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윙바이 패스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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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향유고래가 별들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특유의 거대하고 둥글며,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졌다 돌연 툭 튀어나오는 부분을 가진 선체 디자인 덕분에 으레 고래라고 불리곤 하는 우주선 테미스 3호는 안정적인 궤도를 유지하며 화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입니다.
새로운 임무를 위해 탑승한 당신 역시 자랑스러운 테미스 3호의 승무원으로서 제 몫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출항의 목적은 화성 국제우주정거장 물자 보급 및 단기 체류. 승무원들은 이제 3일 후면 화성 진입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는 중입니다. 순조로운 여행이 이어졌습니다.
목적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당신은 오랜만에 누군가의 꿈을 꾸고 잠에서 깹니다.
▶:찾아와 줄래요? 이번에는 내가 기다릴 테니까.
비온 뒤 안개처럼 어슴푸레한 세상에 조용히 되감기는 목소리는 오래전의 경험을 반추시킵니다.
자신을 시간여행자라 주장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사건을 겪은 후 한참이 흘렀습니다.
이안 브란트:(당신이 떠나고 난 뒤 내 꿈은 온통 새카만 색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밤이었다가, 한 사람 분의 우주였다가, 호수를 겹쳐 둔 심해였다가……. 오늘은 당신이었다. 당신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흩날리면 그 뒤통수에 대고 내가 무어라 중얼거렸던 것 같다. 아니, 머리카락 위로 입을 맞추었던가……. 여전히 몽중이다.)
(일시에 휘발된 기억을 더듬으며 이안 브란트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그는 당신의 꿈을 꾸고 난 아침이면 시야가 흐렸고, 습관처럼 마른 눈가를 문질렀다. 눈물 흘리지 않으면서 손등으로 뺨을 훑는 습관도 여전했다. 아니, 내가 그랬었나? 새로 생긴 습관일 뿐이겠지.)
▶:문득 생각은 늘 지니고 다니던 회중시계에 미칩니다. 내부가 망가지긴 했지만 주기적으로 관리해 주곤 했었죠. 떠오른 김에 오랜만에 꺼내어 태엽이라도 감아 줄까요?
이안 브란트:(당신에게 받은 회중시계를 잊지 않고 차고 다녔을 터이니, 이안 브란트는 그것을 제 품에서 꺼냈을 것이다. 익숙한 손길, 그리고 그리운 눈길이 시계에 닿는다.)
▶:익숙한 손길로 태엽을 감아 준 순간, 시야가 아찔하게 훅 꺼집니다.
잠깐 의식을 잃었다고 판단될 정도로 눈 앞이 깊게 깜빡였었습니다.
이안 브란트: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77 |
| 판정결과: | 실패 |
▶:다시 눈을 뜬 이안은 당황스러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당신이 잠들었던 곳은 우주선 선내 승무원 휴게실. 2층 침대가 줄지어 놓여 있는 곳이라 주변에 잠들어 있던 동료가 여럿이었는데요.
지금, 주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건 아니라는 느낌이 명확히 듭니다.
휴게실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복도로 통하는 문이네요.
이안 브란트:꿈인가아. (하긴, 요즘 잠을 못 자긴 했지. 혼잣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여간 머리가 돌아가지 않으니 몸을 앞서 움직이기로. 복도로 걸어 나간다.)
▶:복도로 나와 둘러보아도, 실내는 지나치게 적막하고 고요합니다.
복도에도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긴 원통형 모양인 우주선 특성상, 당신이 서 있는 휴게실 밖 복도는 내부 끄트머리입니다.
여기서 여가 공간, 화물실, 연구소를 거쳐 조종실까지 갈 수 있습니다. 쭉 훑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이안 브란트:우주에 혼자 남는 건 취향 아닌데. (풀어둔 머리칼을 대충 올려 묶었고, 사람의 온기가 머물러 있기를 기대하며 여가공간으로 향하였다.)
▶:승무원들이 휴식 시간에 지구에서 가져온 영화를 보거나 간단한 운동을 하고, 간식을 먹는 등의 일에 주로 사용하던 공간입니다. 이곳에는 아무도 없네요.
이안 브란트:(평소와 달라진 점은 없는지 여가 공간을 대강 확인해 봅니다.)
▶:공간 자체는 기억 속의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겠네요.
이안 브란트:(자리에 선 채 발을 탁탁 차고 있다가 금방 돌아섰다.) 아무도 없어요? (답이 돌아오지 않을 물음과 함께 화물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식량, 비상 연료, 비상 약품 등 다양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입니다. 이곳에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네요.
이안 브란트:(식량이나 연료 따위를 살펴보더니만) 금방 죽진 않겠네…. (태평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연구소로 향한다.)
▶:우주 항해 중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며, 승무원들이 지구로부터 가져온 임무를 수행하는 업무 공간입니다. 보통은 이곳에 사람이 가장 많지만, 이곳에도 아무도 없습니다.
이안 브란트:(그는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일어났고, 이어 조종실로 가는 걸음은 이전보다 느리다. 망설이다가 조종실의 문을 연다.)
▶:넓은 조종실입니다. 기술이 발전되면서 거대한 유리창과 수많은 계기판이 반짝이는 곳이지요. 그리고, 역시 이곳에도 아무도 없습니다.
요즘에야 자동 운항 설정이 어느 정도 받쳐 준다지만, 그래도 조종실까지 오며 그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설마, 지금… 이 큰 테미스 3호에 당신 혼자뿐인 걸까요? 일단 우주선이 제대로 항해하고 있는 게 맞는지 계기 패널이라도 살펴봅시다.
