신의 표정은 그의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숨죽여 웃더니 허리에 둘러진 당신의 한 손을 끌어 새끼손가락끼리 엮었다.) 자아…. 약속할게. 어서.
첸 티엔:내, 내일 아침도… 다섯 숟가락, 더 드셔 주셔야 해요. (슬그머니 조건 붙여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요구라고는 모르던 이가 당신과 관련된 일이면 태도를 달리했다. 다만 요령 없는 것은 여전한지라, 확답 듣기도 전에 음을 흥얼거린다. 당신이 잠 못 들던 밤이면 줄곧 불렀던 노래가 허밍이 되어 흘러나온다.)
이안 브란트:원하는 게 많구나. (그저 저만을 위한 선율에 몸을 맡길 뿐, 굳이 확답하지 않았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길 반복하였으니 어둠 아래 새하얀 눈동자가 별처럼 깜박거렸다. 듣기 좋은 음성이었으나 그대로 칭찬하였다간 몸 둘 바를 몰라할까 싶어 당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의 음성이 그칠 즈음 조용히 속삭인다.) 나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야. 구태여 내게 신경 쏟을 필요 없다는 의미란다.
첸 티엔:(자신도 모르게 허리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언제 숨을 참았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날숨을 터트렸다.) 오래오래…, 해,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목소리가 젖어 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첸 티엔은 단 한 번도 당신이 없는 궁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하실 수 있, 게끔, 모, 모시고 싶어요. 아, 안 될까요?
이안 브란트:이곳에서,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겠어. 당신의 앞에서도 회의적인 말들은 숨길 수가 없었다. 고개 떨어뜨린 채 가로젓는다.) 내게 부질없는 희망 거는 것보단…. 오래오래, 행복하게 모실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좋을걸. 그게 효율적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잖아, 덜떨어진 게 아닌 이상. (부러 모진 말을 내뱉는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덤덤한 얼굴로 말이다.)
첸 티엔:더, 덜떨어진 사람이라…. 폐하를 모, 실 수 있게 되었는걸요. (그러니 제게 있어 덜떨어진 영식이라는 말은 더는 비난이 될 수 없다. 발개진 눈가에 눈물 그렁그렁 매단 이치고는 단호하게 말 뱉었다. 상처받은 기색이라곤 일절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당신이 웃지 못하는 것이 슬펐다.)
내, 일은…. 꼬, 꽃반지를 엮어 올까요? 예쁜 것, 조, 좋아하시니까…. (사족이 길어진다. 당신이 한 번쯤 웃어주었을 적의 이야기를 모두 꺼낼 기세다. 그렇게라도 살아가 주었으면 했다.)
이안 브란트:(상처 주는 말을 듣더라도 외려 저를 걱정하는 모양새란, 평소 같았으면 진즉 바람 빠지는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바보, 으레 애정이 담긴 단어를 중얼댔을지도 모른다. 하나 오늘은 다르다. 웃음기 멎어든 지 오래이다. 말간 웃음이나 애정 섞인 타박 대신,) 왜?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러니까,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왜, 너도…. 내가. (마른 침을 삼켰다.)
불쌍하니? (말을 마저 덧댄다. “아직?” 싫은 기색 없이.)
첸 티엔:(금세 눈썹을 늘어트린다. 눈물 한 방울쯤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처음은 그랬을 것이다. 동정에서 시작된 감정이 크기를 불려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와 당신이 불쌍하냐고 묻는다면,)
아, 니요. 부, 불쌍하지 않아요. (망설임 하나 없이 고개를 저어낸다. 당신의 처지에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당신이 겪는 수모에는 화가 났으며, 당신이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적이면 슬퍼하기도 했다. 하나 당신이 불쌍하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의 웃는 모습은….)
소, 중한 분이시니까요. 제, 제게는.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지 않나. 당신은 별을 닮은 새하얀 눈만큼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더는 동정하지 않는다.)
이안 브란트:울지 마……. (마른 손 끝이 더듬대며 당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당신이 저를 동정하지 않는다는 사실, 애초부터 알고 있었을 터이다. 불그스레 달아오르는 뺨, 오롯이 저를 향하는 붉은 눈. 당신이 내비치는 모든 언행은 사랑의 색을 띠고 있는데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하나 미쳐버린 황후는 때때로 모든 것을 회의했다. 소중하며 잃고 싶지 않은 것일수록 의심하고, 다시 두려워했다. 당신의 사랑이 그러했다. 말과 말 사이 간극이 길어진다.)
…그만 돌아갈래. 추워. (결국 말길을 돌린다. 온통 옷자락에 싸여 있으니 추위는 마땅한 이유가 될 리 없었지만, 그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첸 티엔:(제 감정보다는 당신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황급히 눈을 비빈다. 챙겨 온 숄을 펼쳐 당신의 어깨에 두르고, 여윈 몸을 감싸 안듯 부축한다.) 네, 네에. 어서 돌아가요. 아, 앓기라도 하시면 안 되니까….
이안 브란트:나아, 손 잡아 줘…. (제자리에서 걸음 떼지 않고 당신의 서늘한 손을 찾아 쥐기만 했다. 당신이 명령을 듣기도 전에 먼저.)
첸 티엔:차, 차가울 텐데요. (웅얼거리면서도 손을 맞잡는다. 직전 울었던 것은 잊기라도 했는지 볼이 붉다.)
이안 브란트:응, 차갑네….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놓지도 않았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를 떼며 묻는다.) 나를 좋아해?
첸 티엔:여, 역시, 어, 업히시는 게…. 아얏. (염려 어린 말을 뱉는 것도 잠시, 예고 없이 들이닥친 물음에 혀를 깨물고 만다. 티 나게 당황한 낯, 어쩔 줄 몰라 하며 허공을 배회하는 눈동자, 급작스럽게 가빠진 호흡, 이 모든 것이 첸 티엔의 대답을 짐작게 할 것이다.)
이안 브란트:(떨림이 미약하게 잦아들었다. 안기듯 기대며,) 대답. (재촉했다.)
첸 티엔:(속삭인다. 타인이라면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크기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당신만은 언제나 제 마음을 알아주었으니….) 조, 조, 좋아해요….
이안 브란트:입 맞추고 싶은 좋아해야? (대뜸 이런 질문을 했다. 농이라기엔 그 또한 목소리를 낮추었다.)
첸 티엔:(어디 한 곳 붉지 않은 부분이 없다. 본래 그의 성정이었다면 다섯 시간은 고민해도 모자랄 질문이었으나, 지금은 늦은 밤이며 당신이 춥다는 말까지 하였으니 대답 내어놓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지 않나. 닿고 있어도 더 닿고 싶어지는 것.)
이안 브란트:(당신의 끄덕임을 분명하게 보았을 텐데 아무 대답이 없었다. 수긍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 분간이 어려울 즈음, 당신의 뺨에 입술을 스치듯 가져다 댔다.) 이제 업힐래.
첸 티엔:(척 보기에도 고장 난 것처럼 삐걱대기 시작했다. 물기 어린 눈동자는 어느 순간 혼란에 빠진 이마냥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움직임을 보이는지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당신 앞에 몸을 숙여 등을 내보인다.) 네, 네에? 네…. 네.
이안 브란트:…역시 업히는 것보다, 안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팔 잡아당겨 당신을 껴안았다. 타인이 보았다면 기겁하였을 만한 일임에도 별달리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후일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처럼.)
나 좋아하지 마…. (그리 말하며 고개를 든 이는 당신이 사랑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쁜 듯 웃었다. 그의 행동도 감정선도, 삽시간에 뒤바뀌는 이유란 뻔하다. 사랑이거나, 미쳤거나, 혹은 둘 다거나….)
첸 티엔:(벌벌 떨다가도 당신의 웃음을 목도하면 넋을 놓아버리고 만다. 그래, 꼭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조, 좋아하지 않는다면…. 사, 랑은, 해도…. 되, 되는 거예요?
이안 브란트:그건 더 하면 안 되는 거지, 바보…. (목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빨리 받쳐 줘, 재차 어리광을 부렸다.) 나는 경고했어.
첸 티엔:앗…. (서둘러 당신을 받쳐 든다. 귀 끝 새빨갛게 물들인 채 몇 분이나 걸었을까, 우물거리며 묻는다.) 저어, 그, 그건…. 어떤, 의미의 경고인가요? 도, 돌려받을 수 없다는 이유라면…. 괘, 괜찮은데.
이안 브란트:불 가까이 가지 말라는 이야기, 많이 듣잖니. 같은 거야. 다칠까 봐…. (작게 몸을 떨었다가도, 숨을 크게 들이쉬어 당신의 체향에 안정을 되찾는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나도…….
첸 티엔:저, 저는…. 다쳐도, 조, 좋을 것 같은걸요. (여전히 볼이 붉다. 오롯이 설렘에서 비롯된 말들.) 그러면…. 더, 오래 기, 억할 수 있잖아요.
(달빛이 닿는 길을 걷는다. 어슴푸레한 빛이 어두운 길을 밝혔다. 달빛 아래 길도 밝고 두 사람도 밝았다.) 전, 해, 행복해요. 폐하께서, 웃어주실 때마다….
이안 브란트:(기억하지 않는 편이 나은 것들도 있기 마련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랑에 잠긴 듯한 당신의 표정만 아니었더라면, 분명히 그렇게 전하였을 것이다. 단지 당신의 목을 더욱 강하게 껴안았다.) 웃어주지 말걸 그랬나 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첸 티엔:그, 러셨더라도…. (사랑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달도, 정원의 꽃도, 풀벌레도 모두 듣지 못할 밀어를 속삭인다. 오로지 당신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을 터다.) 폐, 폐하를 뵙기 전에는, 누, 군가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게. 이, 이렇게 좋은 것인 줄은 몰랐는걸요.
이안 브란트:(음절 하나 흘려듣는 법이 없다. 저 또한 그러하다는 말을 내놓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이안 브란트는 그리 솔직한 이가 아니었다. 또한 그의 진정한 사랑은 ‘놓아줌’에 있었기에 더욱이 긍정할 수 없었다.) 처음이 어려울 뿐이지. 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날지 아니….
(저 멀리 근위병의 불빛이 보이면 어깨를 툭툭 쳐 제 발로 걷기 시작했다. 문득 입 모양으로 말했다.) 고마워. (원체 감사 표현에 인색한 성정이거니와, 사의를 표해야 할 위치의 사람도 아니었으니 당신에게 매번 돌봄 받으면서도 고맙다는 말 한 적 없던 이가 말이다.)
첸 티엔:처, 음이 아니에요. 마, 마지막이에요. (수줍은 낯. 누구도 보지 못할 미소를 그렸다.) 제가…. 그렇게, 저, 정했어요.
(어깨에 손길 닿아오면, 용케 의사를 눈치채고 당신을 바닥에 내려주었다. 고르게 닦인 길임에도 울퉁불퉁한 길인 것마냥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리고는 당신의 뒤를 따른다. 부스스한 백발이 밤바람에 맞추어 이리저리 나부낀다. 평소보다 더 많이 살랑이는 것을 보면 필시 걸음이 경쾌했기 때문이리라. 처음 들은 칭찬에 잔뜩 신이 난 사람처럼, 그렇게.)
이안 브란트:(마지막…. 수줍음 가득한 말 들으며 당신의 찬 손 스치듯 붙잡았다가 놓았다. 한 발 먼저 내딛는다. 당신의 손을 떠나자마자 영 휘청이는 걸음걸이. 그럼에도 당신의 손 닿지 않을 만치 앞서 걷기 시작했다.)
티엔. (궁으로 들어서기 전 문득 뒤돌았다. 드물게도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 바람결에 뒤섞여 흩날리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던가. 무어라 덧붙이려 입술 달싹였으나 그 부름이 끝이었다.)
:그 모습을 끝으로 이안은 황후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시녀장에게 심부름을 받아, 황제전에 방문할 일이 있었지요. 황후궁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깁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첫머리부터 '폭풍우 치는 밤 비에 젖은 시종이 달려들어와 외치는' 희곡을 보면 누구나 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극의 성질은 본래 뻔한 것이어서, 벼락이 궁성 그늘을 날카롭게 밝히던 밤, 꼭 무슨 사건이라도 터질 것 같다는 하녀들의 수군거림 속에 기어코 그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황후 전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가장 처음 현장을 발견한 시종은 즉시 황제에게로 달려왔고, 시간이 시간인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찬 회의실 같은 곳을 혼란에 빠트리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붐비는 저녁 무도회장으로 이 소식을 가져왔다고 달라질 것이 있었을까요? ? 황제는 잠자리에 들기 전 책을 읽고 있었고, 당신은 마침 황제전의 심부름을 해결하고 돌아가려던 차였습니다.
황후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바로 조금 전인데요. 갑자기 승하라니요?
이 경악할 소식에 황제는 짧게 탄식했을 뿐입니다. 귀찮은 일을 맞닥뜨린 사람 같은 태도였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황후의 안위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죽는 것은 조금 곤란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전부 파악하진 못했어도 황후의 친정에서 끌어 온 자금으로 새로운 일 몇 가지를 벌이려 한다는 소문 역시 이미 퍼진 내용이었고요.
어쨌든, 사람이 죽었다니 어떻게 된 것인지 가서 보기는 해야 할 것입니다. 황제가 몸을 일으켰고, 당신도 급히 그를 따라 황후궁으로 움직입니다.
첸 티엔:(무슨 정신으로 황제를 따라갔을까? 넋 놓은 이마냥 걸었을 것이다. 고개를 앞으로 주욱 뺀 채 발을 내디딘다. 잔뜩 긴장한 몸에 체중이 실리니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휘청이기도 했다. 아냐, 조금 전까지 함께 있어 주셨는걸. 돌아가면 자장가를 불러드리기로 했는데…. 감성과 이성 모두 부정을 표한다. 이 모든 것이 질 나쁜 장난임이 분명했다.)
:들어설 때부터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제국의 안주인이 기거하는 곳이라기엔 수가 적은 사용인들이 저마다 공포에 질려 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도착하자 모두 황급히 머리를 조아립니다.
그는 가로막는 사람 하나 없이 황후의 침실로 직행합니다. 당신도 마음이 급하겠지만, 황제보다 앞서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겁니다. 그 뒤로 그나마 침착한 시녀장 백작 부인과 하녀들이 뒤따릅니다.
침실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들어서던 황제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립니다. 끔찍한, 아주 끔찍한…….
남국 바다를 그대로 떼어 가둔 유리 온실에서 자라난 듯한 이, 숨죽여 아름답게 웃던…….
찐득찐득한 피가 엉겨붙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그것이 도저히 생전의 황후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팔과 다리는 기이한 각도로 꺾였고, 눈, 코, 입, 귀, 부위를 가리지 않고 온몸의 구멍에서 혈액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혼탁한 눈을 홉뜬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얼굴은 역할 정도로 희게 질려 비위가 약한 사용인 몇은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날 지경이었습니다.
:목욕 직후에 변이 발생했는지 젖은 머리카락이 정돈되지 않은 채 풀어헤쳐졌고, 차림새 역시 가벼운 나이트가운이었습니다. 벗겨진 슬리퍼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이성판정 (1/1d3)
첸 티엔: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4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탄식 속에서 황제와 시녀장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황제: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시녀장: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목욕하신 직후 앉아서 시중을 받으시다 갑작스레… 갑작스럽게 피를 토하며 쓰러지셨습니다.
자작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자작이라면 황궁 전담 의사인 월도프 자작을 이르는 것입니다. 과연 시체 곁에 시립한 그가 난처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녀장: 시녀장, 시녀 하나, 하녀 둘, 이렇게 도합 네 명이 황후의 목욕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고, 황후께서는 물에 몸을 담근 채 잠시 잠에 드셨습니다.
한 시간 정도 목욕을 한 후 침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으셨으며, 황후의 머리카락을 말리기 위해 타올을 든 순간 갑자기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셔서…….
하녀 하나가 급히 자작을 부르러 갔고, 5분도 되지 않아 도착하였으나 황후는 이미 절명하여…….