이안 브란트:(유리창 밖을 바라보던 시선이 계기 패널로 향한다. 삐뚜름한 자세로 고개 앞으로 기울였다.)
이안 브란트:
| 기준치: | 10/5/2 |
| 굴림: | 32 |
| 판정결과: | 실패 |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계기판이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른 배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안 브란트:(아… 모르겠네.)
▶:계기 패널의 옆에는 통신 장치가 있습니다. 이걸 통해서 지구 측 관제소와 소통할 수 있다고 했던가요.
이안 브란트:(오늘 몸 상태가 영 심상치 않다…. 잘못 건드려서 고장나지 않게! 조심스레 통신 장치를 건드려 보고는 통신 연결이 되는지 확인합니다.)
▶:장치의 주파수를 조작하면 지직거리는 화이트 노이즈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주파수를 돌리는 버튼이 딱 맞물리는 듯한 느낌이 손끝에 전해집니다.
그리고 파작파작 오가던 화이트 노이즈 사이로 어떤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를 만나러 와.
그 순간 조종석 전체의 불이 꺼집니다.
동시에 창문 바깥이 번쩍였습니다. 눈이 뜨거울 정도로 환하게 말이에요.
▶:몇 초 후, 다시 정상적인 조도가 돌아온 듯합니다. 눈을 떠 보면… 바깥으로부터 주먹만 한 빛 덩어리 같은 것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전면 창문 너머에 있던 그것은 놀랍게도 창문을 그대로 통과하여 당신에게까지 다가왔습니다.
창백한 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그것은 일반적 상식과 달리 몹시 차갑고 얼음처럼 어슴푸레한 명도를 지녔습니다. 주변을 잠시 맴돌던 빛 덩어리는 이윽고 당신의 시야 근처에 떠서 가만히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들어라.
순간 온몸에 강제적인 소름이 돋습니다. 그것은 도무지 인간의 언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음성이었습니다.
▶:들어라, 너는 태초의 것이 이끄는 대로 따르라.
저것이 너의 인도자가 될 것이다.
이안 브란트:
| 기준치: | 59/29/11 |
| 굴림: | 55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그리고 그 신의 음성 같은 자연의 으름장은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당신의 눈앞에 떠 있던 빛 덩어리가 휙, 저편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열 발짝쯤 거리에서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가만히 멈추어 있네요.
어떻게 할까?
이안 브란트:(영 꿈이라고 치부하는 중이다.) 사이비 같네. 최근에 무슨 영화를 봤더라. (쓸데없는 고민에 빠져선 팔목 안쪽으로 새겨져 있을 장미와 십자가 문신을 손끝으로 쓸어 본다. 곧장 주저 없는 걸음이 성큼 이어지고, 빛이 있는 방향으로 향한다.)
▶:빛은 말이 없습니다. 다만 조금씩 당신을 이끌며 당신이 잠에서 깨어났던 승무원 주거 공간 쪽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닫아 둔 문을 휙 통과해 먼저 휴게실 안으로 사라집니다.
이안 브란트:(상냥하지는 않네…… 생각했다. 다시 휴게실 안으로 들어간다.)
▶:당신은 휴게실 안으로 들어섭니다.
그런데, 당신이 누워 있던 침대에 누군가 있습니다. 빛 역시 그 침대 주변에 가만히 떠 있습니다.
이안 브란트:분명 아무도 없었지 않나. (중얼대며 누군가를 확인합니다.)
▶:다가가면,
당신은 이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꿈에서 보았지 않나요.
아래로 늘어진 새까만 머리카락과 창백한 살결. 속눈썹은 눈꺼풀 너머의 푸름을 가린 채 닫혀 있습니다.
똑바로 누워 잠든 그는 가슴팍을 고르게 오르내리며 호흡합니다.
이 사람이 어째서 여기에 있죠?
▶:이때, 당신을 이끈 빛이 훅 고도를 낮추더니 그의 가슴을 통과해 사라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시체처럼 싸늘한 그는 눈을 뜨지 않네요.
이안 브란트:첸, 티엔. (떨리는 목소리는 곧장 당신의 이름을 담아낸다. 하지만,)
…….
오늘은 꿈이 기네. (지독하게 단조로운 어조. 침대 가에 꿇어앉은 채 당신의 머리카락을 넘겨 보았고, 아, 앞선 꿈에서도 머리카락 위로 입을 맞추었던 것 같아. 이제 확실히 기억나네. 그 위로 재차 입 맞춘다. 조용하고 평화로이.)
▶:머리카락 위로 입을 맞추면, 아주 느리게, 천천히 눈을 뜹니다.
푸른 눈길은 넋을 잃어버린 것마냥 허공을 배회합니다. 그리고는 당신을 바라봅니다. 생동감 하나 없이, 줄이 끊긴 인형처럼 아득한 시선입니다. 마치 생명이라면 무릇 지녀야 할 어떤 불씨가 꺼져 버린 무존재처럼요.
이안 브란트:이상하네, 내가 눈을 뜰 시간인데 당신이 눈을 뜨면 어떡해. (농처럼 지껄이더니 당신 앞으로 손을 흔들어 본다.)
첸 티엔:(몇 차례 눈을 깜박인다. 시야를 가리는 손은 인지조차도 하지 못한 것인지, 그저 몸을 일으키기에 급급하다. 간극이 있을지언정 언제나 돌아왔던 대답이, 더는 돌아오지 않는다. 첸 티엔은 침묵을 고수했다. 그가 이안 브란트의 음성에 답하지 않은 적은 단연코 없었을 텐데도.)
이안 브란트:봐아, 꿈이네…. (말갛게도 웃었다. 여전히 애정 담긴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보았지만, 일말의 기대 없는…… 제 기억 속의 당신은 온전한가, 고작 그런 것을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서 내려와 섭니다. 멀거니 주변을 둘러보더니, 무언가에 홀린 듯이 느리게 걸어 휴게실을 나섭니다.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걷는 그는 아주 천천히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우주선 구조를 따라 나아갑니다.
어떻게 할까?
이안 브란트:어디 가요? (당신을 쪼르르 뒤따랐다. 그래도 움직이니 좋네, 신기하고…….)
▶:그는 이윽고 여가 공간으로 들어서더니, 잠시 멈추어 멍하니 안을 살핍니다. 어디 한 군데를 명확히 바라본다기보단 그냥 고개가 돌아가니 시선도 돌아간다는 느낌이네요.
그리고, 당신은 선내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주선이야 당연히 원래 무중력 공간이니 물건들이 둥둥 떠다니는 게 정상인데, 벽에 올려 둔 물건들이 평소처럼 떠다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집게 같은 것이 물건들을 붙잡고 있는 듯 그 자리에 고정되어 멈춰 있을 뿐입니다. 내부를 구성하는 가구나 기계들도 기묘하게 색이 다르네요.
눈에 띄는 물건으로는 창문, 책장, 스크린, 화이트보드, 수납함이 있습니다.
이안 브란트:(멈추어 서면 그제야 한번쯤 손 붙잡았다 놓았을 것.) 고장난 안드로이드처럼 행동하시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거대하고 너른 창문입니다.
아름다운 우주가 보입니다.
바깥이 희붐하게 밝아옵니다. 동이 트는 시점의 낙조처럼 저편에서 흰 불빛이 번쩍였다 사라집니다.
높은 고도에서 박살 나 부서지는 유리알처럼, 사방으로 갈라졌다 짧은 찰나로만 서쪽을 불사르고 꺼진 그 불빛은 인간이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할 천문학적 규모의 폭발로 보입니다.
이안 브란트:(눈을 가늘게 뜨다 말곤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다.)
▶:평소 영화 따위를 보거나, 자료 화면을 띄워 놓고 회의할 때 쓰던 스크린입니다. 지금은 화이트 노이즈밖에 나오지 않지만요.
이안 브란트:(금세 고개를 틀었고 책장을 뒤적거렸다.)
▶:당신이 책장으로 다가서면, 티엔 또한 책장으로 다가갑니다.
당신이 알던 물건들이 하나도 없는 빈 책장 한가운데 책만이 한 권 꽂혀 있습니다. 그가 손을 뻗어 그것을 만져 보려 하지만, 그의 손은 책을 그대로 통과합니다.
이안 브란트:응? 움직였다. (별 행동도 아닌 것에 열일곱 소년처럼 웃었다.) 이거, 궁금한 거예요? (책을 꺼내어 펼쳐 본다.)
▶:펼쳐 보면, 어딘가 익숙합니다. 표지에는 세계야담집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네요.
이안 브란트: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79 |
| 판정결과: | 실패 |
▶:내지에는 아무 내용도 없습니다.
첸 티엔:(묵묵히 당신의 손에 들린 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 브란트:안에 아무 내용도 없어요~…. (팔락이며 내지를 한 장씩 넘겨 보인다. 그러는 김에 앞뒤의 표지까지도 다시금 훑어 본다.)
▶:제목 외의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는 손을 뻗어 당신이 펼쳐 보인 책을 쥐어봅니다. 아까와는 달리 그 손이 책장을 통과하지 않습니다.
첸 티엔:(순간, 깊은 숨을 토해 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감탄사. 하늘은 다시금 호수를 응시했다.)
이안 브란트:저 보여요?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착각인가? 고개를 반쯤 기울이다 말곤 책을 덥썩 쥐어준다.) 기다려 봐, 잘 가지고 있어요. (수납함을 연다.)
▶:수납함은 텅 비어있습니다. 이럴 리가 없을 텐데 말이에요.
이안 브란트:(화이트보드도 확인해 보기.)
▶:원래 승무원들끼리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사항을 메모해 두던 곳입니다. 지금은 텅 비어있네요. 이걸 누가 지웠던가요?
이안 브란트:누가 지웠을까요? (중얼거리듯 묻는다. 혼잣말이다.) 다른 곳도 다시 가봐야 하나.
첸 티엔:(책을 빤히 바라보다, 바닥으로 툭 떨구어 낸다. 이곳은 우주임에도 책은 떠다니지 않으며 바닥과 부딪혀 둔탁한 소릴 낸다. 그리고는 느리게 한 걸음. 당신의 옷자락을 붙든다.)
이안 브란트:응? 뭐 필요해요? (옷자락 대신 제 손을 붙잡게끔 한다. 이런 찰나에도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고 마는 것이다.)
첸 티엔:(놓지 않았다. 그대로 고개를 돌려 바깥을 바라보더니, 다시금 걸음을 옮긴다. 향하는 곳은 연구소다.)
이안 브란트:(당신의 시선을 따라 가더니만) 하나씩 다시 가 보면 되는 건가…. (자연스레 연구소로 향한다.)
▶:연구소의 내부도 당신이 알던 것과는 모양이 묘하게 다르네요. 벽면 시계, 선반, 서류함 등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안 브란트:(벽면 시계를 살핀다. 몇 시지? 시계가 움직이긴 하는가?)