:동석했던 시녀들과 하녀들은 겁에 질려 떨면서도 시녀장의 증언이 사실이라고 대답합니다. 황제가 몇 가지 더 질문했지만 답변으로 미루어 알 만한 단서는 없었습니다.
황제는 짜증스럽게 침실 안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새벽 동안 철저히 조사하여 진상을 가려내라 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조는 갑작스럽게 횡액을 당한 반려의 사망을 밝혀내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에 가까웠죠. 이 급사急死가 황실의 책임이 아님을 밝혀라.
신 앞에서 평생 함께 걸을 것을 맹세한 아내가 비참하게 죽은 사건을 두고 지시할 만한 일은 아니죠. 그의 취급이 늘 이랬습니다.
딱히 가지고 싶진 않지만 내버려두기엔 둘러싼 배경이 아까운, 그래서 못난 취급을 하며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두고 필요할 때에 데려다 쓰기는 해야 하는….
애초에 황제가 그를 고른 이유부터가 그러했으니 이
:제와 놀랄 까닭도 없지 않던가요. 황제는 비탄도 없이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잠시 후 시신을 수습할 의사와 보조인이 두 명 더 왔고, 시녀장은 휘하 사람들의 입단속을 하기 시작합니다. 침실을 둘러보며 간단한 면담과 조사를 할 수 있습니다.
첸 티엔:이, 이럴 수는…. 폐하가, 왜…? (읊조린다. 얼빠진 목소리였다. 아직도 상황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비틀대며 걷더니, 시신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앉는 것보다는 쓰러지는 것에 가까웠다. 무릎과 바닥이 맞닿으며 쿵, 소릴 냈다.)
:시신에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역한 기분을 느낍니다. 이성판정(0/1)
첸 티엔:
| 기준치: | 49/24/9 |
| 굴림: | 21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시신이기에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굉장히 차갑고 어딘가 무기질적인 느낌을 줍니다. 죽은 사람의 시체라기보단 지독하게 잘 만든 나머지 도리어 불쾌한 도자기 인형 같다는 인상입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나이트 가운을 입었고, 연보랏빛 머리카락은 아직 덜 말라 젖은 상태입니다. 눈과 코, 귀, 입가에서 모두 피가 흐른 듯합니다. 특히 토해낸 피가 많은지 가슴팍에 검붉게 뭉친 핏덩이가 튄 흔적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눈은 아직도 뜬 상태로요. 발은 화장대 의자 방향, 머리는 벽 방향입니다. 천장을 바라본 자세로 쓰러졌습니다.
첸 티엔:
| 기준치: | 41/20/8 |
| 굴림: | 19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이 넓은 곳에서 당신의 편은 오직 저 하나이니,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익히려 들었다. 의학 지식 또한 마찬가지다.)
:현재 시간 기준으로 사망한지 30분에서 1시간 이내로 추정됩니다. 그럴 만한 환경이 아닌데도 사후 경직이 빠른 듯해요. 벌써부터 턱 주변이 조금 굳었습니다.
또한, 얼굴이 몹시 창백하고, 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평균 이상으로 손발이 굉장히 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첸 티엔:(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사를 돌아본다.) 폐, 하께서는, 정말로…?
자작: 그렇소, 이게 무슨 변고인지….
첸 티엔:하, 지만…. 치, 침소에 드시기 전까지만 해도, 사, 산책을 다녀오실 정도셨어요. 이렇게, 갑자기, 벼, 변고를 당하시는 건…. 이상해요.
자작: 그것은 나 또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오. 당신은 저런 병을 들어본 적이 있소? 의사인 나조차 들은 바가 없는 일이외다.
저렇게 칠공에서 피를 쏟으실 정도라면, 갑자기 외부에서 큰 충격, 그러니까 공격 같은 것을 받아 내장이 크게 손상되는 급의 상처는 입어야 하오. 멀쩡하시던 분이 갑작스럽게 저렇게 되셨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군.
첸 티엔:저, 정말로요. 기운, 없는 모습은… 자주, 보, 보여주셨지만, 이렇게 되실 정도는 결단코 아니었어요…. 자, 자작님께서는 저명한 의사시니, 호, 혹시라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셨다면….
| 기준치: | 41/20/8 |
| 굴림: | 46 |
| 판정결과: | 실패 |
(최선을 다해 당신 말이 다 맞아요 표정 지어봄….)
| 기준치: | 41/20/8 |
| 굴림: | 32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자작: (나는 천재 의사군...) 당장 검시한 바로는 눈에 띄는 상처 또한 없소. 지금으로써는 쉽게 원인을 밝히기 어려우니, 어느 의사를 불러다 놓아도 비슷하게 말할 거요.
다만... 조심스러운 주제지만 맹독에 중독되면 이런 증상으로 죽는 경우가 있다오. 하지만 왕궁까지 반입하려면 반드시 극소량이었을 테고, 황후께서 입에 대는 것이라면 필히 기미를 거치지 않았겠소?
기미와 관련된 것이라면 시녀장에게 묻는 편이 빠르겠지만 말이오.
첸 티엔:앗…. 그,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비틀대며 일어나 곧장 시녀장에게 향한다.)
저어, 폐, 하께서…. 모, 목욕 전에 무언갈 드시진 않으셨나요? (냅다 묻는다. 그렇다. 첸 티엔에게 화술이란 찾아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황후가 입궁할 때부터 함께 따라 들어와 수족처럼 그를 모시던 최측근 시녀장입니다. 굉장히 창백하고 자세히 보면 손수건을 쥔 손을 떨고 있지만, 어떻게든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려 애쓴다는 느낌입니다.
시녀장: 목욕 중 음료를 마셨네. 원래 자주 마시던 와인이고, 오늘도 황후께서 요구하셨지.
다만 자네가 음독의 가능성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라면 목소리 낮추는 게 좋겠네. 식사는 주방에서 한 번, 식사 올리기 전 막내 시녀와 경력이 긴 하녀가 한 번씩 더 기미하니 독이 든 음식을 먹을 리는 없다네.
생각해 보게. 만일 이 사건이… 자네나 내가 생각하듯 '우연히' '운이 나빠서' 벌어진 일은 아니라 쳐도 말일세.
사교계에든 황궁에든 전하를 시기하거나 음해하던 세력은 넘쳐난다네. 하지만, 바꿔 말하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전하께선 목숨만은 안전하셨던 게야.
한 사람을 겨냥하여 싫어하다 보면 그 자체로 일종의 결속력을 갖기 마련이지. 모두가 ‘쉽게 물고 뜯을’ 대상으로 전하를 남겨 놓은 것이 수 년째이지 않은가?
폐하마저도 전하를 크게 홀대하셨지만, 마음에서 멀어져 있는 것과 전하께서 그 자리에 계셔야 쓰임새가 있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지.
시녀장: …지금까지의 상황이 그랬다는 것이고,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무슨 음모가 꾸며졌는지 모르니 무어라 다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말일세.
첸 티엔:하, 지만…. 시, 시녀장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런 쓰임을 가지신 폐하께서…. 이, 이렇게 돌아가시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의문 표하면서도 생각했다. 당신의 쓰임이라는 게, 고작 이런 것이어서는 안 되지 않나.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만을 먹으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살았어야 할 사람인데.)
시녀장: 그렇지, 다만... 전하께서 최근 급격히 용태가 나빠지시기는 했지 않던가. 몸이 아프신 게 아니라 마음이……
식사도 자주 거르시고, 큰 소리가 나면 지나치게 놀라시거나… 사람 앞에 나서야 하는 행사를 피하시거나. (목소리가 점점 떨렸다.)
갑작스럽게 나빠지셨다기보단 쭉 좋지 않으셨던 거지만, 최근 유독 부정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으니, 어쩌면 이미 죽음을 고려하고 계셨던 것은 아닐지….
그렇지, 자네도 들은 적 있지 않은가? 요즘… 모시는 아랫사람들에게 자꾸 선물 같은 걸 주고 그러지 않으셨는가. 갓 들어온 시녀 아이가 갖기엔 과한 귀품을 내리시거나, 하녀에게 금화를 쥐여 주시거나…….