▶:아날로그 시계는 8시 31분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잠깐, 여기 있던 시계는 디지털 아니었던가요?
이안 브란트:(시계 위로 시선이 고정되었다가, 별 말 없이 선반을 살피기로 하였다.)
▶:각종 시약이나, 우주에서 실험하는 내용과 관련 있는 플라스크를 두는 곳인데, 지금은 텅 비어있네요.
이안 브란트:있던 것들이 사라지고, 원랜 없었던 것들이……. (묘한 눈빛이 당신에게 닿았다. 그것은 금세 떨어져서는 서류함을 훑기 시작했다.)
▶:원래 연구 기록 등을 적어 넣던 서류함입니다. 열어볼까요?
이안 브란트:(열어봅니다!)
▶:얇고 심플한 실버링이 서류함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낯익은 물건이네요. 꼭 당신 곁의 이의 손가락을 채우고 있는 것과 같은….
이안 브란트:(실버링을 챙겨 쥐어보았다가) 가질래요? 이런 거 좋아하잖아요. 꼭 당신 것 같기도 하고. (손 달라는 듯 손바닥을 내밀었다.)
첸 티엔:(그 위로 손을 올려 본다.)
이안 브란트:(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워 주었다.) 이런 거 해 보고 싶었거든요.
첸 티엔:(비어 있던 약지가 채워지면, 냉막하던 눈동자 너머로 비로소 온기가 들어찬다. 그리고 이어지는 야트막한 숨소리.) ……. ……이안?
이안 브란트:(변함없이 나긋한 미소. 채워진 약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네에, 이제 화물실로 가면 되는… …….
…….
(상황을 읽는 정적 뒤에,) 저 불렀어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얼굴을 들었다.)
첸 티엔:(10초의 간극. 꼭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신의 어깨 위로 볼을 기댄다.) 너무 추워요…….
이안 브란트:… 고장난 것 같아요. (울 것처럼 속삭였다. 대체 무엇이? 첸 티엔이? 혹은, 이안 브란트가? 그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가슴팍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더니, 바르작대던 손이 당신을 감싸안았다.)
첸 티엔:누가? ……. (그대로 품을 파고든다. 생각을 거친 행동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느린 행동은 그저 오랜 세월 바라왔던 것을 이행할 뿐인 구식 안드로이드와 다를 바가 없다.)
이안 브란트:어쩌면 모든 것이. (생각할 여유 없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옷은 금세 젖어들었다.)
첸 티엔:(뿌옇기만 한 기억임에도 잊지 않은 것이 있다. 얼마의 간극이 걸리든 행하고야 마는 것. 이를테면, 당신이 슬퍼할 때 곁을 내어 주는 것, 잘게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는 것, 나아가 외로워 보이는 등을 쓸어내려 주는 것…. 이변은 없었다. 이번에도 당신의 곁을 지키고 섰다.)
이안 브란트:(꿈이라 단언하였던 이유 무엇이었나. 그런 것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아진다. 하나 확실한 사실, 이렇게나 차가운 체온과 데일 듯한 다정은 당신의 것. 당신만이 내어주는 것, 나만이 받을 수 있는 것. 한참 그렇게 서 있다, 어깨의 떨림이 잦아들면 머무적대는 손이 손가락을 얽어낸다. 시선은 마주하지 못한다.) 이제, 어디로 가면 돼요?
첸 티엔:(답하지 않고 고개만을 돌려 낸다. 시선의 끝에는 화물실이 있을 터다.)
이안 브란트:(정적이 흐른다. 화물실로 향하였다.)
▶:벽장, 식품 보관장, 응급함, 선반등이 눈에 띕니다. 이곳 역시 앞선 장소와 마찬가지로 이질감이 느껴집니다.
이안 브란트:(벽장을 살펴 본다.)
▶:낡은 라디오가 하나 놓여 있네요.
이안 브란트:(라디오를 틀어 봅니다.)
▶:티엔, 나를 만나러 와.
이안 브란트:(일순 당신을 바라보았다가, 식품 보관장을 확인한다.)
▶:초콜릿 몇 개가 놓여 있네요.
이안 브란트:날 만나러 왔어요? (중얼거리며 초콜릿을 쥐어다 당신 손에 쥐어준다. 착하네.)
(응급함을 열어본다.)
▶:응급 약품을 보관하는 상자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네요.
이안 브란트:(선반에 놓은 것들을 살펴본다.)
▶:작은 노트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이안 브란트:(노트를 펼쳐봅니다.)
당신은…, 사랑을, 찾았나요? (단어의 연결이 늦다. 노트를 품에 안겨준다. 나는 찾아낸 것도 같아. 들리지 않게 말하였다.)
▶:노트를 품에 안겨주면, 그는 다시금 길게 숨을 내쉽니다. 이전과는 달리 혈색이 돌기 시작합니다.
첸 티엔:(더는 흐리지 않은 시선으로 당신을 마주한다. 명료해진 눈, 그 속에는 혼란이 어려 있다.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깊이 잠들었다 벼락같이 깬 사람마냥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안? (분주히 주변을 훑는다. 말과 행동이 더는 지연되지 않는다.) 여긴 어디예요? 우리, 분명 옥상에 있지 않았던가요?
이안 브란트:(기어이 파란을 마주하였다. 그의 눈썹이 팔자로 기울어 퍽 애처로운 낯이 되더니, 울음을 참느라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낸다. 이번에는 눈을 비껴내지 않았다.) … 바보. (원망하는 소리를 내더니만 곧 희멀건 뺨 위로 눈물이 방울진다.) 어서 말해 주세요, 꿈이 아니라고, 내 앞에 있는 당신은 온전한 첸 티엔이라고, 직접, 말해 줘…….
첸 티엔:(시간에 잡아 먹힌 탓인지 작별 이후의 기억이 없다. 말하자면, 첸 티엔의 머릿속은 온통 백지와 다름없을 것이다. 하나 그마저도 괘념치 않는 눈치였다. 이곳은 우주이고, 우주 속 흰 것이라면 별뿐이지 않은가. 드넓은 공간에 찍힌 점 하나. 사소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생각을 거칠 필요도 없다. 당연한 일이다. 첸 티엔에게는 더는 연산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인간이지 않은가. 당신을 찾아낸, 당신을 기다려 온. 순간의 망설임조차 없이 손을 가득 채운 반지를 빼낸다. 행여나 당신의 살갗에 상처라도 날까 우려한 탓이다. 그리고는 한껏 덜어낸 손으로 그 뺨을 감싸 쥔다. 당신은 나를 파란이라 일렀던가. 그렇다면, 자신에게 있어 당신은 그저 사랑일 것이다.) 그래요, 그러니까…. 보아하니 날 찾으러 와 준 모양이네요. 그쵸?
이안 브란트:(비워낸 손 위로 젖은 뺨을 기댄 채 속삭인다.) 응, 찾으러 왔어요. 당신이 많이 보고 싶었어……. (티엔. 저어, 이번에는 제대로 찾아 온 거죠?)
첸 티엔:(물기 어린 시간을 빠짐없이 훔쳐주었다. 첸 티엔 또한 첫 재회의 무렵에 눈물을 숨기지 못하였으니, 당신의 심정 또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짐작한 탓이다.) 네에, 저도 당신이 많이 보고 싶었어요. 어디 안 가고 잘 기다리고 있었는데…. 칭찬해 줄래요?
이안 브란트:으응, 잘했네. 멀리 가지도 않고… 기억해 줘서 고마워요. (손을 뻗어 머리를 가볍게 토닥이기 시작하였다.) 광막한 우주 속에서 당신이 나를 찾아내었으며, 내가 당신을 찾아내었구나. (그러니 B는 사랑을……. 이안 브란트는 느리게 움직이던 팔을 마저 뻗어 당신을 끌어안았다.)
첸 티엔:(한껏 마주안는다. 더는 이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맞아요, 당신이 나를 잡았어요. 그러니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들려줄 수 있나요?
이안 브란트:당신은 기억이 멈추어버린 것 같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났어요. 여기는 우주고요.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왔어, 품에 기대어 웅얼거렸다.) 그런데……. (몸을 조금 떨어뜨려 놓고) 오늘 갑자기 다른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저만 남았어요. 그러다가 당신이 자연발생 했다? 신기하죠. (저도 신기해요, 덧붙였다. 웃음기가 어른거린다.)
또 무슨 일이 있었더라, (당신과 관련되지 않은 일들은 비교적 가물가물하다.) 당신이 나타나기 전엔 이상한 빛이 나타났고, 기이한 음성이 들렸고… 맞아, 우주선 내부도 평소와 달라졌는데. (결국 떠오르는 대로 두서 없는 설명을 내놓았다.)
아… 이것도 말해줘야겠다. 빛이 당신 몸을 통과하더니 당신이 눈을 떴었어요. 근데 의식은 제대로 없는 것 같았고, 마치, 고장난 안드로이드처럼 움직였어요. (숨 내쉬는 속도 느려진다. 뜸을 들인다.)
하여간 그동안 제 마음대로 당신한테 해버리고 싶은 거 다 했는데. 기억 못하셔서 다행이에요. (농 치곤 표정 변화가 없다.)
첸 티엔:(우주, 첸 티엔이 이안 브란트를 처음으로 인식한 곳. 그리고 당신을 멀리 떠나보냈던 곳. 그러나 기어이 당신과 재회한 곳. 으레 항공우주국 직원이란 우주를 사랑하기 마련이었다. 이토록 광막한 어둠을 동경했으니 지구를 떠나 이곳에 도달하기를 바라마지 않는 것이 아니던가. 다만 첸 티엔은 우주를 사랑하되 동경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 까닭은 복잡하지 않다. 그저 여기에 당신이 있었기에.) 대충~…. 짐작 가는 곳이 없지는 않은데.
(이어지는 말에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해버리고 싶은 거? 뭔데요?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긴 잠에라도 들었던 것만 같아.
이안 브란트:뭐라고 했더라, 어떤 목소리가 태초의 것이 이끄는 대로 따르라고 했었나……. 대충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딴 생각 많이 했나, 기억이 잘 안 나네.) 짐작 가는 게 있어요? 뭔데요?
그건, (순진무구하게도 내리뜬 새까만 눈이 깜빡거린다.) 당신이 들으면 기겁할 만한 아주 파렴치한 행동을 했으니 너무 궁금해하지 마세요. (표정 변화도 없이 잘도 그런 말을 했다.)
첸 티엔:아무래도 여긴 정상적인 공간은 아니라는 거요. 그러니까…. 가상 우주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는데요. 당신과 내 무의식이 깊~게 연결된 곳 말이에요. 시간을 건널 때 이런 공간을 많이 지나 봤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낯이 좀 익네요. 이 공간도, 그 목소리란 것도요.
(덩달아 눈을 깜박인다. 눈꺼풀 사이로 하늘빛이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외에 별다른 기색은 내비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뭐든 괜찮아요. 파렴치하든, 그렇지 않든, 당신이 해 준 거라면 뭐든 좋은걸. 그러니까…. 말해주세요. 네?