그런 말씀도 하신 적이 있었지. ‘내가 이런 상태로 오래 살지는 못할 테지. 언제고 나쁜 일이 생기면 자네들은 내 친정에 추천서를 부탁해 좋은 곳으로 옮겨 가도록 해. 그 정도는 도와주시겠지…….’
그때부터 우리가 주의를 했어야 했는데……
첸 티엔:(자신도 모르게 품에 손을 넣어 직전 받았던 머리 장신구를 꾸욱 쥔다. 손바닥에 자국이 날 정도로 그리했다. 황후라기에는 눈에 띄는 장신구 하나 없던 수수한 모습, 부러 제게 상처를 줄 법한 말을 건넸던 것, 마지막처럼 건네어졌던 감사 인사, 그리고, 티엔. 바람결에 흩날리던 자신의 이름. 안 그래도 허옇던 얼굴에 핏기가 가신다. 굵은 눈물을 툭툭 떨구었다.) 윽, 흐, 폐, 폐하….
(어깨를 벌벌 떤다. 그렇게 한동안 숨죽여 울었을 것이다. 눈물 채 그치지도 못한 채 시녀장을 바라본다. 애원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마지막을, 주, 준비하셨던 거라면, 어, 여쁘게… 잠드셨을 거예요. 이런, 괴, 괴로운 모습이 아니라.
(묘한 확신. 당신이, 당신의 이런 모습을, 자신이 목도하길 원했을까?) 시, 녀장님이 보시기에, 폐하의 별세에…. 이,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저는, 도무지…….
시녀장: (잠시 당시 상황을 떠올려 보는 듯이 생각에 잠긴다.) 그러고 보니… 당시에는 나도 혼비백산하여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았는데 이상한 점이 있구나.
그러니까 목욕하실 때부터 차근차근 말해 보겠네. 저기 테이블에 있는 마들렌을 드시다 남기시고, 주무시기 전에 반신욕을 하고 싶으시다 하셔서 물을 준비했네.
욕실에는 1시간 반 정도 계셨던 것 같군. 원래 길게 목욕하시는 습관이 있으시니. 욕실이라 해도 혼자 들어가시는건 아니고, 곁에서 나와 시녀 아이들이 쭉 시중을 들었고.
중간에 와인을 한 잔 드시고 잠이 드셨는데, 손발이 좀 차신 듯해 물을 더 데우고 내가 마사지를 해드렸다네. 그러다 시간이 너무 길어지는 듯해 깨워 드려 침실로 모셨는데….
내 기억엔 잠드셨다 깨신 후부터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군.
그리고 저기에……. (목이 메는 것을 참았다.) 화장대 앞에 앉혀 드리고, 하녀가 수건을 가져왔지. 막내 시녀 아이가 머리카락을 말려 드리려고 다가가는데 갑자기…… 일이 벌어졌다네.
시녀장: 그때에는 너무 놀라서 무엇이 이상한 줄도 몰랐는데, 비명을…… 안 지르셨어. 숨소리 하나 안 내셨어.
그 이외에는 특별한 점 없으셨으나…. 차후에라도 기억나는 게 있다면 알려주겠네.
첸 티엔:가, 감사합니다. 부디…. (주룩주룩 흐르는 눈물 손등으로 훔쳐내기 바쁘다. 서툴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티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찻주전자와 티세트 한 벌, 먹다 남긴 마들렌 한 접시가 놓인 테이블입니다. 티세트는 깨끗하게 닦인 상태입니다.
황후가 목욕 전 간식으로 먹던 것이고, 차와 곁들여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 마들렌 역시 수상하지 않은 평범한 마들렌으로, 황실 주방장이 만든 간식이군요. 특별한 것은 없어 보입니다.
첸 티엔:(마들렌의 귀퉁이를 떼어내 입에 넣는다. 이 한 몸 바쳐 당신의 사인을 밝힐 수 있다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다.)
:평범한 레몬 마들렌입니다. 종종 달다는 핑계로 당신에게 가져다 주었던 것이 이 마들렌인가 보네요.
첸 티엔:(또다시 눈물이 터져 나온다. 이럴 수는 없는데. 이럴 수는…. 중얼이며 뒤를 돈다. 뺨을 적신 눈물은 닦을 생각조차 않는 모양이다. 기운 없이 걷던 도중 명화를 바라본다.)
:개국 황제 부처의 유명한 일화를 담은 초상화입니다.
첸 티엔: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11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가장자리 끝부분이 벽으로부터 약간 들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손으로 더듬어보니 우측 변에서 작은 구멍 같은 것이 언뜻 손끝에 느껴집니다.
크진 않습니다. 얇은 펜이나 머리 장식 끝 부분의 핀 따위가 들어갈 정도.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당장 액자를 떼어내거나 다른 조치를 취해볼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첸 티엔:(손끝으로 구멍을 더듬어보다 원형침대로 몸을 돌린다.)
:황후가 평상시 취침하는 원형 침대입니다. 호사스러운 금사가 수놓였고 장정 서넛이 동시에 누워도 될 정도로 넓지만, 전후사정을 아는 사람의 눈에는 어쩐지 조금 쓸쓸해 보이기도 합니다.
황후가 눕기도 전에 변을 당했기 때문에 침대 자체에는 그다지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은요.
첸 티엔: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71 |
| 판정결과: | 실패 |
(눈 부빗...)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44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당신은 침대 아래를 살펴 보다가 작은 궤짝 상자 같은 것이 숨겨져 있다는 점을 눈치챕니다.
그러나 주변에 사람이 많은 지금 그 궤짝을 함부로 꺼내 열어 보아도 좋은 것인지 확신이 서지는 않네요. 다음을 노려 봅시다...
첸 티엔:(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몸을 일으킨다. 그대로 화장대로 향했다.)
:황후가 앉았다 쓰러진 화장대입니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워 가구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물건입니다. 앉아 있다 피를 토했다는 증언이 사실인지 거울과 서랍 등에도 피가 튀어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제외한다면 화장대와 의자 자체에는 크게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화장대 위에는 화장품과 액세서리 등이 보이고, 보석함 하나가 열린 채 놓여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황후의 반지와 목걸이 등이 담겼습니다.
그런데...
보석함 내부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값비싼 액세서리가 여러 개 없어졌고, 남은 액세서리 중에서도 목걸이, 반지 등을 장식하던 화려한 보석 몇 개가 뚝 떼여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사라진 보석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어디로 간 거죠?
첸 티엔:(누가 감히 폐하의 물건에 손을 댄단 말인가? 눈가 살풋 찌푸리며 벽시계를 바라본다.)
:묵직한 디자인의 벽시계입니다. 낡고 오래된 것이지만 운치는 있어 보입니다. 시간이 멈춰 있지만요.
첸 티엔: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96 |
| 판정결과: | 실패 |
(눈 부비부비…)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39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자세히 살피니, 이 벽시계는 유리문을 열 수 있는 장식장과 같은 구조입니다. 그러고 보니 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조금 이상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를 자주 조였다 푼 듯이 헐겁고 긁힌 자국도 났네요. 조금만 힘을 주면 분침이나 시침을 따로 분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첸 티엔: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66 |
| 판정결과: | 실패 |
:시계를 만지니 근처에 서 있던 자작이 당신을 쳐다 보네요. 빤히. 빤히... 다음을 노립시다.
첸 티엔:(터벅터벅… 드레스룸 가는 길도 살펴본다.)
:황후의 옷과 보석 등을 보관하는 방으로 가는 문입니다. 닫혀 있습니다. 당장 중요한 것은 없어 보입니다.
첸 티엔:(방향을 틀어 욕실로 가는 길도 살폈다.)
:욕실로 통하는 문. 문 앞에 발을 닦는 깔개가 놓여 있습니다. 목욕을 끝내고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일이 생겼다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욕실에는 아직도 훈기와 습기가 있고, 욕조의 목욕물과 목욕 중 마신 듯한 와인마저 그대로입니다.
첸 티엔:(와인잔을 들어 입술 자국이 남은 부근을 검지로 훑어본다. 입 맞추고 싶은 좋아해야? 이 순간 당신의 질문이 떠오르는 연유는 무엇인지. 그때 제대로 대답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울적함을 핑계 삼아 자국 위로 입술을 맞춘다. 그대로 잔을 기울였다. 남아있는 와인이 목을 타고 넘어갔을 것이다.)
:평범한 와인입니다. 황후가 잠들지 못할 때면 늘 사람을 시켜 대접하던 종류입니다. 그의 마지막 순간 입을 맞추었다면 꼭 이런 맛이 났을지도 모르겠네요. 뒷맛이 씁니다.
침실을 전부 둘러보고 나면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깁니다. 의사들은 1차적인 검사를 마무리했고, 흐느껴 울던 황후궁 일원들 역시 우선은 자리를 정리하려는 뜻을 내비칩니다.
오늘은 우선 돌아가 잠들어야겠습니다.
첸 티엔:(방을 나서기 직전, 뒤를 돌아 다시금 당신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받았던 머리 장식을 손아귀에 꼭 쥔 채로, 잊지 않겠다는 듯.)
:당신은 처소로 돌아갑니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지만 이 밤을 수놓은 은하수의 물길 중 어느 줄기에도 그처럼 가늘고 깊은 우울로 빛나는 항성은 없습니다. 천덕꾸러기 황후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이 그저 곤란하고 귀찮은 일인 듯이 새벽의 황궁도 묵묵히 조용하기만 합니다.
이 기이한 사건이 황제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을 두고 보아야만 하는 걸까요? 밤은 깊어져만 갑니다.
:이윽고 아침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반짝인다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날씨가 좋은 오전이었습니다. 당신 또한 오전 근무를 서기 위하여 나서야겠죠.
첸 티엔:(첸 티엔의 일과는 단조로웠다. 일어난 뒤 채비를 마치자마자 이안이 기거하는 궁으로 걸음 했다. 그리고는 그의 시중을 들었다. 그가 잠들 때까지 곁을 지키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내일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당신이 없는 지금은?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든 빈자리에 몸을 욱여넣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어제 갑작스러운 황후의 승하로 황궁 안이 온통 어수선합니다. 뒷수습을 위하여 황후 측근의 사람들을 모두 황후궁으로 불렀으니 당신 또한 황후궁으로 향합니다.
황후궁까지 가는 동안 몇 사람인가를 마주칩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근위병이 당신에게 인사를 하네요.
근위병 선배: (본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니 당신에게 인사를 건넨다. 표정까지 확실히 살펴보며.) 자네도 잠 이루지 못하였나 보군….
:발이 꽤나 넓은 사람입니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물어보아도 좋겠네요.
첸 티엔:(낯익은 길이 눈에 담기니 금방이라도 눈물 쏟아낼 것만 같아 괜히 마른 눈가를 비비적댄다. 밤새 울었던 탓에 짓무른 눈가가 따가웠음에도 그리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 말고도, 자, 잠 못 이루신 분이… 많이 계신가요?
근위병 선배: 황후궁으로 향하는 이들마다 얼굴이 말이 아니지! (일순 목소리를 낮춘다.) 황제를 제외하면 말이지.
이건 정말 비밀인데…, 폐하께서는 오늘 오전에도 업무 들어가기 전 정부와 만났다고 하더군. 황후의 아버지인 후작이 새벽같이 황궁을 방문하여 엎드려 읍소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분이…. (허, 참. 혀를 찼다. 자네를 믿으니, 자네에게만 말하는 것이네……. 재차 강조하기도 하였다.)
다만, 그리 천시하던 것치고 최소한 황후로서의 예우는 해줄 모양인지 국장은 일주일 뒤라고 하더군. 시신 또한 수습하여 관으로 들어갔다지?
첸 티엔:(결국은 눈 발갛게 물들인 채 눈물방울 툭툭 떨구고 만다. 정부와 만났다니! 욕망이 무어기에 한 사람을 이다지도 비참히 시들게 만든단 말인가? 뒤늦은 예우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당신은 줄곧 괴로워했는데.) 후, 작님께서는…. 아직도, 황제 폐하를 뵙지 모, 못하신 건가요? 무슨 일로, 이, 입궁하신 건지….
근위병 선배: 그야 변고의 원인을 밝히기 위함 아니겠나? 하나 황제 폐하께서도 난처한 것이 있다면 여느 의사도 그 원인을 밝히지 못한 데 있겠군.
음독인지, 중병인지 의사들이 밤을 새서 살폈지만 어느 쪽이라고도 확언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구만. 그러나 자네도 알다시피, 황후 폐하께서 체력적으로 약하긴 했어도 병을 앓았던 것은 아니지 않나?
명확히 말하지는 않아도 의사들의 말을 모아 보면 행간에서 독살 당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뉘앙스가 묻어나더지. 문제는 독살일 경우 황궁은 책임소지를 피하기 위해 이 죽음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드러낼 의사가 없으리란 것이지.
정확히 어떤 의도로 살해한 것인지 모르니 다음 타겟이 황제일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조사는 진행하겠지만……. 우리가 '진실'을 듣는 것은 폐하의 입맛에 맞추어 변형된 뒤이지 않겠나.
근위병: 가령 아무 상관 없는 황제의 정적 가문을 범인으로 몰아 처형한다거나, 반대로 범행을 저지른 인물이 황제의 측근이라면 병사로 덮어 버린다거나……. 황후 폐하만 불쌍하게 되었지.
근위병 선배: (고개를 가로젓기만 하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다시 열었다.) 아, 그런데 검시한 의사 태도가 좀 이상하던데?
뭐라더라, 황후의 가슴에…….
첸 티엔:가, 가슴에…?
:다이아몬드가.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멀리서 사색이 되어 달려온 다른 근위병 동료 하나가 고함을 칩니다.
백작님께서 시체로 발견되셨습니다!"
근위병 동료: 지금 난리가 났어요!
근위병 선배: 살해? 백작? 어디의 백작을 말하는 건데?
:동료는 발을 구르며 그 어마어마한 말을 차마 쏟아내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동쪽을 가리켰습니다. 여기서 동쪽.
황제의 시종장 휴베르트 백작 이야기입니다.
:이 나라에서 황제가 앉는 왕좌는 '여섯 길 위에 앉은 백금 옥좌'라고 불립니다. 정말 백금으로 만들었다는 까닭도 있고, 건국 설화에 여섯 개의 순례길과 관련된 일화가 나오는 고로 황제궁에도 여섯 순례길을 본따 중앙 홀로 다다르는 여섯 복도를 만들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섯 복도가 모이는 둥그런 방을 거치면 비로소 중앙 홀 출입문이 등장하고, 다시 문을 넘어서야 백금 옥좌에서 천하를 오시하는 황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공식적인 행사날 황제를 알현하는 자들은 이 방에서 무기를 맡기고 자세를 가다듬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백여 년을 내려온 위엄이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을 목도하게 됩니다.
평생 황제를 모셔온 노백작이, 그 깐깐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궁전을 호령하던 또다른 우두머리가…. 바지가 벗겨진 채 죽어 있었습니다.
무려 황가의 위엄을 상징하는 중앙 홀 앞에 목을 매달아 공중에서 덜렁거리는 시종장의 시체인데도, 허리 아래 사정이란 본래 단두대에 매달린 사형수의 눈마저 돌아가게 하는 성질을 지니는지라.
:사람들은 아주 본능적으로 그자의 낡고 주름진 국부를 먼저 바라보게 되고 맙니다. 그 볼품없고 초라한 위용은 황제의 아낌없는 신임을 받는 충신으로서 여느 공작 못지 않은 명예를 자랑하던 남자의 최후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지요.
사정을 모르고 얼결에 섞여 들어온 여성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지만, 남성들이라고 해서 탄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스울 법도 한 상황인데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 ,역겹기만 한…….
하필 오늘은 중앙 홀을 사용하는 공식 행사가 있는 날이었기에 몰려든 사람의 숫자가 어마어마했습니다.상황을 살피고 싶은데 이대로 있다간 군중에 파묻히게 생겼군요.