이안 브란트:그렇다는 말은 우리… (뜸.) 다시 헤어져야 해요? 떠나야만 하는 거고요? (내놓는 말들이 한껏 무겁다. 어깨를 감싸던 손이 스르르 떨어지고, 잔뜩 시무룩해진 채.) … 의식 없는 사람이랑 그렇고 그런 짓을 했는데요. 괜찮다고 하셨으니까 반박이나 추가 설명 요구는 안 받을게요. (본인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지 자각은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자.)
첸 티엔:(이 스윙바이의 목적지는 이별 따위가 아님을 안다. 그러니 아주 흔쾌히도 부정의 답을 내어놓으려고 했다.) …네, ……네에?! (그래, 내어놓으려고 했다. 당신이 던진 발언만 아니었다면! 답잖게도 귓가를 물들이는 꼴이 그의 당황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어, 음. ……좋으셨나요? (이런 질문이나.)
이안 브란트:무, 무, 무슨 그런 질문을 해요?! (선수 친 게 누구인데 본인이 더 황당해한다. 그러나 금세 울상이 되어서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우물댄다.) … 몰라, 별로였어요. 다시 할 일 없을 텐데 중요한가요. (흥.)
첸 티엔:다시 안 할 거예요?
왜요?
이안 브란트:다시 멀어질 거잖아요. (삐죽댔다.)
첸 티엔:으응? (기우뚱.)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이안 브란트:다시 헤어져야 한다면서요. (혼자 오해해놓곤 고개까지 휙 돌렸다.)
첸 티엔:(그제야 오해를 눈치챈 모양. 샐쭉 웃는다.) 아~ 그럼….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면요? 다시 해줄 거예요?
이안 브란트:안 재우지 그럼…. (뭘?)
첸 티엔:이안 브란트 씨이. 음흉해요.
이안 브란트:몰라 미워요…….
첸 티엔:미워하지 마세요. 이젠 떠나지 않을 테니까. 응?
이안 브란트:(고개 여전히 비튼 채로 눈만 데굴 굴렸다.) 떠나야 하는 거 아녜요?
첸 티엔:떠나야 하는 건 아니고, 어디로든 떠날 수는 있겠네요. (함께 말이에요. 덧붙이며 당신의 손을 찾아 쥔다.) 제 짐작이 맞는다면요.
이안 브란트:(어디로든, 함께. 그 단어들을 듣는다면 손을 맞잡는 것으론 모자라니 얼굴마저 정면으로 마주한다.) … 어떻게요?
첸 티엔:(곱게 휘어진 눈으로 시선을 마주한다.) 우선은 조종실로 가 볼까요?
이안 브란트:으응. 네. (댓 발 나온 입술도 집어넣고 얌전히 대답하였다. 그래, 내가 당신을 안 믿으면 누굴 믿겠어…. 조종실로 향한다.)
▶:화물실에서 이어지는 다음 구역은 원래 조종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목격한 공간은 전혀 딴판인 장소였습니다.
마치 전시실 같은 풍경입니다. 깨끗하고 넓은 홀 안에 밝은 조명과 유리 진열장이 가득합니다.
한쪽 벽면을 완전히 채운 유리 너머에 무엇인가 진열되어 있네요. 곧장 티엔의 시선이 그곳으로 고정됩니다.
이안 브란트:(짧은 감탄사.) 완전히 새로운 공간 같은걸요. (홀 내부를 훑어보더니 그 또한 당신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함께 받아 보았던 당신의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당신이 기억하고, 또 잘 관리해왔을 것과 달리 누렇게 변색되어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진 것을 잘 압축하여 보관한 형태입니다.
아마도 이건, 티엔이 처음 보고 마음을 빼앗겼을 미래의 그림이겠지요.
이안 브란트:당신이 잘 간직하라던, 그 그림이네요. (멍하니 쳐다보았다.)
첸 티엔:네에. (짧은 침묵.) …어쩌면, 전 이때부터 당신을 사랑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이안 브란트:이때부터? (가만 웃었다.) 얼마의 시간일지 짐작이 안 가는걸요.
첸 티엔: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일걸요. (뻔뻔하게도 말 잇는다.) 그러니까, 당신이 책임져야 해요.
아까 보니까…. 제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더라고요? (눈물을 훔치기 위해 서둘렀던 그 순간,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는 이것이었다. 늘 비워 두었을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다니! 그간의 공백을 추리하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것까지 합쳐서 책임져주세요.
이안 브란트:응, 책임질까……. (느른히 웃으며 당신 어깨에게 기대었다. 이어지는 말엔 놀라 몸을 떼어내긴 했지만.) 언제부터 알았어요? (민망한지 저 혼자 팔짱을 낀 채 정확히 두 발 물러섰으며, 귓바퀴가 티나게 붉어졌다.)
첸 티엔:당신 눈물 닦아줄 때부터요. (숨죽여 웃는다.) 그보다 더한 발언도 하셨으면서, 이런 거엔 부끄러워하시네요?
이안 브란트:처음부터 알고 있었네요? ……. (이제야 수치라는 걸 아는 사람이 되어선 새빨개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아, 진짜아……, 신음하듯 웅얼대던 도중 손 틈새로 눈 한 쪽을 비죽 보여준다.) 다, 다른 것도 하긴 할 거니까. (급기야!)
……. (그는 당신의 손목 어귀를 가볍게 틀어 쥔 채 제 쪽으로 끌어왔다. 티엔, 이마 위로 입을 맞춘다.) 당신이 내게 내어준 시간만큼, 내 생애를 내어줄게요. (아마 영원 그 이상을 내어주게 되겠지…….)