첸 티엔: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5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사람들 사이에서 머리 하나는 높은 셈이군요……. 당신은 노인의 시신 상태가 굉장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선 가슴께가 피로 젖어 있네요. 교살 당한 시체에 혈흔이 있을 까닭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목 부분이 그다지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꼼꼼히 살피지 않았기에 확실하진 않지만, 목졸려 죽은 시체라면 벗어나고자 격렬히 움직이면서 발생하는 상처 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저 시신은 마치 이미 죽은 시체를 뒤늦게 고리줄에 꿰어 놓은 듯한 꼴이 아닌가요?
이때 군중이 급히 갈라집니다. 황제가 도달한 것입니다. 노기에 찬 그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시종장의 시신 앞에 섰습니다.
노인의 비참한 꼴을 보고 주먹을 말아쥔 황제는 분노를 감추지 않으며 씹어 뱉듯 말했습니다.
황제: 반드시 찾아내 엄정히 단죄하리라!
:아, 피를 토하며 죽은 황후의 시신을 내려다볼 땐 어땠었죠?
...
...
그리고 다시 나흘이 지났습니다.
황후의 서거로부터 엿새째, 그녀의 죽음까지 살인으로 친다면 6일간 황궁에 연쇄살인이 5건이나 발생했습니다. 황제가 아끼던 시종, 황제가 아끼던 요리사, 황제와 친분이 두텁던 대귀족.
모두가 황제와 친밀한 연관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황궁은 스산하리만치 조용하고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특히 공공연히 황제파라고 알려진 대귀족 인사들은 아예 황궁으로의 발걸음마저 끊었습니다.
국장 기간과 겹쳐 모든 무도회며 행사가 취소되고 연일 경비를 강화하니 구역을 막론하고 모든 곳이 사람 사는 공간 같지 않게 적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험흉한 것들이 돌았습니다.
그것은 발이 없으되 평소에는 높으신 분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장 낮은 곳까지 누구보다도 쉬이 건너갈 줄 아는 힘을 지닙니다.
세상에 말보다도 빠른 것은 없기에 평생을 황족의 옷자락 하나 밟아보지 못할 이들까지도 쉬쉬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로 떠나 보내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황후가 궁을 저주하고 있다.
:억울하게 죽은 황후가 원혼이 되어 궁을 떠돌고 있다!
그런데 황제와 정부만은 살아 있습니다.
어째서?
첸 티엔:(죄지은 이들이 벌 받는 것은 당연하니 연쇄 살인 사건에는 일말의 감정 내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가 피를 토하며 죽은 황후의 시신을 내려다보았을 때처럼! 다만 황후의 원혼이 궁을 떠돌고 있다는 소문에는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는데, 매일 밤 새벽이 깊어질 무렵 당신과 함께 거닐었던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 자신의 새로운 루틴이 되었다. 혼령이라도 좋으니 다시 한번 뵐 수 있다면….)
:황제는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진 채 황제궁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정부와 단둘이 심처에 몸을 숨기고 근위병들로 황제궁을 겹겹이 둘러싸 쥐새끼 한 마리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비를 단단히 했다지요?
순찰을 지독하게 강화했고, 근위대 업무는 평소보다 배로 늘어났으며 수도 경시청까지 협조를 시작했습니다.
며칠간 수사를 거듭하면서 근위대에서도 나름대로 알아낸 정보가 있습니다. 당신은 근위병 선배에게서 몇 가지 말을 전해 듣습니다.
첫째, 사망한 자들은 전원 황제의 특별한 총애를 받던 사람들.
둘째, 시신은 대체로 '이미 사망한 후' '시체인 상태로' 목이 매달렸다.
셋째, 범행 장소는 반드시 황제의 위엄과 관련된 공간. 알현실에서 죽은 시종장도 그렇고, 박물관의 황가 전시실에서 죽은 요리사도 그러했다.
:범행 시각, 근처에서 검은 망토를 두른 사람을 두어 번 보았다는 제보가 있다고도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여전히 수사를 이어가는 중이지만요.
당신은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중심으로 순찰을 도는 임무를 배정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담당 구역은 우측 별관과 성당입니다.
첸 티엔:(충성을 다해 순찰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품에 넣어 둔 머리 장식을 매만지며 우측 별관으로 향한다.)
:별관으로 이동합니다. 스산한 바람이 뺨을 스칩니다.
시신 자체는 이미 치워졌고, 범행이 벌어진 공간만 보존해둔 터라 특별히 추가로 조사할 것이 없습니다. 황제가 눈을 뒤집고 인력을 충원했거든요.
근무 목적 자체는 단순한 경계이니 한 바퀴 순찰만 돌아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별관 뒤쪽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자들이 눈에 띄네요. 저들은 황후를 수습한 장의사들이군요?
첸 티엔: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79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그러니까… 잘못 본 거 아니지?"
"그랬다니까. 자작이 요청해서 가슴을 갈랐는데, 심장에 다이아몬드가 꽂혀 있었다고. 아주 주먹만한 게."
"그게 어떻게 거기 박혀 있어? 뭐, 드셨거나 하면 위 같은 데에 있을 수는 있어도. 심장을 보석이 찌르고 있다는 게."
"수상한 건 그게 전부가 아니야. 왜 있잖은가, 그 별관에서 죽은 이. 그 자 주변에도 보석 가루 같은 게 있었어."
"아, 그 얘기라면 나도 들었다네. 박물관이고 성당이고 다 검출됐다던데. 에메랄드나 루비 같은 게."
별관에서는 더 이상 특별한 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당으로 이동할까요?
첸 티엔:(폐하의 가슴에서도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고 하셨는데…. 의아한 낯 애써 숨기며 성당으로 이동했다.)
:성당으로 가는 길입니다. 머리장식을 받았던 날에도 이 즈음을 거닐었지 않던가요.
그런데… 어, 뭔가 본 것 같습니다. 확신할 순 없지만, 모퉁이를 돌아 급히 사라지는 검은 형체 같은 것을요. 저 방향은 도서관으로 꺾는 방향이네요.
첸 티엔:(검은 형체? 근위병이 말해주었던 검은 망토를 두른 사람일까? 도서관 방향으로 급히 몸을 튼다.)
:인기척을 쫓아 도서관으로 달려가니, 어느새 인형은 사라지고 난 후입니다. 확실히 본 건 맞을까요?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붙잡아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유감스럽게도 복도엔 개미 한 마리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가 도서관 1층이라면 바로 저쪽에 열람실이 있죠. 들어가면 사서 노인이 있을 거예요. 성품이 온화해 당신에게도 잘해 주던 분입니다.
첸 티엔:(열람실의 문을 노크한 뒤 조심스레 밀어 연다.) 시, 실례합니다…. 계신가요?
사서: 들어오시지요. (발걸음 소리 들리더니 당신을 돌아 본다.) 아, 오랜만에 오시는군요. 도서관에는 무슨 일로…?
첸 티엔:(눈짓으로 인사한다.) 도, 도서관 방향으로…. 수상한 사람이, 도, 망치는 걸 봤어요. 호, 혹시…. 아시는 바가 이, 있으실까 싶어서요. 검은 망토를 두른 사람인데요….
사서: 누가 지나가는 것 같기는 했는데, 잘 모르
:겠군요. (이어 흘러가듯 말한다.) 검은 망토는 모르겠고, 어젯밤 황후 폐하를 뵙기는 하였지만….
첸 티엔:(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폐, 하를요…? 어, 어디서요?
사서: 도서관 창 밖에서…. 아마 이 늙은이가 노환으로 헛것을 본 거라곤 생각하지만, 꿈결이든 환각이든 어제 잠결에 뵌 기억이 있습니다. (하얀 머리를 쓸어올린다.) 가시는 길도 못 챙겨 드렸으니, 귀신으로라도 한 번 더 뵈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그리 눈 앞에 보인 것일지도 모르지요.
하하, 흘려 넘기십시오…. (손을 휘휘 젓는다.) 그것보다, 이전 황후 폐하께서 도서관에서 책을 몇 권 빌려 가셨는데, 그게 아직 안 돌아와서 말이지요. 당신은 황후궁에 출입할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걸 찾아 제게 전해줄 수 있겠습니까?
첸 티엔:자, 잠시만요. 폐, 폐하께서…. 무슨, 마, 말씀을 해주시진 않으셨나요? 왜, 왜…. (제게는 나타나주시지 않는 건지….)