첸 티엔:……날 사랑하나요?
이안 브란트:사랑. (그는 사랑을 발음해 본다. 입 안에서 단어를 짓이길수록 감정은 보다 명확해진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응, 사랑해요. (애초에, 이안 브란트에게 감정을 심어준 이는 당신 아니던가? 당신은 그를 살고 싶게 만들었고, 두 발로 나아가게 했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였고, 가끔은 한 사람을 위해 죽어도 좋다고 여겼으며…… 당신과 살고 싶다 염원하였다.)
첸 티엔:(그 말을 들으면, 더없이 행복하게 웃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첸 티엔의 행복은 주로 성취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이 노력한 것, 이룬 것, 존중받는 것…. 그러나,) 그거면 됐어요. 난, 그것만 있으면…. (첸 티엔은 새로운 종막을 꿈꾸었다. 사랑에 빠져 제 영원마저 내어주는 것. 그것이 그의 새로운 그랜드 피날레였다.)
……계속 가 볼까요? 이 앞에 조종실이 있을 거예요.
이안 브란트:생각보다 욕심이 없는 것 같아요, 당신……. (희미하게 웃었다. 아마 그런 것이 두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욕심 내지 않아도 곁에 있을 테니, 당신이 언젠가 그리 해 주었듯.)
(손을 맞잡은 채 조금 더 걷는다. 조종실로 나아간다.)
▶:조종실로 나아가고자 문을 열면, 발에 무언가 차입니다.
이안 브란트:(발치를 살펴보아 무언가를 확인한다.)
▶:맑은 소리를 내는 그것은 얼핏 보기에 와인 같습니다. 하지만 병이 투명하고, 안에 든 액체는 찬란한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습니다.
첸 티엔:응? 감로주 아녜요? 이게 왜 여기에 있담.
이안 브란트:그게 뭔데요? (일단 주웠다.)
첸 티엔:인간이 견딜 수 없는 여행을 할 때 마시는 거예요. 시간여행을 하거나, 우주로 나가거나 할 때요. 이상하게 보호받는 기분이 들거든요. 혹시 모르니 잘 챙겨 둬요.
이안 브란트:마시게 될 일이 생길 것 같아…. (중얼이며 웃었다.) 잘 챙길게요.
(조종실로 마저…….)
▶:목적했던 조종실로 들어서면, 멀리 너른 우주가 망망대해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내부는 알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지만, 바닥이 조금 이상하네요.
이안 브란트:바닥이 좀 다른 것 같아요? (발 끝으로 바닥을 툭툭 밟아본다.)
▶:평범한 타일 바닥이 아닙니다. 은빛 나무 재질인데, 거대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가운데에는 작은 톱니 두 개가 맞물려 서로 돌아가지 않고 탁탁 튀는 소리를 냅니다. 그 아래에 무언가를 끼워넣을 수 있는 홈이 하나 있네요.
이안 브란트:(홈을 유심히 살펴 본다. 뭘 넣으면 좋을까…….)
▶:당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
이안 브란트:…… 회중시계? (회중시계를 넣어봅니다 여기서 받은 거 그거밖에 없는 것 같은데 들어가나요 안 들어가면 티엔을 넣는 수밖에 없거든요…….)
첸 티엔:방금 이상한 생각 하셨죠.
이안 브란트:응? (돌아본다.)
첸 티엔:절 두고 굉장히 이상한 생각을 하신 것 같았는데요.
이안 브란트:좋아해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회중시계를 홈에 끼워 넣습니다.)
첸 티엔:(입술만 달싹이다, 이윽고 입을 다문다. 갑작스레 들어닥친 애정 탓에 귓가가 붉다.)
▶:회중시계는 제자리를 찾은 것마냥 홈에 완벽히 맞물립니다.
첸 티엔:실은~ 이 회중시계 말이에요. 특별한 기능이 하나 더 있거든요.
이안 브란트:뭔데요? (사실 받은 거 이렇게 넣어도 되나 생각하고 있었다.)
첸 티엔:사용자를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는 힘이 있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주고 온 거잖아요. 나를 찾아달라고….
이안 브란트:(눈 커다랗게 뜨고 깜박거리기만 했다. 숨 들이마시고야) 알려주는 게 늦네. (농.)
첸 티엔:제 그런 점을 좋아하셨으면서? (덩달아 농을 건네고, 조종간으로 다가선다.) 자, 이안 브란트 씨…….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이안 브란트:그럴지도 몰라요. 당신 멋대로 굴고, 극적인 상황 연출하고, 그럼 나는 또 속절 없이 사랑에 빠지고……. (웃었다.) 어디든지 좋은데. 당신은요?
첸 티엔:제 목적지는 당신의 곁이라, 이미 도착을 해버렸거든요. 그러니 다음 목적지는 당신이 정해주셔야 해요.
이안 브란트:글쎄, 수평선을 보러 갈까……. (앞으로 비스듬히 기대었다.) 이번에는 제가 묻고 싶어졌거든요. 당신이 지구에서 보는 하늘은 어떤 색인지, 아름다운지.
첸 티엔:(제 하늘은 이안 브란트, 바로 당신인데도요. 하늘은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으니 바닥을 내려다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아래로 시선을 돌리면, 호수가 자리하고 있지 않나. 그리고 그 호수에는 하늘이 비치기 마련이었으니.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럼…. 그리로 가 볼까요?