사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저 눈 앞에 스쳐가듯 보였을 뿐입니다. 마치 망령처럼….
첸 티엔:(눈썹을 늘어트린다. 애써 눈물 삼켜가며 고갤 끄덕였다.) 아, 알겠어요. 책은…. 찾, 아서, 돌려 드릴게요. 얘기해주셔서, 가, 감사합니다.
:사서는 감사와 함께 위로의 인사를 건넵니다. 누구보다 당신이 황후를 아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지 않나요. 당신은 사서의 부탁을 받아 황후궁으로 향하게 됩니다.
:황후궁에는 수사 라인과 순찰선이 둘러쳐져 있으나 본디 황후궁에서 일하던 당신은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들어오고 보니 사람이 아무도 없군요? 황후가 사망한 날 석연찮았던 부분이 떠오릅니다. 재조사가 가능합니다.
첸 티엔:폐하…. (그리운 호칭 읊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선다. 원형침대 아래를 살폈다.)
:침대 아래에는 작은 궤짝 상자가 있습니다. 꺼내어 보니 잠겨 있는 듯합니다.
첸 티엔:(어딘가에 열쇠가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궤짝을 잠시 내려두고 벽시계로 향했다.)
:이 벽시계는 유리문을 열 수 있는 장식장과 같은 구조입니다. 겉면을 열어 꼼꼼히 살펴 보면 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조금 이상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를 자주 조였다 푼 듯이 헐겁고 긁힌 자국도 났네요. 조금만 힘을 주면 분침을 따로 분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첸 티엔: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36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당신은 분침을 분리해냅니다. 끝이 날카로운 것이, 황후에게 받았던 머리장식의 끝과 굉장히 유사하네요. 궤짝의 구멍 또한 이리 가늘고 날카로운 것을 넣으면 열릴 듯 보였습니다.
첸 티엔:(궤짝을 두었던 자리로 돌아가 구멍에 분침을 끼워 넣어 본다.)
:당신은 궤짝을 열어봅니다.
안에는 굉장히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잿가루와 뼈를 태운 듯한 흔적, 복잡하고 불쾌한 수식을 갈겨 쓴 종이 조각, 반쯤 녹은 다이아몬드 조각, 사람 모양을 본딴 천 인형이 있습니다.
이게 다 뭐죠? 대체 황후궁에 왜 이런 게 있나요?
첸 티엔:(본능적으로 타인에게 보여선 안 될 물건이라 판단하였다. 흉수의 짓이라면 모르겠으나, 만약 이 물건이 당신이 준비한 것이라면…. 궤짝을 닫고 다시금 침대 아래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는다. 뒤이어 명화에 다가선다.)
:개국 황제 부처의 유명한 일화를 담은 초상화입니다. 가장자리 끝부분이 벽으로부터 약간 들떠 있었죠. 우측 변에 작은 구멍이 존재합니다.
첸 티엔:(구멍에 머리 장식의 끝부분을 밀어 넣었다.)
:무언가 딱 맞물리는 느낌이 들고, 달칵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됩니다. 문처럼 잡아당겨 열어보는 형식입니다. 열어볼까요?
첸 티엔:(열어봅니다.)
:액자 금고 안에는 다양하고 기묘한 물건들이 난잡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아주 낡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쁘고, 왠지 뭔가 액체로 잔뜩 젖은 듯이 날강날강한 책 서너 권, 문장이 되지 않는 단어들을 마구 흘려 쓴 종이 몇 장, 보석 조각 등이 보입니다.
첸 티엔:(도서관에서 빌리셨다는 책이 이것일까? 책 서너 권을 들추어본다.)
:책들은 하나같이 굉장히 불쾌한 느낌을 줍니다. 제목이 쓰여 있지는 않습니다. 읽어보나요?
첸 티엔:(폐하의 흔적. 기꺼이 읽는다.)
:슬쩍 보기만 해도 혐오스러울 정도로 불쾌하고, 소지하는 것을 걸렸다면 당장 파문당할 정도로 악마적인 지식들이 담긴 책입니다. 이성판정(0/1)
첸 티엔:
| 기준치: | 49/24/9 |
| 굴림: | 79 |
| 판정결과: | 실패 |
:오컬트 기능 +2.
책의 내용이란 이렇습니다. *누군가를 저주해 죽이는 방법, 원석이나 귀금속을 이용해 사람에게 깃들었다
는 마력을 끌어올리는 방법, 사람을 인신공양해 복잡한 마법진을 만들고 모독적인 존재를 불러들이는 방법….*
첸 티엔:(저주, 원석, 귀금속, 인신공양, 모독적인 존재….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의 나열에 현기증을 느낀다. 책을 덮고,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두었다. 이어 종이 몇 장을 꺼내 읽어본다.)
:첫 장엔 몇 가지 복잡한 수학 공식, 그리고 반복해 그린 오망성 모양이 눈에 띕니다.
둘째장은 뭔가를 옮겨 적은 듯한 내용인데, 전부 알아볼 수는 없지만 귀금속을 매개로 추악한 마법을 부리거나 저주 의식을 치르는 법, 사람을 본딴 인형을 만드는 법 등에 관한 메모입니다.
다음 장은 다시 오망성 그림, 그리고 넓은 장소에서 별의 꼭짓점에 해당하는 위치마다 제물을 희생시켜 끔찍한 일을 벌이는 마법진 술식에 대한 번역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장엔... 오늘 날짜만이 써있군요.
첸 티엔:(날짜를 손으로 더듬는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사특한 것을 불러들여서까지 복수를 이루고 싶었다면, 차라리 저를 사용하시지. 당신께선 험한 일에 손대시지 말고, 자신을 부려 원하는 것을 이루실 것이지. 참사를 막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것이 당신이 바라는 것이라면, 당신의 종인 나는 마땅히 그 뜻을 따라야지 않겠는가….)
:그래요, 오늘 어쩌면 황후는 꿈에 그리던 복수를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그 말은…. 오늘 밤 그는 필히 황제궁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마침 창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어둠이 내립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첸 티엔:(폐하를 뵙고 싶다. 얼굴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듣고 싶다. 단순히 그러한 일념만으로 황제궁으로 걸음을 옮긴다.)
:당신은 황제궁으로 향합니다.
:불안감이 심장을 파먹고 목까지 옥죄는 것 같습니다. 아뇨, 어쩌면 설렘일지도 모르지요.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던가요?
다시, 비가, 비가 내립니다. 동토를 할퀴는 날씨, 음산하게 번쩍거리며 발걸음을 잡아채는 뇌우.
황제궁은 너무 넓습니다. 기이하게 사람이 없습니다. 수많은 근위병들은 다 어디로 갔죠? 동료들은요? 선배들은?
황제는?
비 내리는 밤에 황제가 있을 법한 곳이라면 어딜까요? 당신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 침실의 문 앞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이 들립니다.
첸 티엔:(그곳에 당신이 있을까? 상기된 낯으로 침실을 향해 뛰었다. 그 얼굴 위로 설렘 외의 것은 찾아볼 수 없다.)
:……
황제의 침전입니다.
전부 열어젖힌 창문에서 비가 들이치고 있었습니다. 멀리 황궁을 둘러싼 산으로 낙뢰가 꽂히는 것이 보입니다. 번쩍, 하고... 물방울 같은 것이 튀는데, 이토록 뜨거운 것이 비일 수는 없지 않겠어요.
낙뢰를 걸머지고 반쯤 어둠 속에 갇힌 한 인영이 있습니다.
아래 쓰러진 남자는 이제 왕홀도 보주도 쥘 수 없는 어떤 것. 국새나 보관도 더는 그의 영광을 보장하지 아니할 테지요.
심장을 크게 꿰뚫어 꽂힌 칼을 타고 황족의 피가 흐릅니다. 저토록 고결한 것인데도 도무지 가장 천한 자들의 붉음과 다를 바가 없는... ...
:눈이, 눈이 마주칩니다.
공중에서 불꽃이 튑니다. 상대가 당신을 알아봅니다.
이안 브란트:(시선은 가라앉지 않고, 외려 들뜬 듯한 안광을.) 티엔…. 또 만났구나. (마지막 날, 당신의 이름 속삭인 뒤 흩어진 것은 다시 만나자는 기약이었을까? 숨죽여 웃는다. 퍽이나 아름답게….)
첸 티엔:(넋 놓고 당신의 웃음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환희에 찬 채 무릎을 꿇는다. 황제의 시체를 보고서도 부복하지 않은 이는 당신의 시선 한 줌에 곧장 고개를 조아렸다.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폐, 폐하……. 뵙고, 싶었어요. 저, 정말로.
이안 브란트:어서 일어나. 보이지 않니? (손을 치켜든다. 온통 피로 젖은 손을. 이 손 더럽혀지지만 않았다면 당신을 일으켜 품에 안았을 테다. 등을 심장박동보다 느리게 도닥이며 저를 얼마나 그렸느냔 부질없고 이기적인 질문을 던졌을 테다. 그러나,)
내가 황제를 죽였어. (숫제 속삭이는 어조. 당신을 일으키지도, 마주 안지도 않았다. 외려 당신더러 저를 떠나라 재촉하는 모양이다.)
첸 티엔:겨, 경하드려요. (수줍게 건네어진 말에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여느 때처럼 귓가를 발갛게 물들이고, 사랑에 빠진 눈으로 당신을 올려다보며….) 어디, 다, 다치신 곳은….
이안 브란트:(황후는 처참한 황제의 시신을 목전에 두고 아주 대소하였다. 그를 본 어느 누구든 미쳐버린 황후라고밖엔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아주 처절하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당신의 눈에는 단지 사랑에 겨워 환하게 웃는 이의 모습이 비쳤을 테지. 소리내어 웃다가, 눈물 고인 얼굴을 피로 물든 손등으로 닦아낸다.) 황제를 죽이는 순간이 가장 행복할 줄 알았는데…….
(기어이 흐느끼듯 웃는다.) 입 맞추어 줄래? 당장. 내가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고 했잖아…….
첸 티엔:(상황에 맞지 않게 볼을 새발갛게 물들인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저하지 않았는데,)
(입 맞추고 싶은 좋아해야? 후회라면 이미 충분히 하지 않았나.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당신에게 다가선다. 감히 손을 들어 당신의 뺨을 감싸 쥐고, 그대로 숨결을 나누었다. 손바닥에 묻어오는 핏자욱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 것마냥 오래도록.) 지, 금은…. 해, 행복하신가요?
이안 브란트:(가만 선 채 입술을 맞댈 뿐이다. 차분히 눈을 감았다가 뜬다.) 지금, 가장…. (당신의 행복을 물을 필요 없었다. 시선만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죽어버리면 슬퍼할 거지?
첸 티엔:(당신의 행복 하나만으로 그 누구보다도 환히 웃던 이가, 당신의 말 한마디에 금세 눈물 그렁그렁 매달아 낸다. 눈 붉어진 것 숨길 생각조차 못 한 채 시선을 마주한다. 몸을 에듯 찾아오는 슬픔에 곱던 목소리는 속절없이 갈라지고 만다.) 다, 당연히…. 왜, 그런 마, 말씀을 하시나요? 떠, 나지, 말아, 주세요….
이안 브란트:그냐앙. 확인차. (느릿느릿 말 늘인다. 죽음을 가정하는 데 별 이유랄 것도 없다. 남의 속을 들추어서라도 애정을 모조리 확인 받고 싶은, 이안 브란트 보통의 나쁜 성질이 드러나는 것뿐이다. 젖은 손으로 눈물 닦아줄 수 없으니 눈두덩이 위에 입을 맞추었다.) 같이 떠날래? 나랑….
첸 티엔:(입술 닿을 적마다 눈 깜박였으니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다만, 흘러내린 슬픔의 흔적과는 대조되게도 그 낯만은 그저 사랑으로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뒤늦게 내어놓은 대답은 띄엄띄엄 끊어져 있다. 감격에 겨운 탓이다.) 그, 그래도…. 되나요? 제가, 폐, 하를…. 곁에서, 계속, 모셔도….
이안 브란트:나는, 울지 말라고 말한 건데…. (혀를 내어 당신의 눈가를 할짝인다. 이십여 년간 타인을 위로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어서 그랬다. 당신의 앞에서라면 체면 없이 그저 자그맣고 연약한 짐승의 모습을 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었으니 더욱 그랬다. 하여간 사랑은 짠맛이 났다.)
후회하지 않을 거라면. (짧은 간극 뒤 정정한다.) 아니, 후회하더라도 떠나지 않을 거라면….
첸 티엔:후, 후회하지 않아요. (그저 기쁘지 않을까? 속내 전부 말하는 것 대신 수줍게 눈 접어 웃어 보였다. 인생을 살아오며 크게 후회한 것이 있다면 오직 당신이 시든 모습을 목도했을 적 곧바로 자결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마저도 지금 이 순간 당신과 재회하였으니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죽음 끝까지 쫓아갈지언정 당신을 떠날 일은 없을 것이다.) 저를, 거, 거두어 주세요. 부디….
이안 브란트:그 약속, 어기는 날…. 죽어버릴 거니까. (잔혹한 말을 잘도 내뱉었다. 환하게 미소 지었으나 단순한 농은 아니었고, 당신이 그 약속 어길 것이라 여기지도 않았으니 오롯한 진심도 아니었다. 그래, 단순명료하게 해석하자면 수락이었다. 당신을 기꺼이 거두겠다는, 당신과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다는….)
:피로 물든 손이 당신을 붙잡습니다. 그래요, 그는 당신과 함께 도망치기로 결심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그도 꿈꾼 것이 있었습니다. 반려라는 사람과 사랑하는 것도, 모두가 우러르는 황후가 되는 것도 아니었죠.
여기서 죽고자 결심하기 전에, 비천한 목숨으로 가장 악독하고 저주스러운 것을 불러내려 들기 전에, 그리하여 황가에 가장 추한 것들을 전시하려 하기 전에요.
가장 귀한 목숨값인 황제를 바쳤으니 이제 오망성이 완성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부름을 요청하는 자의 피, 자신의 피, 그것만 있으면 되는데, 이날이 오면 응당 볼품없는 심장이라도 갈라 바치려 했는데.
별빛으로 반짝이는 보관을 썼을 때에도, 제국의 달로써 칭송받던 때에도 가지지 못했던 고귀나 권위를 비로소 가지게 된 악마가 여기 있습니다.
황후가 아닌 이안 브란트, 그 사람만이 온전히 여기 남아서, 어쩌면 다섯의 목숨을 바치고 황제를 죽여 바로 당신을 얻은 채로.
:당신은 자비로운 신조차 받아주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겁니다. 산 자로되 산 자가 아닌 것처럼 살면서 악마와 손잡은 자신을 파먹을 겁니다.
그래도, 당신이 괜찮다고 한 마디만 해준다면 이 사람은 믿어 버릴 거예요. 손을 잡고 함께 지옥으로 가려고…. 당신이 그러했듯.
그러니 떠납시다.
아침이 오기 전에 떠나요!
복도엔 우스울 정도로 아무도 없습니다. 두 사람은 바깥의 빗소리를 재연하듯 복도를 달립니다. 당신의 손을 잡고, 새벽을 사르는 여명을 향해 .
당신이 너무나도 잘 알다시피 이 자는 필히 미쳐 버렸고, 함께 도망쳐버린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 두 사람은 황후궁을 달립니다.
:마차를 부를 것입니다. 황후의 문장도 황제의 휘장도 달지 않은 짐마차를 탄 채 광증 어린 자유의 세상으로 갈 겁니다. 그렇게 되고 말 겁니다.
숨을 크게 들이킵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아침의 첫 공기가 폐를 감쌉니다.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대로 도망치면서 누굴 또 죽이게 될지 모르죠. 그렇다고 해도… …….
그가 우는 듯 웃으며 말하였습니다.
쭉, 나는 이렇게 하고 싶었어, 어쩌면 당신과 단 둘이. 보석도 무도회도 없는 곳으로 떠나는 거야…….
그리하여 이곳에, 도덕도 양심도 왕관도 전부 저버린, 사람조차 아닌 그저 둘이 서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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