이안 브란트:네에, (이번엔 꼭, 답이 듣고 싶어. 손을 겹쳐 쥐었다.) 우리 같이 살아요? (이어지는 것은 실없는 물음이다.)
첸 티엔:그러면 안 돼요? 전 이미 결혼까지 생각했는데요. (답하며 조종간을 쥔다. 그리고 눈짓한다. 함께 잡아달라는 듯.)
이안 브란트:아니이, 저도 그러고 싶어서 물어봤어요. (냉큼 대꾸한다. 그래도 결혼은 천천히……. 조그맣게 덧붙이는데, 하여간 싫다는 말은 하질 않았다. 조종간 위에 손을 얹는다.)
이안 브란트:
| 기준치: | 100/50/20 |
| 굴림: | 22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조용한 진동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발과 발 사이 부드럽게 엉기는 무중력이 마치 비단 같습니다.
보석처럼 맺혔다 흘러 떨어지는 위성들, 멀리 반짝이는 은하. 분명 공기조차 없을 우주 저편에서 불어오는 듯한 여름밤의 열기. 두 사람이 그리워하는 시절을 모두 담은 듯이….
주변을 둘러보면, 문득 시선이 닿는 곳에 유리나 거울, 혹은 물체가 잘 비치는 수면 같은 것이 끝없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깨닫고 보면, 두 사람은 한 방향으로 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주선은 온데간데없어요.
길의 오른편으로는 스크린이 지평선 너머까지 쭉 이어져 있습니다.
그 화면 안에는 여러 풍경이 있습니다.
▶:당신의 유랑과 그의 방랑이 모두 담겨있어요.
그리고, 그 무수한 스크린 사이에서 당신은 문득 아주 눈에 익은 광경을 발견합니다.
날씨가 유난히 화창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는 소소한 점을 제외하면 다른 날짜와 다를 것 하나 없는 날입니다.
그날도 당신은 평소처럼 등교했습니다. 그런데 교실로 들어서니 뭔가 이상한 게 보입니다.
원래 자리 배정상 당신의 옆자리는 비어 있는데, 난데없이 책상 하나가 생긴 게 아닌가요? 게다가 누군가 앉아 있습니다.
티엔 역시 당신의 시선을 좇아 화면을 보더니, 이윽고 놀람 섞인 웃음을 터트립니다.
▶:이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기억하나요?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창문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정말로 사건이 생길 타이밍인데 말이에요.
첸 티엔:아~…. 알 것 같아요. 이안, 손 좀 줘보실래요?
이안 브란트:전 잘 모르겠는데~…. (하며 손을 내밀었다.)
▶:티엔은 당신의 손을 꽉 잡은 채 스크린 너머로 손을 뻗습니다.
강하게 맞물려 잡은 손에서 익숙한 체온이 퍼집니다. 두 사람의 손은 매끄럽게 화면을 통과합니다. 물의 장막 같은 것을 지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작고 판판한 유리 같은 것이 손끝에 잡혔을 때…. 그것을 힘주어 밀쳤습니다.
이윽고 화면 안에서,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위쪽 창문이 당신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첸 티엔:안 돼요, 이안 씨. 144번째는 안 되지.
▶:그는 대단한 것을 알게 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릴 뿐입니다.
첸 티엔:있죠, 이안. 저 날 말이에요. 사실~ 그날, 당신의 반에는 정말 새로 전학 오기로 했던 학생이 하나 있었어요.
전 그날 아침까지도 당신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해서 굉~장히 불안해 했었거든요.
학교를 마구 뒤질 셈으로 복도를 걷고 있었는데, 바로 앞에서 유리창이 갑자기 떨어지지 뭐예요? 그런데 그 아래에는 당신이 있고.
어쩌면…. 지금의 우리가, 저 무렵의 내게 당신의 위치를 알려준 셈일지도 모르겠어요.
(시선을 든다. 그 끝에는 수평선이 있다. 그 너머로는 여명이 떠오르고 있다.)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면 목적지에 닿을 것만 같아요. 그게 어떤 시대든, 어떤 과거든, 어떤 미래든 간에요….
그러니까…. (재차 손을 내민다.) 같이 걸어 줄래요?
이안 브란트:(슬며시 미소 지었다.) 꽤나 과격한 방식이네요. 뭐, 혼란스럽긴 했어도 도움이 됐고. 다시 만날 수 있게 됐으니 상관 없나.
(손을 마주 잡는 것엔 주저가 없었다. 오히려,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렸다는 듯….) 응, 언제까지나…….
▶:그때, 당신이 맨 처음 들었던 바로 그 통렬하고 깊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두 사람의 안에서, 세상의 밖에서 들리는 음성으로.
그게 너의 대답인가?
놀란 얼굴을 든 티엔은, 이내 웃으면서 당신의 손을 찾아 쥡니다. 그리고 명확한 목소리로 답합니다.
첸 티엔:네, 이것이 제 대답이에요.
▶:그리고 당신의 손을 잡아당겨 다시 걷기를 재촉합니다.
▶:당신은 불시착한 우주먼지처럼 이 시간여행자의 말도 안 되는 애정에 휩쓸려 다녔죠. 기나긴 시간을 눈부실 정도로 헤매였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데 얽혀, 본시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처럼 하나의 길만을 구성한 시간이 우리의 앞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가자, 지평선 너머로.
설탕처럼 반짝이는 별들을 타고 가자.
어둠 다음의 어두움으로, 혹성 저편의 성운으로, 마찰 없는 진공으로 뛰어들자.
▶ END 0. 라디오 전파는 끝없이 우주를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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